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남의 죽음을 정의내리나

한 여자 연예인의 죽음이 대중을 심하게 동요시킨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눈에 틔는 젊은 여자를 한번이라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구경하지 않은 이가 있었을까. 아마도 그녀에게 관심이 있었던 대중이라면 누구라도 그 사건에 어느정도, 적어도 죄책감을 느낄 정도로 연루돼 있다고 느낄 것이다.


정작 이상한 것은 죽음 뒤에 대중이 보인 반응이다. 언론은 재빨리 죽음의 이유가 악플이라고 멋대로 정의내리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여기에 동조해 울분을 토해내며 '악플러'라는 존재를 향해 욕을 뱉었다. 악플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돼었으리란 점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타인의 죽음을 함부로 설명하는 것은 오만한 일이다. 어떤 죽음은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다. 죽음은 남은 이들의 안타까움을 아랑곳하지 않으며 그 깊은 심연을 우리는 끝내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최선을 다해 타인의 죽음을 함부로 정의내리는 이유는, 그것이 이해못할 죽음이 주는 죄책감과 공포로부터 도망치는 가장 빠른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알 수 없는 죽음 앞에서 몰려드는 두려움, 혼란함, 모종의 죄책감을 떨쳐내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악플러'라는 불확실한 타자를 설정하고, 그와 나를 분리해 선을 긋고(나는 좀 구경하긴 했어도 저 악마같은 악플러와는 달라), 선 밖의 악마를 향해 돌을 던지며, 자신은 안전한 도덕의 선 안에 있음을 확인하고 안도한다. 이 과정에서 누군가의 죽음은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사건으로 납작하게 단순화된다.


그들은 이 과정에서 자신의 프레임을 확인한다. 악플 때문에, 질투 때문에, 여성에 대한 편견 때문에 비극이 벌여졌다고 결론을 내리고 자신이 설정한 적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거봐, 내가 평소에도 너네들이 문제라고 했잖아. 심지어 누군가는 타인의 삶을 자신의 입맛에 맞춰 송두리째 편집하기도 했다. 불쌍한 여자애, 핍박받았던 페미니스트, 대중의 사랑이 고팠던 연예인...


그러나 누가 감히 남의 죽음을 정의내리나. 타인의 삶을 짧은 몇마디 말로 설명할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다. 셀 수 없는 사람들이 이 비극 가운데서 자신의 프레임을 확인하고 감정을 배설했다. 이것은 애도도 페미니즘도 아니며, 아무리 깊은 선의에서 출발했다 한들 그 행동은 잘못됐다.

무례하다는 말밖에 해줄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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