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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홍수정 Feb 03. 2019

<SKY캐슬>이 외면한 질문들

※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인기 드라마의 착한아이 콤플렉스

<SKY캐슬>의 마지막 회는 실망스러우면서도 일견 측은했다. 인기 프로들은 화제가 되는 순간 착한아이 콤플렉스에 잘 걸린다. 모범을 보여야 된다는 의무감, 희망을 선물해야 된다는 책임감. 정작 시청자들은 현실을 신랄하게 고발하던 그 재기발랄함을 사랑했는데도 말이다. 게다가 결말을 보여주는 방식도 지루했다. 그러나 <SKY캐슬>도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다. 수험지옥을 포착하는 예리한 시선은 흥미로웠다. 비범한 시작과 평범한 끝이다. 그러나 이제는 끝난 드라마, 아름답게 추억하며 보내주리라.

                                                

모두 부모의 욕심 때문이다?                                                                             

그런데 이 작품의 진짜 문제는 따로 있다. <SKY캐슬>은 사회의 병적인 단면을 잡아내서 그것을 기괴하게 그려내는 실력이 좋다. 그러니까 ‘현상’을 포착하는 눈썰미가 좋은 것이다. 그런데 그 ‘원인’을 찾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실력은 그다지 좋지가 않다.

 

우선 모든 원인을 '부모의 부덕'으로 돌린다. 3대째 의사가문이라는 타이틀에 매달리고, 자신의 콤플렉스를 아이에게 투영하는 부덕함. 이것도 일부 사실이기는 하다. 제 자식을 트로피로 삼는 부모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그것이 한국의 수험지옥을 만들어온 것도 사실이다. 대신 여기에는 악독한 부모의 너머에 있는 더 악독한 사회에 대한 시선이 없다.


만일 비극의 원인을 부모에게만 한정하기로 결심했다면 <SKY캐슬>은 파국을 폭로하고 비웃는 선에서 그쳤어야 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칭찬받을 수 있다. 모든 드라마가 교훈적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그랬다면 나는 쌍수를 들고 <SKY캐슬>을 칭찬했을 것이다.

그러나 <SKY캐슬>은 그 이상의 욕심을 낸다. 부모의 욕심을 비난하고, 그것만 버리면 세상이 바뀐다고 말한다. 부모만 바뀌면 애들이 행복해진다고 말이다. 과연 정말 그런가?



학벌주의 사회에 대한 침묵

기이하게 뒤틀린 한국의 수험문화를 언급하며 '학벌주의 사회'를 말하지 않을 수는 없다. 학벌주의와 수험지옥은 사실상 한 몸이다. 학벌주의의 토대에서 자라난 부모 세대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제 자식들을 수험지옥으로 밀어 넣었다. 학벌이란 것이 평생에 걸쳐서 영향을 미치며, 개인의 노력으로 극복하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뼛속 깊이 학습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대학만 잘 가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학벌주의가 뿌리라면 부모들의 광기는 줄기이며, 수험지옥에 허덕이는 아이들의 고통은 꽃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수험지옥의 원인으로 부모만을 내세우는 <SKY캐슬>의 시선은 지나치게 얕다. 원인파악이 어설픈 것이다. 여기 더해서 교훈적인 결말을 보여주려다 보니 문제가 심각해진다. 부모만 반성하면 모두 해결된다는 식으로 변질된다. <SKY캐슬>은 이런 논리를 끝까지 밀고 나간다. 그러다 보니 무리한, 혹은 의심스러운 설정들이 등장한다.


<SKY캐슬>이 말하지 않는 것들

일단 착한 사람들은 능력도 좋다. 황치영(최원영)은 엄청난 인격자인 동시에 대학병원 의사들과 겨룰 정도로 실력이 좋다. 우주(찬희)는 과외도 안 받았지만, 온갖 과외를 한 명문고 아이들을 이길 정도로 공부를 잘한다. 그들은 뚜렷한 과정을 알 수 없이 남들이 고생하며 이룬 성취를 가볍게 넘어버린다. <SKY캐슬>은 이런 식으로 착한 사람들이 현실에서 감당해야 하는 문제들을 외면한다. 교훈적 결말을 말하는 것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드라마는 아이들의 끝을 보여주지 않는다. 사교육을 버리기로 결심한 예서는 어떤 결과를 맞이하게 될까. 평생 동안 서울의대를 바라던 그녀는 지금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고3의 시기에 여행을 떠난 우주는 지금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불편한 질문들 앞에서 <SKY캐슬>은 침묵한다. 마치 "그들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다."고 말하는 동화책처럼.  


그러나 나는 불편한 질문들을 끄집어내어 좀 더 집요하게 물어보고 싶다. 착한 선택을 한 아이들이 학벌주의 사회에서 지속적인 차별을 받을 때 그들은 "옳은 선택을 했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할까, "그냥 더 좋은 대학에 갈걸" 하고 생각할까. 그 아이들이 다시 아이를 낳았을 때 "나처럼 살라"고 가르칠까, "어떻게든 좋은 대학에 가라"고 가르칠까. 만일 후자처럼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나쁜 것일까. 시스템에 저항하지 않은 부덕한 개인의 문제일 따름일까.    


여전히 남은 질문들

사회의 문제를 개인의 노력으로 극복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모두가 종교인과 같이 수양을 하며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사실 <SKY캐슬>도 이러한 점을 알았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해결책을 찾고 교훈을 전하려다 보니 결말로 갈수록 설득력을 잃었다. 그런 교과서적인 태도, 반듯한 결말은 도리어 이 드라마가 말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고심하게 만든다. 착하게 살며 성공하는 사람들. 환하게 웃으며 떠나는 아이들. 그 눈부신 결말은 현실에서도 가능한 것일까. <SKY캐슬>이 끝난 자리를 떠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외면한 질문들이 여전히 여기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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