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코스프레

by 영화평론가 홍수정

공부한 시간이 길다 보니 자연스레 '공부 코스프레'를 한 경력도 오래되었다. 프로라고 해야 하나. 공부 코스프레는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책상 앞에 앉아서 다른 걸 하기도 하고, 주변에 괜한 유세를 부리기도 하며, 평소에 엄두를 못 내던 물건을 지르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실질적인 공부는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인다.


공부코스의 이점은 안도감을 준다는 것이다. 누구에게? 내가 공부하길 바라는 주변인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하지만 제일 큰 이점은 아마도 현실도피 효과일 것이다. 진짜 행위는 하지 않으나, 마치 그런 것 같은 아우라를 마구 풍기며 현실로부터 멀리 달아날 수 있다. 이 기술을 오래 연마하면 스스로도 속이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이 글에서 말하는 것이 당장 열심히 공부하라는 것은 아니다. 지금부터 실질적인 공부를 할 수도 있고, 당장 그만두겠다는 결심도 가능하며, 차라리 맘 푹 놓고 쉴 수도 있다. 다만 공부의 외연만 유지한 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말리고픈 마음이 있다. 코스프레로 지금 당장의 현실을 피할수는 있지만, 결국에는 미루어두었던 시간의 대가를 받게 될 것이다. 그것도 한 방에 몰아.


공부 코스프레에 열중하는 이들을 볼 때 유독 안타까운 것은 내가 그 심리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어느 진로를 택해도 지옥 같은 수험생활을 평생에 한 번은 마주하게 되며, 그 과정에서 주변의 압박도 함께 다가온다. 그러니 자연스레 주변에 공부하는 느낌은 풍기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에 대한 유혹이 강해진다. 그러나 그 안락한 상태를 벗어나는 것도 용기이며, 용기에 대한 보상은 반드시 주어지게 될 것이다. 혹은 잠시 그 상태로 도피하더라도 그 시간이 너무 길지 않기를, 나중에 다가올 결과에도 의연할 수 있기를 빌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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