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평론가 홍수정 Aug 09. 2020

진실을 보여줄게, <번 애프터 리딩>


넷플릭스를 보는 즐거움 중에 하나는 국내에서 스쳐지나가듯 개봉하고 끝나버린 명작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최근에 넷플에서 아끼고 아끼던 영화를 만나,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7), <인사이드 르윈>(2013), <카우보이의 노래>(2018) 등 무수한 명작을 냈던 코엔 형제의 숨겨진 명작 <번 애프터 리딩>(2008)이다. 이 영화는 코엔의 필모에서 굉장히 재기발랄하며 솔직한 축에 속해, 개인적으로 많이 좋아하는 작품이다. 바보같은 브래드피트, 비열한 조지클루니, 관료주의에 찌든 무책임한 시몬스(위플래쉬의 플랫처) 등 명배우들의 색다른 모습을 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포스터는 초.호.화.캐.스.팅.을 강조한게 웃겨서 가져와봤다)


※아래부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해임통보를 받은 칵스


영화의 시작은 마치 첩보물같이 느껴진다. 잘 차려입은 CIA 정보분석가 오즈본 칵스(존 말코비치)가 등장한다. 상사로부터 해임 통보를 받자 그는 격하게 항의한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나는 뛰어난 분석가야!

그때 옆 자리 동료의 말이 영화로 훅 들어온다. 당신 알코올 중독이잖아.

알코올 중독? 웃기지마. 그냥 솔직히 말해. 이건 누구의 지시지? 내가 누구에게 밉보인 거냐고!

정치적으로 희생됐다고 생각한 칵스는 직장을 그만둔다.


이 시퀀스는 <번 애프터 리딩>의 역량을 그대로 보여다. 칵스가 생각하는 자신의 세계는 크고 위대하지만, 사실 그는 하급 비밀 취급원에 불과하다. 정치 놀음, 무고한 희생... 무거운 단어들이 넘실대는 가운데 가벼운 진실(알코올 중독)이 스쳐지나간다. 하지만 칵스는 이 말을 무시한다. 오해의 시작.


쇼파에 누워있는 칵스


장면이 바뀌면 칵스의 아내 케이티(틸다 스윈튼)는 이혼을 계획중이다. 그녀는 이혼변호사와 상담하며 남편을 박살낼 계획을 구상중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거실 쇼파에 누워있는 칵스의 모습이 보인다. 눈을 뒤집고 누운 그의 모습은 마치 죽은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사실 그는 은퇴 후 쓸 회고록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이런 착각, 이런 오해의 순간이 이 영화에서는 대단히 중요하다. 엄청난 사건이 벌어질 것처럼 분위기를 유도하고(케이티가 칵스를 박살낼거야) 오해할 만한 장면을 보여주고(죽은듯이 누운 칵스) 별거없는 진실을 폭로한다(생각중인 칵스). 이런 방식의 연출은 영화가 반복해서 보여주는 이야기, 대단한 일이 벌어질 것 같지만, 사실은 별거 없다는 사실과 직결된다.


린다가 본 영화의 포스터, 그리고 실제 데이트


이런 규칙은 린다 리츠키(프란시스 맥도맨드)에게도 반복된다. 스클럽 직원인 린다의 소원은 데이트앱에서 멋진 남자를 만나는 것이다. 그러나 웹에서 겨우 고른 남자의 실물은 사진과 다르고, 린다는 억지로 웃으며 밥먹고 영화보고 지루한 섹스를 한다. 남녀가 웃고 있는 로맨틱한 영화포스터, 그리고 연이어 나오는 린다의 데이트는 그녀의 환상과 현실의 차이를 보여준다. 영화를 꿈꾸지만 현실은 영화와 다르다. 위대한 공상과 초라한 진실.


헬스클럽 직원 채드(브래드 피트)는 얼마나 둔감한지, 마사지를 하다 손님의 둔부를 삐게 하고서 인지조차 하지 못한다. 채드는 우연히 헬스클럽에서 칵스가 CIA에 대해 회상하며 기록한 '회고록'을 줍는다. 채드와 린다는 이 회고록을 토대로 칵스를 협박해 돈을 뜯어내기로 결심한다. 린다는 뜯어낸 돈으로 성형수술을 하고, 인생을 바꿀 꿈에 부풀었다.


칵스를 협박중인 채드와 린다


협박을 하기 위해 채드가 칵스와 통화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백미다. 채드는 마치 007의 악당처럼 알 듯 말 듯 요상한 선문답을 하며 칵스에게 돈을 요구하고, 흥분한 칵스는 소리를 지른다. 통화 내용만 보면 이들은 마치 정통 첩보물의 주인공들 같다. 하지만 이 장면을 맨눈으로 보는 우리는 이미 진실을 알고 있다. 알코올 중독 문제로 직장에서 쫓겨난 전직 하급 애널리스트, 자신이 주운 씨디가 가치없다는 사실도 모른 채 첩보물을 따라하는 아둔한 헬스클럽 직원. 주인공들은 자신들만의 심각한 세계에 몰두해 있지만, 이 장면을 보는 우리는 웃음과 민망함을 참기 힘들다.

