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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홍수정 Jan 07. 2019

코언이 <카우보이의 노래>에 담고 싶었던 삶의 모습

영화 비평

※ 씨네21에 기고한 글입니다.

※ 결말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죽음이 다가오는 순간의 풍경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하나의 장면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에피소드4 ‘황금빛 협곡’에서 한 사내가 노인을 총으로 쏜다. 쓰러진 노인을 보던 사내는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새 한 마리가 창공을 비행하고 있다. 왜일까. 사내는 잠시동안 홀린 듯 새를 응시한다. 이 장면을 지켜보던 나도 홀린듯이 그들을 바라본다. 총구를 겨누던 긴장은 어느새 사라지고 새를 향한 아득한 시선만이 이 장면을 가득 채운다. 곧이어 사내가 시선을 거두고 노인에게 다가가자 그는 갑자기 죽음을 맞는다. 지극히 코언다운 죽음이다. 다만 그 직전에 등장한 새의 형상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매혹적이다. <카우보이의 노래>에는 이런 순간들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누군가의 죽음의 직전에 찾아오는 미혹적인 순간들. 그것은 위기의 상황에 홀연히 등장하여 주인공의 넋을 낚아채고서 어디론가 멀리 달아나버린다. 그 장면들을 회상하며 <카우보이의 노래>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할까 한다.


