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평론가 홍수정 Nov 27. 2018

이야기의 승리, <암수살인>

영화 비평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무엇을 찾으려는가

'암수살인'이란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살인사건을 말한다. 그러므로 제목을 들음과 동시에 우리는 영화가 살인의 진실을 파헤칠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이상한 점이 있다. 영화는 처음부터 살인범과 피해자를 알려주고 시작된다. 그렇다면 영화가 찾는 진실이란 무엇일까. 피해자의 정확한 이름? 증거가 묻힌 장소? 살인의 디테일을 찾기 위하여 우리는 두 시간 동안 영화는 보는 것일까. 그런 의문을 품고서 글을 시작하려 한다.



형민과 태오의 차이

김형민(김윤석)과 강태오(주지훈) 사이의 팽팽한 긴장은 영화의 백미다. 태오는 상대를 도발하면서도 도주의 기회를 노리고, 형민은 적당히 도발을 받아주며 검거의 기회를 노린다. 둘 사이 긴장의 표면상의 이유는 도주와 검거를 향한 욕망의 대립이다. 그러나 영화를 보다 보면 그 이면에 숨겨진 또 다른 대립이 있음을 알게 된다.


가끔 할머니 용돈을 챙겨주는 착한 손녀였대. 형민이 피해자 오지희를 회상하며 동료에게 말한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이것이 피해자의 과거를 미화하여 관객의 동정을 얻는 영화의 흔한 수법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마지막에 형민이 바라보는 것은 꼬마시절 수영 선수였던 오지희의 사진이다. 용돈과 수영. 형민은 자꾸만 피해자에 관한 사소한 이야기들을 회상한다. 사건의 해결과는 무관한 이야기를 말이다. 형민은 법정에 서서 말한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생각하여 보십시오. 자신의 목에서 터지는 피를 보았을 피해자의 심정을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형민은 그런 사람이다. 피해자를 살아있는 이야기로 회상하는 사람. 어찌 보면 사건의 단서를 수소문해야 하는 형사는, 필연적으로 이야기 수집꾼 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태오에게 피해자는 자신의 살인 능력을 과시하기 위한 대상이다. 신체를 난도질하는 과정을 떠벌이는 태오의 모습에서 피해자를 사람으로 여기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태오에게 죽은 피해자는 감추어야 할 '증거'다. 그러니 태오는 형사들에게 큰 소리를 치는 것이다. 살인이 자꾸만 벌어지는 것은 증거를 찾지 못하는 형사들의 무능 때문이다. 그에게 수사란 증거를 감추고 찾는 게임이다. 게임의 참가자는 종국에 승자와 패자로 나뉜다.

그러나 형민에게 피해자는 '이야기'다. 이야기에 승자와 패자란 있을 수 없다. 오로지 말을 하는 화자와 귀를 기울이는 청자가 있을 뿐. 형민은 태오에게 말한다. 너 같은 놈을 이겨서 뭐하겠냐고. 세상의 관심도 못 받고 죽은 사람들을 생각하니 그것이 안타까울 뿐이라고 말이다.


그러므로 형민과 태오는 서로 대립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피해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충돌하기 때문이다. 태오는 완전범죄를 위해 처리해야 할 대상으로서, 형민은 귀 기울여 들어야 할 이야기의 화자로서 피해자를 바라본다. <암수살인>은 자백의 진위를 밝히려는 형사의 분투를 줄거리로 삼고 있지만, 각자의 관점으로 상대를 관통하려는 두 남자의 팽팽한 시선의 힘으로 추동되는 영화다.      



한 번의 패배, 한 번의 승리

형민은 태오와 법정에서 두 번 대립한다. 한 번(오지희 사건)은 패배하고, 한 번(박미영 사건)은 승리한다. 승리의 순간은 짜릿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패배의 순간이다. 처음 형민은 왜 패배했을까. 물론 표면적인 이유는 수사가 부진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처음과 나 수사의 차이는 무엇일까.

오지희 사건을 수사할 때 형민은 태오가 말한 증거를 찾는 일에 집중한다. 그는 '증거'를 찾으면 사건이 해결된다던 태오의 논리대로 움직인 셈이다. 그는 심지어 태오 앞 유 사진을 들이대기도 한다. 그러나 무스탕을 찾고, 강바닥을 뒤졌지만 수사는 실패한다. 증거를 통해 사건에 다가서려던 시도는 미끄러진다.

 

두 번째 수사에서 형민은 달라진다. 그는 정보를 토대로 새롭게 이야기를 구성한다. 물론 해결의 실마리는 루프(여성용 피임기구)를 찾은 것이었다. 그러나 영화는 살인의 증거보다, 살인에 얽힌 스토리들을 찾는 데 많은 시간 다. 왜 하필 그날이었는지, 박미영의 실종은 왜 알려지지 않았는지, 감추어진 과거의 살인은 무엇이었는지. 여기에는 박미영, 강태오, 강태오의 누나 등 개인의 역사를 이해하는 과정이 요구된다. 형민이 그 모든 이야기 이해하였을 때, 비로소 사건은 해결된다. 형민은 태오를 찾아가 말한다. 여자가 루프 시술을 했다는 얘기까지는 안 했나 보네? 증거로 상대를 압도하던 태오는 그가 놓친 이야기 때문에 패배한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결말은 증거에 대한 이야기의 승리로 보아야 할 것이다.

끝나기 직전, 또 하나의 사연이 밝혀진다. 어머니가 도망갔다는 오해 때문에 사라진 어머니를 찾지 않았다는 희생자 아들의 이야기다. 사건 당시 꼬마였던 한 남자의 사연까지 모두 발화되자, 사건은 마침내 종결된다.   



사건을 해결한다는 것

<암수살인>에서 중요한 것은 싸움의 승패도, 증거의 발견도 아니다. 이름 없는 유골에도 이야기가 있었음을 깨닫는 과정이 중요하다. 수영을 좋아했던 여자, 지지리도 운이 없었던 살인범의 어느 밤, 아버지의 죽음을 숨기기로 결심한 소녀의 울음까지. 한 건의 사건을 해결하는 것은 그것을 둘러싼 무수한 이야기를 듣는 일이며, 상처 받은 인간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영화의 마지막, 태오는 또 한 번 내기를 걸고 형민은 다시 희생자를 찾아 나선다. 달라진 것은 없다. 처음처럼 수사를 재개하는 한 명의 형사가 여기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곳에는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와, 사라진 이야기들과, 희생자를 찾는 형사의 눈빛이 언제고 지속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보헤미안 랩소디>의 성취, 그리고 태도의 문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