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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홍수정 Nov 20. 2018

숙명적 만남을 향하여, <카우보이의 노래>

영화 비평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코엔 형제의 신작, <카우보이의 노래>가 넷플릭스를 통하여 공개되었다. 이 작품에 코엔 형제의 색깔이 여전히 진하게 배어있음을, 여섯 개의 에피소드가 모두 아름다움을 새삼 언급하는 것은 지루한 일이다. 그래서 이 글은 영화에 대한 총평보다는 유독 눈에 들어온 하나의 요소를 중심으로 써볼까 한다.

 

생각하자면, 타인과의 만남은 본질적으로 위험하다. 시간을 되돌려서 원시시대에 도착했다고 가정해보자. 낯선 이와의 만남은 우리를 숙명적 순간으로 인도한다. 상대가 나를 죽일 수도 있고, 내가 상대를 해쳐서 목숨을 부지할 수도 있다.  만남마다 목숨을 건 주사위는 던져진다. 그러니 만남은 본질적으로 강렬한 것이다.

그러나 현대에 사는 우리에게 만남은 지루한 일상이 되었다. 우리는 누구를 해치지 않아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으며, 시스템 속에서 안전하고도 질서 있게 살아간다. 그러나 몸 어딘가에는 여전히 남아있지 않을까? 새로운 만남에 대한 본능적인 감각 말이다. 누군가 나를 등 뒤에서 쳐다볼 느끼는 불쾌감, 이방인에 대 인류의 오랜 적개심. 그리고 영화 <추격자>의 최고 유행어. 야, 4885. 너지? 이 대사가 그토록 사랑받은 이유는 아마도 숙명적 상대와의 대면의 순간을 담았기 때문일 것이다. 저 말은 우리가 '만남'에 대하여 갖는 원시적 공포를 짜릿하게 자극한다.


그래서 코엔 형제는 서부 개척시대로 돌아간다. 아직 만남의 야생성이 제거되지 않았던 시대로. 낯선 총잡이와의 만남은 필연적으로 당신의 목숨을 위협한다. 그런 면에서 영화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도 닮았다. 그러나 <노인>이 만남의 부조리와 허무를 강조한다면, <카우보이>는 그 순간과의 대면을 강조한다. 그 순간에 색을 입히고 표정을 부여하며, 영화는 우리가 잃어버린 태초의 감각을 되살리려 한다.  



첫 번째 에피소드가 끝나갈 무렵, 낯선 총잡이가 버스터 스크럭스에게 다가온다. 자신을 '죽음의 징조'라고 소개한 사내는 말 위에서 아름다운 노래를 연주한다. 버스터 스크럭스는 넋을 놓는다. 이 순간은 영화를 시종 장악하던 익살스러운 버스터 스크럭스가 처음으로 주도권을 빼앗기는 순간이다. 매혹당함은 곧 패배를 의미하는 것일까. 그는 전설의 자리에서 물러난다. 이 에피소드에서 우리는 '매혹'의 얼굴로 다가오는 숙명적 순간을 본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만남에 대한 '착오'를 포착한다. 총을 든 건장한 은행강도는 어이없게도 냄비로 자신을 무장한 노인에게 패배한다. 생명의 은인이라고 생각한 카우보이는 주인공을 죽음의 길로 이끈다. 사내가 옆사람에게 건네는 시답잖은 농담(First time?)은 그가 살아날 것이라는 예감을 안기지만, 사내는 죽음을 피해 가지 못한다. 어여쁜 아가씨와의 만남도 죽음을 유예하지 못한다. 사내의 운명은 계속해서 관객의 예측을 벗어난다. 아, 운명의 표정을 읽을 수 없다.


세 번째 에피소드는 가장 아픈 만남을 그린다. 무대 위에서 고개를 떨군 채 등장하는 남자의 모습, 소리 높여 전하는 이야기, 황량한 풍경을 담은 두 눈, 조각난 채 반복되는 무대들. 어느 하나 마음을 건드리지 않는 장면이 없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가슴이 아픈 것은 남자가 닭과 대면하는 순간이다. 남자가 밥을 먹어야 하는 장소에서 닭이 모이를 쪼고 있다. 다음 장면에서 남자와 닭은 마차의 뒷자리에 함께 실려있다. 만남이 죽음으로 이어지는 서부개척시대. 영화는 남자가 닭과 대면하게 함으로써 이 남자의 슬픈 처지를 그린다.  


