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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홍수정 Jan 30. 2017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 대한 외로운 부동의.

이 영화의 뜨거운 감동을 의심하라.

※ 스포일링을 담고 있습니다 ※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 반대하기란 쉽지 않다.

실상 그런 관객이 있다면 어떠한 면에서 존경을 표한다.

먼저 이 영화는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이며, 국외 및 국내 모든 평자들의 뜨거운 호응을 얻고 있다.

나는 이 영화에 대한 비판적 평을 찾아보려고 노력하였으나 결국 실패하였다. 어딘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노력을 다해야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이 영화에 대한 평가는 호평 일색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둘째. 이 영화는 감동적이다.

그것도 뜨겁게 감동적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는 보는 이의 가슴을 데울 대부분의 요소들을 담고 있다.

다니엘 블레이크는 사랑하는 아내를 간호할 때의 버릇이 남아 밤에 일을 했었다. 그의 아내는 얼마 전 세상을 떠났고 이 노년의 목수는 혼자 남았다. 그는 이제 심장병을 얻어 일 조차 할 수 없다. 질병 수당을 신청하였으나 거부당했고, 이 외로운 노인은 디지털에 익숙하지 않아 재심사 기각 결정에 항고하기도 쉽지가 않다.


영화의 감독 켄 로치가 밝혔듯이 이러한 이야기는 이미 영국 사회에서 보편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그 진정성을 의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러한 요소들이 만들어내는 즉각적인 효과에 주목하고자 한다.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남자가 노년에 맞는 거듭되는 비극에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막을 도리는 없다.

더구나 다니엘 역을 맡아 열연한 데이브 존스의 얼굴은 보는 이의 심장을 무너뜨린다.

그 동그랗고 맑은 두 눈과, 모든 것을 감내하려는 듯이 굳게 닫힌 얇은 입술이 만들어내는 충돌은, 마음을 거세게 흔드는 구석이 있다. 섬세한 이의 결연한 다짐이란 그런 것이다. 마음을 무너뜨린다.


셋째. 이 영화에 정치적으로 반대하기란 더욱 어렵다.

사회적 시스템의 사각지대에 몰린 약자들의 순수한 연대. 이러한 주제는 관객들의 마음을 끌어당긴다.

더구나 감독 켄 로치는 사회운동가로 불릴 만큼 자본주의적 시스템의 어두운 이면에 대하여 줄기차게 비판적 질문을 던져온 사람이다. 개인적으로 차이를 보일지 모르나, 그의 굳건한 행보는 존경스럽다.

그의 영화에 대한 보수 진영의 비판도 그의 영화를 반대하기 쉽지 않은 이유일 수 있다.

켄 로치가 50여 년 전 만든 BBC 수요 드라마 극장 <캐시 컴 홈>을 연출하였을 때 받았던 비난은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는 보수 진영으로부터 영국의 시스템 문제를 왜곡하고 날조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에 대한 그의 대답은 "푸드뱅크라도 방문하여 그들의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라"는 것이다.(씨네 21. [정지연의 영화비평] 저항의 멜로드라마 <나, 다니엘 블레이크> 참조.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85988)

마치 다니엘과 같이 사회로부터의 짐을 안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감독의 영화에 반대하는 것, 더구나 동의하지 않는 비판으로부터 시달리는 영화를 반대하는 것,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무수히 많은 험난한 허들을 넘고서라도, 나는 이 영화가 주는 감동에 동의할 수가 없다. 

최선을 다한 반대는 이 훌륭한 영화에 대한 나의 답변이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이루는 근간은 '관료주의적 복지 시스템의 모순'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며, 그 위에 '약자들이 연대하는 이야기'가 서사로서 진행된다. 

켄 로치는 선한 자들의 연대 위에 복지제도의 모순이 자연스럽게 부상하도록 영화를 연출하였다. 

이 두 가지 축은 서로 물고 물리며 서로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형식적 관료제에 찌든 복지시스템에 대한 감독의 연출은 훌륭하다. 

영화의 초반 5분이 지나기도 전에, 관객은 영국 복지제도의 허상과 그로 인한 답답함을 느낄 수 있다. 암흑의 스크린을 배경으로 한 전화 상담 장면은 단 몇 마디의 대화로서 전체 영화의 테마를 감각적으로 느끼게 한다. 



그렇다면 약자들의 연대를 다룬 부분은 어떠한가.

일단 설정 자체는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것들이다. 

미혼모 가정과 가족이 없는 노인, 이들이 유사 가족을 이루어 서로 의지하는 설정은 적어도 사회 구성원 간의 가족적 연대를 표현할 때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이 사회적 약자로서 보이는 모습은 또 어떠한가.