코언 형제가 우리에게 건넨 이야기의 정체


에피소드1 ’버스터 스크럭스의 노래’에서 총잡이 버스터 스크럭스(팀 블레이크 넬슨)는 연예인의 기질을 타고났다. 그는 화려한 노래와 총질로 시종 관객의 이목을 끈다. 그런 그가 다른 이에게 시선을 빼앗기는 순간이 단 한번 등장한다. 자신을 ‘죽음의 전조’라고 소개한 총잡이가 등장하는 순간이다. 넋을 놓고 바라보던 버스터 스크럭스가 말한다. “듣기 좋은 소리를 내더군.” 곧 닥칠 불행을 예상치 못하고 아름다운 광경에 넋을 놓는 얼굴이 여기에서 처음 등장한다. 우리는 영화를 은밀히 지탱하는 이미지와 처음으로 마주친 셈이다. 에피소드2 ‘알고도네스 근방’에 등장하는 남자(제임스 프랭코)는 기가 막힌 타이밍마다 도움을 받아가며 죽음의 고비를 넘긴다. 그런 행운조차 죽음으로 이어진 길이었을까. 그는 결국 죽음을 피하지 못한다. 이상한 것은 그 직전에 등장한 묘한 이미지다. 군중 속에 홀로 선 새파란 원피스의 아가씨. 사내는 온통 사랑에 빠진 듯 아련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본다. 곧이어 그 시선을 단죄하듯 재빨리 사형이 집행된다. 사내와 버스터 스크럭스의 얼굴이 포개어진다. 우리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 무언가를 홀린 듯 바라보는 얼굴과 다시 한번 마주친 것이다. 에피소드3 ‘밥줄’은 여러모로 이질적인 에피소드다. 한톨의 웃음도 허락하지 않는 황량한 공기도 그러하지만, 가장 이질적인 것은 팔다리가 없는 남자(해리 멜링)의 존재다. 그는 청아한 목소리로 공연을 반복하지만 무대 밖에서는 말을 하지 않는다. 다른 이들이 섹스를 할 때조차 그는 뒤돌아 앉은 채로 크고 우울한 눈을 깜빡일 뿐이다. 이 장면들은 남자의 소외된 처지를 환기시키지만, 나는 좀 다른 측면을 언급해보고 싶다. 그는 관객의 자리에 앉지 못하고 언제나 이야기꾼의 자리로만 소환된다. 매니저(리암 니슨)는 섹스 전에 그를 돌려 앉히며 그가 관객이 될 수 없음을 주지시킨다. 마을 사람들 모두 닭을 구경할 때에도 그는 그 자리에 없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이야기가 생명을 다할 때까지 몇번이고 무대를 반복할 따름이다. 그에게는 미혹적인 광경에 넋을 놓는 순간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관객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기 때문이다. 이 에피소드는 오로지 이야기로만 소비되는 이야기꾼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관객의 자리를 상기하게 한다. 매혹적인 풍경과 마주치는 관객의 자리 말이다. 에피소드4 ‘황금빛 협곡’의 노인(톰 웨이츠)은 금맥과의 만남을 고대한다. 마침내 번쩍이는 황금맥과 만나는 순간, 그의 뒤에는 노인을 응시하는 사내가 있다. 그 위로는 그들을 내려다보는 새와, 모두를 품는 대자연의 풍광이 있다. 사내가 새를 다시 올려다보고, 노인은 자연의 조각(광물)에 비친 사내를 훔쳐본다. 여기에는 서로 물고 물리는 거대한 응시의 고리가 있다. 응시와 미혹은 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는다. 우리는 서로의 관객이며 서로에게 매력적인 풍경이다. 에피소드5 ‘겁먹은 처녀’에서 앨리스 롱거바우(조이 카잔)는 돌아온 강아지를 들고 활짝 웃고 있다. “저 생물체를 파악하는 중인가 봐요.” 시종 차분하던 그녀의 웃음은 반갑지만 어딘가 섬뜩한 측면이 있다. 그리고 상황 파악을 못하는 강아지를 보고 웃던 그녀는, 상황을 착오하는 바람에 죽고 만다. 쥐를 보고 짖는 개와 그런 개를 보고 웃는 여자. 미혹의 순간들은 러시아 인형(마트료시카)처럼 서로를 품으며 더욱 크게 확장된다. 그리고 마지막 에피소드 ‘죽을 자만 남으리라’에서 현상금 사냥꾼은 마치 사람들을 죽음으로 인도하는 사자처럼 느껴진다. 그가 말한다. “제가 주의를 끌면 클래런스가 후려친답니다.” 이 말은 앞서 죽음으로 연결되는 그 매혹적인 장면들에 대한 비유로도 들린다. 날이 저물어가고 이야기와 노래가 이어진다. 그들을 정신없이 보다 보면 어느새 화면이 어두워지고, 우리의 눈앞에서 호텔의 문이 굳게 닫힌다. 그제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여태 이 수상한 마차에 우리도 동승하고 있었음을. 지금 우리의 모습은 개를 보고 웃던 앨리스와 얼마나 다른가. 그리고 마지막 장이 넘어간 책이 눈에 들어온다. <카우보이의 노래>는 결국 우리를 마지막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코언 형제가 건넨 매혹적인 이야기인 것일까. 그들의 생각을 알 수는 없지만 이것만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카우보이의 노래를 듣는 것은 관객의 자리에 앉는 것이며, 죽음이 다가오는 순간에도 아름다움에 기꺼이 미혹되는 일임을 말이다.


코언 형제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간혹 한명의 감독을 생각할 때, 그를 대표하는 이미지가 함께 떠오르는 경우가 있다. 광활한 세계로 모험을 떠나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아이들, 미지의 크리처와 접촉하는 기예르모 델 토로의 주인공, 문제의 근원을 알지 못한 채 어디론가 허겁지겁 달려가는 봉준호의 인물이 그 사례다. 코언 형제의 경우에는 무의미한 노력을 들이부으며 허둥지둥 삶을 이어가는 인간의 군상을 자주 포착해왔다. 그들은 종국에는 자신의 운명을 피하지 못한다. 그러나 <카우보이의 노래>에 이르러 그들은 죽음 전의 미혹에 눈을 뜬다. 물론 이런 순간이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9)에서 모텔에 도착한 모스(조시 브롤린)는 수영복의 여자와 농담을 주고받는다. 전에 없던 산뜻하고 섹슈얼한 기운이 이 장면을 스친다. 다음 순간 그는 죽은 채로 발견된다. 죽음 전에 잠시 스친 매혹적이고 이질적인 순간, <카우보이의 노래>는 이 순간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영화라고 느껴진다. 그리고 이것을 서부극 안에 담아낸 것은 환상적인 선택이다. 단숨에 목숨을 빼앗는 총잡이의 총질과 그 미혹의 순간들은 본질적으로 닮았으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코언의 전작인 <인사이드 르윈>(2013)을 언급하고 싶다. 영화가 시작되면 “죽기 전에 세상 구경 잘했다”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온 신경을 집중하여 세상을 골똘히 구경하는 얼굴. 그것이 <카우보이의 노래>가 담고 싶었던 삶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죽음의 직전도 생생한 삶의 순간이니 말이다. 그것이 코언 형제가 새로이 주목하는 삶의 얼굴이라는 생각이 든다.