옆에서 통화를 들은 칵스의 아내가 되묻는다. 근데 걔들은 그딴걸(칵스의 회고록) 왜 갖고있대? 다시 한 번 냉소적인 진실이 스쳐지나간다.


바람둥이 해리 파러(조지 클루니)는 린다에게 자신이 경호원 출신에다 재무부에서 일하는 엘리트인 것처럼 자랑한다. 하지만 린다의 상사는 그의 본질을 꿰뚫어본다. 그냥 (여자를 꼬시려고) 인터넷이나 뒤지는 놈 아니야?


결국 일은 꼬이고 꼬여 칵스, 채드, 린다, 그리고 해리 사이의 일은 커져만 간다. 이들이 오해를 풀지 못한 채 일이 엉망이 되어가는 과정이 이 영화를 추동한다.


오인. 오인은 <번 애프터 리딩>을 구성하는 핵심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 등장하는 오인은 다른 영화의 그것과 조금 다르다. 그것은 절대 풀릴 리 없이 아주 단단하게 꼬 영화의 기저에 또아리를 틀고 있다. 이 영화의 오인이 이렇게 강력한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오해가 아니라 각 인물들의 삶과 자존감을 떠받드는 동아줄이기 때문이다.

나는 정치적인 희생을 당할 정도로 우리 조직에서 중요한 인물이라는 착각(칵스), 엄청난 정보를 얻었고 이것으로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착각(린다), 영화같은 삶을 사는 내가 스파이와 마주쳤다는 착각(해리). 이들  어느 누구도 아주 단순한 진실, '나는 중요한 사람도 아니고, 내가 가진 정보 중에 남의 이목을 끌만큼 중요한 것 없다'는 간단한 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이 더 철두철미하고 진지하게 사건을 대할수록 그 모습은 더욱 우스워보일 따름이다.



이 영화의 핵심을 폭로하는 중요한 장면이 하나 있다. 해리는 린다를 데리고 자신의 집 지하실에 간다. 그는 그가 대단한 발명품을 개발한 것처럼 폼을 잡는다. 그리고 마침내 장막을 거둬 발명품을 보여줬을 때, 거기에는 의자 사이로 오르락 내리락 거리는 딜도가 있다. 누구나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터질만한 장면이지만, 린다와 해리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누구나 '바보아니야?'라고 생각 할 법한 장면이다. 하지만 코엔형제가 느끼는 세상은 그런 곳이며, 거기에는 관객인 우리도 여지없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위대한 착각을 품고 살아간다. 하지만 한 꺼풀의 포장을 벗겨보면, 실상 삶은 별다를 것 없으며 진실은 초라할 따름이다. 그리고 그것은 의자 사이에서 튀어오르는 딜도처럼 갑작스럽게 드러나 한다. 그 흉물스럽고 민망한 몰골에 눈을 질끈 감고 서둘러 길을 떠나지만, 코엔 형제는 그런 우리를 붙잡아 끈질기게 진실을 들이댄다. 거기에는 과장하고 집착할수록 오히려 우스워지는 삶의 단편, 단순하고 초라한 인생이 들어있다. <번 애프터 리딩>을 보다보면, 인물들이 아둥바둥 댈 때마다 가볍고 산뜻한 진실의 말이 스쳐지나감을 알 수 있다. 린다, 주변을 둘러봐. 사실은 별 거 없는게 아닐까?

그리고 나는 마지막에 등장한 어느 대사에 코엔형제의 진심이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사소한 것에 연연말라. 모든 것은 사소하다.

 

그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번 애프터 리딩>이 매력적인 이유는 여기에 젊은 시절의 코엔 형제가 생각한 삶의 진실이 선명하게 담겨있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영화들은 우리의 단순한 삶을 영화로 포장하지만, 코엔 형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영화같은 삶을 진실에 가까운 모습으로 되돌려 놓는다. 그들은 삶을 포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폭로하고 까발리기 위해 영화를 찍는다.

그리고 이렇게 날카롭던 젊은 시절의 코엔 형제는 이제 <카우보이의 노래>(2018)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생각하며 노래를 읊조릴 정도로 완숙하게 성장했다. 그들이 매순간 이토록 치열하게 삶과 죽음을 고민하며 그 답을 영화에 담았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들의 필모그래피는 감동적이다.


<번 애프터 리딩>에서 만난 코엔형제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영화같은 삶을 원하지? 극적인 사건을 기대하는구나. 하지만 사실 삶은 볼품없고 진실은 초라한 곳에 있단다. 그걸 거부할수록 우스워질 뿐이지.

코엔형제의 영화는 너무 못됐지만 절절이 진실이라 가슴에 생채기를 남기는 친구와 닮았다. 하지만 우리는 어째서 그 친구를 거부할 수 없는가. 그들이 내뱉는 따끔한 이야기를 다른곳에서 찾을 수 없기 때문이며, 숨기고 숨긴 진실을 쿡 찌를 때의 쾌감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의 제목인 '번 애프터 리딩(Burn after reading)'의 의미는 '읽고 태워라', 즉 스파이가 공작을 할 때 남길 법한 메세지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 말이 코엔의 진심이 아님을 이제 우리는 알고있다. 정말 마지막까지 못됐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