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평론가 홍수정 Mar 30. 2019

인사

바르다의 부고에 부쳐

바르다에 대한 가장 인상 깊은 기억은 그녀의 작품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을 보았을 때의 것이다. 바르다가 걷고, 뛰고, 찍고, 바라보는 활동들을 막연히 지켜보다가, 그러니까 유희인지 노동인지 불분명한 그녀의 모습을 한참이나 지켜보다가 영화의 마지막에 다다랐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느닷없이 그런 장면이 나왔다. 만날 수 없는 친구에게 상처 받고 돌아서는 장면. 그녀는 비록 화를 냈지만 그 화가 상처임을 느낄 수 있었다. 제이알은 영화 내내 기어코 벗지 않았던 선글라스를 그녀에게만 벗어 보이며 바르다를 위로했다. 바르다는 고마움을 표하며 이제는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 했다.


나는 왜인지 알 수 없으나 바르다가 친구의 집 문 앞에서 홀로 돌아설 때 많이 울었다. 눈물을 주체 못 하고 얻어맞은 어린애처럼 엉엉 울었다. 몇 해 동안 영화를 보며 그렇게 운 것은 처음이었고 그 이후에도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여전히 신기한 일이다.   


나는 왜 그리도 울었을까. 알 수 없으나 짐작은 할 수 있다. 바르다의 영화를 보고 있으면 영화의 문법으로 편입되지 않는 순수한 활동을 경험하게 된다. 식상한 표현이지만, 서사로 환원되지 않는 순수한 활동들. 그래서 희비극을 배우기 전의 순수하고도 무지한 상태로 영화를 보게 된다. 그러다 문득 그 장면과 마주했을 때, 나는 관습적으로 만들어진 비극이 아닌 야생의 슬픔과 마주쳤다. 그것은 아무런 준 없이 마주친 세상의 슬픔이었다. 그리고 투명하게 감정을 드러내는 그녀의 얼굴. 나는 이때 영화를 체험한다는 의미를 처음으로 깨달았다.  


아쉬운 것은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에 대한 비평을 써보지 못한 것이다. 다소 늦게 영화를 보고 그 해의 베스트 1에 올리긴 하였으나, 바르다의 생전에 비평을 써보지 못한 것이 여전히 후회가 된다. 내게는 시간이 많아도 다른 누군가는 그렇지 않을 수 있음을 그때는 몰랐다.

그리고 이제 나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과의 이별이 이렇게나 아플 수 있음을 다시 깨닫는다. 솔직한 고백을 하자면 모든 사람과의 만남, 이별이 내게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바르다라는 여자와 동시대를 산다는 것은 내게 진정으로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그 짧은 시간의 인연을 두고 우리를 친구라 칭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마 그녀라면 허락했으리라 홀로 짐작하며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싶다. 이제는 닿지 않을 인사를. 안녕 친구. 안녕 바르다.

작가의 이전글 * 강연 안내 *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