http://www.cine21.com/news/view/?idx=6&mag_id=91972



이 글을 쓰면서 고민을 했던 부분이 있습니다. 분명 영화에서 '죽음 전의 매혹'이 눈에 보였지만, 그것에서 어떤 의미를 찾기가 힘들었기 때문이죠. 어째서 저들은 자꾸만 현혹되고는 죽음을 맞는 것일까. 매혹과 죽음에는 어떤 상관성이 있을까. 거기에는 단순히 '아이러니'로 정리하기에는 수상쩍은 여백이 있는 듯 보였습니다. 결국 저 글은 그에 대한 답을 유예하고 제가 감각한 부분까지 쓰고서 탈고한 글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뜻밖의 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보던 자연 다큐멘터리에는 꽃게를 쫓는 문어와 꽃게에 정신이 팔린 문어를 낚아채는 물범의 모습이 나왔습니다. 생각해보면 코엔의 영화는 문명보다 야생에 더욱 어울리는 영화가 아닐까 합니다. 그의 영화적 세계는 많은 경우 문명의 토양에서 야생의 생리를 따르고 있죠. 목숨을 건 승부, 불현듯 찾아오는 죽음 등의 요소들이 특히 그렇습니다. 코엔의 아이러니가 생소한 동시에 익숙한 것은 그것이 (우리가 몸 속 어딘가에 지니고 있는) 자연의 원시성을 내재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글에서도 밝혔듯이 이런 순간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도 등장합니다. 극 중 모스는 시종 안톤 쉬거로부터 쫓기죠. 그런데 정작 죽기 직전 마지막에서, 그는 수영복의 아가씨와 농담을 나누고 있습니다. 이 순간은 그가 처음으로 죽음의 공포와 긴장에서 벗어나 그 순간만을 온전히 즐기는 것 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죠. 그리고 다음 순간 모스는 시체로 등장합니다. 이토록 잔인하며 충격적이며 경쾌한 전개가 코엔 형제의 인장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부분은 원작 소설과 다르게 각색된 부분이라고 합니다. 코엔 형제는 이런 전개(죽음의 공포, 잠시 찾아온 매혹적 순간, 죽음)를 반드시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코엔이 그 매혹의 순간을 조롱하는가?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그 순간을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것도 아니죠. 코엔은 그저 우리의 생사를 가르는 그 결정적 순간, 긴 인생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할 바로 그 순간이 지금 이곳에 존재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만일 코엔 형제가 이 순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한다면, 그 의미는 그들의 다음 영화에서 드러날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붙이자면, 에피소드4 ‘황금빛 협곡’의 노인(톰 웨이츠)이 유일하게 죽음을 피한 것에 대한 의문이 종종 제시되는 것 같습니다. 저의 글에 기대어 생각해 본다면 노인이 죽음을 피한 것도 미혹의 순간과 연결지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는 그가 고대하던 황금 속에서 적(젊은 사내)의 얼굴을 봅니다. 그러니까 노인은 미혹의 순간에 온전히 정신을 내맡기지 않고 현실을 직시한 유일한 사람이죠. 이 작은 차이가 그의 목숨을 살린 것일까요. 혹은 노인이 살았던 것은 단순한 우연이라고 보아야 할까요. 그에 대한 답을 찾기는 어려우며, 이 장면을 노인의 생존의 이유라고 단정지을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화의 다른 순간들과 비교하여, 그토록 고대하던 황금 속에서도 적의 얼굴을 포착하는 노인의 노련함이 유독 오래 기억에 남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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