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보헤미안 랩소디>는 그 성취의 많은 부분을 퀸의 명곡과 프레디 머큐리 역의 배우(라미 말렉)에게 빚지고 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간단하다. 영화가 모르는 노래들로 채워졌다면, 라미 말렉의 열연이 없었다면, 이 영화가 이다지도 사랑받을 수 있었을까.
물론 성취도 분명히 있다. 감독 브라이언 싱어의 실력이 돋보이는 부분은 극 중 프레디 머큐리의 캐릭터를 그리는 부분이다. 영화는 우리와 프레디 사이에 얼마간의 공백을 남겨놓는다. 프레디는 거만한 사람인가, 혹은 외로운 사람인가, 그와 메리의 관계는 무엇이었을까. 명확한 답은 보이지 않고 공백은 메워지지 않는다. 그런데 사실 이 공백은 그저 미완성의 흠결로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런 실패를 차단하는 것은 라미 말렉의 연기다. 정확히는 얼굴이랄까. 놀란 듯이 동그랗게 뜨고 상대를 쳐다보는 두 눈, 미세하게 떨리는 눈동자, 거만하면서도 수줍게 올라가는 입매. 라미 말렉의 얼굴은 영화가 남겨둔 텅 빈 공백을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로 바꾸어 놓는다. 우리는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프레디의 심연을 고민하게 된다.
반면 영화의 아쉬운 점은 그 단조로운 진행이다. 이것은 단지 스타일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영화는 프레디의 생애를 영화적으로 표현하는 일에 게으르다. 재현하는 인물에 대한 고민은 잘 보이지 않으며, 그에 대한 정보를 그저 시간에 맞춰 나열하는 식으로 영화를 진행하고 있다. 그 게으름을 배우의 매력과 퀸의 무대로 무마하려는 것 같다는 느낌을 종종 받았다.
그러나 내가 가장 문제라고 생각한 점은 이것이다. <보헤미안 랩소디>는 프레디의 사생활과 관련하여 하나의 악역을 등장시킨다. 그것은 폴 프렌터(엘렌 리치)다.
폴은 영화에서 프레디를 고립시키며 팀을 와해하는 주범이다. 그런데 사실 여부를 불문하고 영화가 이런 식으로 프레디의 이야기를 다루는 점은 의문을 자아낸다. 영화는 프레디가 퀸의 멤버들과 갈등을 갖는 것, 그리고 남성들과 파티를 벌이는 것을 미묘하게 동치로 두고 있다. 그리고 이 모두의 원흉으로 슬그머니 폴을 내세운다. 물론 프레디도 반성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이는 '잠시의 탈선'임에 반해 폴은 원래 그런 캐릭터다. 영화를 보자면 프레디는 그럴 사람이 아닌데 폴 때문에 그 모든 일을 겪은 셈이다.
이것은 폴 프렌터를 떠나서 프레디 머큐리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인물의 일부를 탈선으로 규정하고, 그에 대한 해명을 늘어놓는 일. 게다가 그 해명이란 것이 "우리 애가 원래는 착한데 나쁜 친구를 사겨서 그만" 하는 수준이니, 내게 이것은 프레디의 행적의 일부를 그의 주체적인 행동으로 보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들린다. 주체적인 것이 아니므로, 그의 역사에서 슬쩍 밀쳐두어도 상관없을 것이다. 다른 욕받이를 앞세우고 변명을 해주는 방식으로 <보헤미안 랩소디>는 프레디의 삶의 일부를 흐릿하게 삭제한다. 이것은 누군가의 삶을 입맛에 따라 편집하는 태도다. 영화가 이런 태도를 지녀도 괜찮은가. 자신이 부활시키려는 인물에 대해서 말이다.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영화는 자신이 다루는 실존 인물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을 갖추어야 한다. 존중은 인정에서부터 시작된다. 일부나 조건부가 아닌 전부에 대한 인정. 그의 행적을 모두 긍정할 필요는 없어도, 그의 삶을 조각내지 않고 온전한 하나로서 인정하여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영화가 빚지고 있는 인물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이유모를 해명은 타인의 삶에 대한 모욕이다.
<보헤미안 랩소디>는 퀸의 명작들을 되살려 냈다는 상찬을 얻고 있다. 그러나 부활은 존중을 전제할 때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진정한 존중은 어디에서 오는가. 영화가 선사한 실감 나는 무대를 즐기고 나서도 마냥 가벼운 마음으로 극장을 나오지는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