영화 <어느날> 리뷰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어느 영화나 그렇듯 <어느날> 역시 한 마디로 평가할 수 없는 작품이나, 이 글에서는 이윤기 감독의 전작들과 비교하여 아쉬웠던 점들 위주로 리뷰를 하고자 한다.
이윤기 영화들의 움직임
이윤기 감독은 <여자, 정혜>, <멋진 하루>, <남과 여> 등 전작에서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보여준 바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도드라지는 것은 그의 영화들이 가지고 있는 어떠한 움직임이다.
그의 작품들은 일상의 주변을 서성이다 나아가고, 나아가는 듯 하다 돌아오는 독특한 머뭇거림이 있다. 그것은 주로 "서성인다" 정도의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느리고 예민한 운동이다.
그의 주인공들은 서로 성격과 상황은 다르지만, 공통된 서성거림을 지닌 채 주로 도시를, 간혹 이국적인 장소를 부지런히 거닐었다.
자신만의 장소를 배회하는 불규칙하고 불확실한 서성거림.
이것이 이윤기 감독의 작품들이 품은 독특함이다.
서성거림 뒤로 새겨지는 배경
인물들이 끊임없이 서성이므로, 그 인물들을 따라가는 카메라에는 자연스레 '배경'이 새겨진다.
그리고 이윤기는 인물 뒤로 반복되는 배경을 이용하여 영화의 정조를 만들어낼 줄 아는 감독이다.
<여자, 정혜>에서는 회사와 집이 반복되는 일상적 풍경이, <멋진 하루>에서는 조병운(하정우)이 이끄는 행로 뒤의 도시가, <남과 여>에서는 캐나다의 설경과 한국의 도회적 분위기가 이 영화들의 정조를 만들어냈다.
때문에 그의 작품을 떠올릴 때면 어떤 풍경의 색채가 강하게 연상된다.
그리고 이 풍경들은 인물의 심리나 정서를 투영하여 그들 뒤에 펼쳐졌다.
그것은 강한 향취를 내뿜되 인물 앞으로 나서는 법이 없었으며, 인물의 감정과 어우러져 영화의 정취를 만들어내곤 했다.
절제된 서사에 들러붙은 과거
이때 그 인물의 일상에는 대개 과거의 기억이 얼룩처럼, 혹은 어쩌다 붙어버린 껌처럼 들러붙어 있었다.
이것은 서사를 포기하되 감정의 일렁임, 혹은 운동을 따라가려는 시도다.
그 감정은 대개 선명하지 않다.
하지만 길가의 향기를 쫓아 골목을 서성거리듯, 희미한 감정을 쫓아 인물의 불규칙적인 움직임을 따라가는 영화의 리듬은 이윤기의 작품의 매력이다.
<어느날>이 전작들과 다른 점
<어느날>에 이르러 어떤 변화들이 엿보이는데,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일단 인물들은 더 이상 서성이지 않는다. 강수(김남길)와 미소(천우희)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하지만 이것은 전작들과 다르게 머물지 못해서 배회한다기보다, 잠시 나들이를 나온 느낌이다. 그들은 외출 후에 익숙하게 집에 돌아가며, 여기엔 어떠한 감정의 얼룩이 없다. 이는 미소가 가고싶었던 장소를 찾아간다는 설정의 영향이기도 하다.
또한 서사가 분명해졌다. 기승전결이 분명해지고 사건-해결의 양상으로 플롯이 진행된다. 이러한 경향은 과거의 작품에서도 없었던 바는 아니나 <어느날>은 그의 작품들 중 이례적으로 서사가 또렷한 편이다. 이것은 영화의 각본이 감독이 직접 쓴 것이 아니라 다른 작품을 각색한 것이라는 영향도 있어 보인다.
서사가 분명해지면서 나타난 효과 중 하나는 과거가 더 이상 얼룩으로 남지 않으며, 절정에 이르러 해소되고 정리된다는 것이다. 과거가 해결의 대상으로 등장한 것은 그의 영화 중 이례적이다.
마지막으로, 예전보다 배경의 존재감이 미묘하게 커졌다.
전작들과 달리 <어느날>에는 특정한 배경이 중요하게 등장한다.
그 중의 하나가 석양이 지는 해변이다.
그의 전작들에서 절정의 감정을 한 곳에 뿌리박은 장소는 그리 많지 않았다.
또한 미소는 자주 건물 옥상에서 하늘을 배경으로 아련한 표정을 띄고서 앉아있다.
단조롭게 정돈된 감정
이러한 변화는 결국 '슬프지만 아련하고 깨끗한 정서'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잦아드는 것은, 이윤기 감독의 작품들이 지녔던 인물의 감정에 대한 생생한 시선이다.
여지껏 이윤기는 인물의 감정을 '불확실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흐릿하게 감지되는, 제자리에서 진동하고 진통하는 감정의 덩어리에 집중할 줄 알았다.
그러나 <어느날>에 이르러 감정에 대한 묘사는 예전보다 선명하되 단조롭게 그려진다.
커다랗게 존재하는 배경 아래에서 직선적으로 진행되는 서사를 위하여, 이윤기만의 불확실성은 줄어들었고 감정의 잔가지도 탈락되었다.
이는 결국 인물들이 이 따스하며 아련한 영화의 정서에 기능적으로 복무하는 느낌을 준다.
미소는 이해심이 지나치게 넓다. 자신을 버린 친모도, 그녀를 자살로 모는 보험회사도 그녀는 늘 웃으며 이해한다. 또한 미소가 생에 대한 의지를 단념하는 과정이나, 그것을 전달하는 방식은 지나치게 이쁘고 깔끔하다.
한 여자가 생을 포기하는 과정조차 영화는 깊게 개입하지 않고 아련하고 단정한 선에 머물러 있다.
이러한 선택은 봄꽃같은 영화의 정조를 해치지 않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결과적으로 <어느날>의 인물들은 이윤기 감독의 전작만큼 살아서 꿈틀거리는 감정을 표하지 못하고, 영화의 정서에 짓눌려 아름답고 정제된 감정만 드러낸다.
그래서 아름다운 하늘과 해변의 풍경도 인물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고, 오히려 인물들의 감정을 집어삼켰다는 인상을 준다.
이윤기 감독의 작품들은 호불호가 있는 편인데 내게 그의 작품은 호에 속했다.
그의 영화는 과묵한 주인공들의 감정을 애써 따라갔다.
결과적으로 그 인물들은 영화안에서 자유로웠다.
그러나 <어느날>의 강수와 미소는 영화의 서사를 따라가며 영화가 제시하는 아름다운 풍경에 걸맞는 사람이 되느라 힘겨워 보인다.
이 영화는 전작들에서 느껴지던 감정의 잔가지나 잔여물 없이 매끈하다.
이런 류의 멜로 영화라면 다른 곳에서도 익숙하게 접해왔다.
<멋진 하루>에서 희수가 침묵하며 창밖을 볼 떄, <여자, 정혜>에서 정혜가 멍하니 물을 마실 때, <남과 여>에서 상민이 카페에서 만난 기홍을 훔쳐볼 때.
그 장면들 안에는 어쩔 줄 모르고 몸을 떠는 덩어리진 감정이 존재한다.
그 불균질하게 생동하는 순간을 그의 작품에서 다시 접하길 기도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