디지털에 익숙지 못한 노인이 인터넷을 이용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미혼모의 여성이 아이를 양육하기 위하여 성매매를 하게 되는 과정은 볼 때마다 가슴을 찌른다. 그러나 이러한 설정은 약자의 사회적 곤경을 생각할 때 전형적으로 떠오르는 것들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다니엘이 성매매업소로 내몰린 케이티를 찾아가 눈물짓는 장면은 영화가 흔한 멜로적 요소들에 손쉽게 기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그 식상함을 비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지루한 스토리라고 치부하기에는 우리가 사는 현실의 모습임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흔한 요소들이 만들어내는 익숙한 감정적 동요가, 관료주의적 복지시스템의 병폐라는 이 영화의 주제를 손쉽게 건드리고 있다는 것이다.

 

관료들의 형식적 일처리가 불행의 씨앗임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케이티의 경우, 몇 분 늦었다는 이유로 '제재 대상'으로 분류되고, 곧이어 식료품 지원을 받다가 통조림을 허겁지겁 먹으며 눈물짓고, 아이의 신발을 사주기 위하여 성매매를 하게 되는 일련의 과정은 지나치게 매끄겁다. 

이 장면들은 지나치게 매끄럽게 불행으로 빠져들며, 그들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토대로 복지시스템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이끌어낸다. 

시스템에 대한 섬세한 시선에 할애되어야 할 장면들이 익숙한 신파적 요소로 대체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결정적 장면에서 설마 했던 상황이 연출된다.

다니엘은 질병수당 거부 결정에 대한 항고를 준비하던 중, 잘 해결될 확률이 높다는 전문가의 조언을 뒤로한 채 화장실에 갔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이 장면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시스템의 병폐로 인한 비극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그에 대한 분노와 안타까움을 촉발시키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다니엘의 사망', 게다가 질병 수당을 받을 수 있었음에도 이를 수령하기 직전에 일어난 다니엘의 사망은, 살 수 있었던 선한 시민에 대한 사회적 살인을 보여준다. 

이 장면은 당연하게도 감독의 연출에 의한 것이다.

이는 이 사건이 감독의 선택에 의한 것임을 의미한다.

곧, 감독은 영화의 주제를 부각하기 위하여 주인공을 최대한 안타깝게 사망하도록 하는 결말을 선택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선택은 무척이나 실망스럽다. 

많은 평자들이 이 영화에 대하여 사회적 시스템의 모순에 맞선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영화라고 평하였다.

거짓말조차 못하여 직업 수당을 받기 위하여 이력서를 냈다고 곧이 곧대로 이야기하고 괴로워하는 착한 남자, 이웃에게 헌신적인 노년의 목수를 최대한 안타깝게 죽게 함으로써 이 영화는 최대한의 감정적 효과를 얻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선택은 다분히 영화적 설득을 위한 계산적인 선택이다.



그렇게 손쉽게 얻은 감정적 동요로 인하여 희생되는 것은 '다니엘 블레이크'라는 개별적 캐릭터의 목숨이다.

다니엘은 심장병으로 직업 활동이 불가능한 사람이다.

만일 항고 과정에서 이러한 사항이 적절하게 반영되었다면 그는 질병 수당을 탔을 것이다.

(이는 영화조차 인정하고 있는 사항이다.)

그러나 그가 마침내 질병 수당을 타게 되고 영화가 해피엔딩으로 마무리짓게 된다면, 시스템의 모순으로 인하여 다니엘이 겪은 불이익은 며칠 동안의 불편함에 그친다. 주제에 대한 영화적 설득력이 약해지는 것이다. 

또한 오히려 이 과정에서 좋은 이웃을 얻었다는 불편한 효과까지 생겨나게 된다.


이에 대한 감독의 해결은 캐릭터의 죽음이라는 거친 선택이다.   

이 과정에서 감독 스스로가 창조하고 애정 있게 그려낸 캐릭터 다니엘은 영화가 가장 강조한 '인간의 존엄성'을 폭력적으로 박탈당한다.

케이티의 성매매 등 많은 부분에서 위와 같은 문제들을 발견할 수 있으나, 그것이 가장 뚜렷하고 분명하게 드러난 부분은 다니엘의 사망 부분이다.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시스템의 미묘한 붕괴와 형식적인 관료제의 숨막히는 몰인간성. 그것을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과정에서 사랑스러운 캐릭터들이 수챗구멍으로 흘러들어가는 물처럼 매끄럽게 불행으로 흘러들어가고, 거기서 생겨나는 비애의 감정이 시스템에 대한 비판으로 환원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자세히 다루진 않았으나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연기자들의 호연과 감독의 연출이 수려한 작품이다. 앞서 언급한 익숙한 비극조차도 일상적이고도 세련되게 그리기 때문에 훌륭한 영화임을 부정할 수 없다. 나 역시 이 영화를 보며 느낀 감동을 기억하며 그 행운의 순간을 많은 이들에게 권하고 싶다. 


그러나 이 뜨거운 영화를 보며 눈물을 흘리기는 쉽지만 감독의 선택과 영화 자체에 동의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결국 영화가 주제 의식을 가장 면밀하고도 충실하게 드러내는 순간은, 그것을 스크린 상에서 온 몸으로 호소할 때가 아니라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몸 안 깊숙이 그것을 품었을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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