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평론가 홍수정 Jan 24. 2020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가 불쾌한 이유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이하 '할리우드')는 개봉 전은 물론 개봉 후에도 많은 주목을 받았는데, 그 주된 이유는 이 작품이 그의 필모 중에서 다소 이질적이라는 데 있다. 이 작품에 드리운 그늘은 그리 짙지 않지만 여태 타란티노가 보여준 경쾌하고 수다스러운 유혈사태들을 생각할  확실히 이질적인 구석이 있다. 그리고 이런 이질성은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장점 받아들여지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나는 이 작품을 생각할 때에 늘 왠지 모를 불쾌함과 모종의 모욕감을 느꼈다. 다소 늦어버린 감이 있지만 이제야 그 감정을 정리해 입 밖으로 낼 수 있을 것 같아 몇 자 적어보려 한다.


타란티노의 필모에서 이 작품이 지니는 독특함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나는 결정적으로 이 영화 하이라이트에 나오는 '복수극' 부분을 꼽고 싶다. 찰스(데이몬 헤리맨) 일행은 범행을 시도하다가 클리프(브래드 피트)로부터 복수를 당한다. 많은 이들이 이 장면이 타란티노의 복수극들과 비교할 때 다소 짧고 싱겁다는 평을 내린다. 그런데 여기에는 또 하나의 차이점이 있는데, 바로 역대 작품들과 달리 복수의 명분이 약하다는 것이다. <장고>와 <바스터즈>의 인종차별주의자들, 혹은 <킬 빌>의 악당들과 비교해도 찰스 일행의 악행은 수위가 약하다. 더욱 중요한 차이는 그들의 악행이 '아직 벌어지지 않았다'는 것에 있다. 영화에서 그들의 살인 계획은 불완전한 미수에 그친다.


그러니까 오직 영화의 내용만 보자면 <할리우드>는 시원한 복수극이 아니라, 과대망상 침입자들을 건장한 남자가 집단 도살하는 영화다. 이 일방적인 폭력을 (타란티노의 다른 작품들이 보여줬던) '통쾌한 복수극'으로 이해하는 방법은 단 한 가지, 영화가 기반한 실제사건을 경유하는 것이다.



<할리우드>는 할리우드의 유명한 비극, '로만 폴란스키 가 살인사건'을 바탕으로 다. 실제로 찰스 맨스와 그 일당들은 폴란스키 감독의 집에서 임신 8개월 상태인 그의 아내와 일행들을 잔혹하게 살해했다. 이 사건은 할리우드를 사랑하는 많은 이들에게 일종의 역사적 트라우마처럼 남겨졌다. 그러니까 우리가 <할리우드>를 통쾌한 복수극으로 보는것은 이 영화 안의 찰스 일행이 아닌, 실제 역사 속의 찰스 일행을 영화 안으로 끌어온 이후에야 가능한 일이다. 러니까 영화 속 일방적 복수의 잔혹함과 작품 전반에 서린 우울한 애도의 분위기는 이 영화의 실화를 끌어오지 않고서는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상호 모순된 것이다.


이런 의심에 방점을 찍는 것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호평한 마지막 신, 달튼 가족이 옆집에 가 폴란스키 가족과 안온하게 재회하는 장면에서 나는 위로가 아닌 거북함을 느꼈다. 부감으로 찍힌 이 장면에는 처참한 역사를 영화 안에서 되돌려 어루만지겠다는 영화의 욕망이 짙게 베어난다. 


현실과 접속하는 '영화의 개방성'은 흔히 긍정적인 의미로 통용된다. 그러나 그것이 긍정적인 것은 어디까지나 영화가 내부적인 완결성을 지녔을 때다. 자체적인 완결성을 지닌 채 현실과 접촉하는 영화의 개방성은 신비롭지만, 스스로 완성되지 못한 채 현실로 침범해 들어오려는 영화의 욕망은 징그럽다. 역사 속 실존인물의 비극을 끌어와 스스로의 숭고함을 드러내려는 욕망은 역사 앞에서 무례한 것이다.


게다가 <할리우드>는 스스로의 무례함을 이 영화 특유의 우수 어린 멜랑콜리함으로 위장하고 있다. 영화에는 1960년대 할리우드를 향한 노스텔지어와 샤론 테이트(마고 로비)를 향한 안타까운 애정이 짙게 묻어난다. 그러나 아무리 아름답게 애도한다 한들, 이 영화가 누군가의 죽음을 스스로의 레퍼런스로 삼았다는 사실을 감출 수 있을까.


나는 오늘 글을 쓰며 이 영화에 대한 나의 감상이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정리된 이유를 알게되었다. 그것은 '현실을 향한 개방성'과 '애정 어린 추모'가 지닌 긍정적인 아우라가 이 영화의 오류를 가렸기 때문이다. 그 예쁜 아우라를 걷어내고 불쾌함을 인정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역사적 현실을 기리려는 의도가 아무리 어여쁜들, 이 영화의 오만함을 선뜻 용납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영화가 현실을 레퍼런스로 끌어와 스스로의 구멍을 얼렁뚱땅 메우는 것은 관객에 대한 기만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영화는 언제나 현실과의 차이를 똑똑히 자각하며 그 간극을 투명히 고백하고 절실히 고뇌할 때에 자신만의 가치를 뿜어내는 법이다. 영화로서의 완결성을 망각하고 역사를 소환해 자기 안에 품으려는 <할리우드>의 위치는 어디인가. 그 점을 묻고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끝나지 않을 술래잡기, <겟 아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