네 번째 에피소드는 중층적인 만남을 그린다. 노인은 금맥과의 만남을 기다린다. 그 시간을 견디기 위하여 노인은 올빼미와 만난다. 올빼미는 자신의 알을 먹으며 목숨을 부지하는 노인을 큰 눈으로 지켜본다. 노인이 마침내 금맥과 만났을 때, 그는 적과 마주친다. 노인이 적과의 싸움에서 끝내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그 보다는 이 에피소드가 얼마나 감각적이고도 중층적으로 만남들을 쌓아가고 있는지, 그것을 느끼는 일이 중요한 하지 않을까.


다섯 번째 에피소드는 가장 이상하다. 이 일화는 여자와 남자가 서로를 조심스레 알아가는 과정을, 가장 긴 시간을 투자하여 그리고 있다. 그러나 정작 여자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개와의 만남'은 영화에서 삭제되어 있다. 이 불균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사랑하는 남자에 의해서 잠시 사라졌다가 어느 순간 그녀의 팔에 안겨있는 개. 이것을 죽음에 대한 우화로 보면 될 것인가. 죽음은 언제 마주친 것인지도 알 수 없게, 누군가의 품을 찾아오는 것일까. 이 에피소드에서는 '개와 여자의 만남'이 삭제되었다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 그 공백이 비극적 만남에 대한 코엔 형제의 시각을 담고 있을 것이다.


마지막 에피소드는 영화의 대미를 장식하기에 적합하다. 마차의 앞칸에 탄 두 남자는 (그들의 말로 유추하건대) 죽은 이를 저승으로 인도하는 사자로 보인다. 사자와의 만남은 누군가가 인생에서 맞이하는 마지막 만남이 아닐까. 영화는 마차 안에 온전히 집중함으로써 마지막 만남을 한 없이 연장시킨다. 전 편의 에피소드가 죽음 직전의 만남을 생략하고 보여주지 않는다면, 이 에피소드는 죽음 직후의 만남을 온전히 보여준다. 인물들의 소소한 인생사에 대한 지루한 수다가 이어진다. 영화가 그 수다를 끊지 않고 묵묵히 지켜보는 모습에서, 그들의 인생에 대한 존중의 태도가 느껴진다.  

뉘엿뉘엿 지는 해와 끊이지 않는 수다. 마침내 도착한 호텔에서 모자를 쓴 사내가 흥미로운 표정을 짓고 들어선다. 또 다른 이야기가 이어질 터다. 하지만 영화는 여기까지가 끝이라는 듯 호텔의 문을 닫아버린다. 나는 중절모의 사내가 들려줄 새로운 이야기가 기다려진다.



나는 영화를 보며 어쩐지 코엔 형제가 서부개척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낯선 이와의 만남이 생사를 결정했던 시절. 그 시절에 대한 향수는 잦은 죽음과 살인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만남이 생사를 결정하므로 그만한 무게를 지니게 되고, 만남은 인연으로 발전한다. 어쩜 이리도 가볍고 뻔한 만남만 반복되는 세상이 되어버렸담. 코엔 형제라면 그렇게 불평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가. 영화는 만남이 지닌 야생성을 되살리려 한다. 만남에 불안을 불어넣고 충격을 새긴다. 이다지도 무겁고 숙명적인 대면의 순간을 <카우보이의 노래>는 품고 있다.


영화의 한 장면이 생각이 난다. 이 장면을 언급하며 긴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네 번째 에피소드. 금맥을 찾은 노인을 한 사내가 총으로 쏘았다. 노인은 피를 흘리며 바닥에 누워있다. 문득 하늘 위로 새 한 마리가 지나간다. 노인에게 알을 빼앗긴 그 올빼미 일 것이다. 사내가 하늘을 올려다본다. 노인, 사내, 그리고 새. 세 개의 인연이 교차한다. 스크린 위로 숙명적 만남의 순간이 새겨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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