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평론가 홍수정 Jan 09. 2021

<스위트홈>에 대한 단상


1. 재난영화의 흥미로운 점은, 아무리 엉성한 것이라도 동시대의 불안을 재난 상황으로 체화해낸다는 점에 있다. 혹은 그 시대의 불안이 재난 영화에 자연스레 스민다고 표현해도 좋겠다. 2016년의 참사가 있은 뒤로 한동안 한국영화들, 특히 2018~2019년의 영화들은 재난 상황에 대한 컨트롤타워의 대응 실패를 자주 은유하고는 했다. 


그런데 최근 한국의 재난 콘텐츠들은 무능한 정부를 넘어 '무정부 상태'를 전제하고 들어간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공통점을 보인다. 지난해 개봉한 <#살아있다>부터 최근 공개된 <스위트홈>까지 이들은 마치 처음부터 기대도 없었다는 듯, 재난 상황을 통제하는 정부의 존재를 삭제하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시스템이 삭제된 곳에는 각개전투하는 치열한 개인들이 자리한다. 이들은 영웅적이라기보다 소시민적이고, 히키코모리에 가까운 모습이다. 특별히 뛰어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며, 재난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의지도 미약하다. 집에 남은 컵라면 개수를 파악하고 인터넷 채팅으로 바깥세상의 동향을 파악하는 등, 자신의 지근거리에 있는 물체들로 생존을 고민하며 어떻게 하루를 더 지탱할 수 있을지 궁리할 따름이다. 지금 한국 재난영화의 주인공들은 외부와의 물리적 접촉을 차단하고, 점점 더 안으로 안으로 수렴하고 있다. 시스템이 부재하며 각개전투가 당연해진 세계. 이 세계가 지금 한국의 청년들이 위기 상황에 대응하는 방식을 은유한다면, 이것은 노골적이라는 점에서 통쾌하고,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는 점에서 씁쓸하다. 


 2. 국뽕에 취해보지 않으려고 해도 세계적으로 K-Culture의 위상이 높아지는 점은 사실인 것 같다. 그런 점을 반영하듯 넷플릭스 오리지널이 한국의 컨텐츠를 양산해내고 있다는 점이 반갑게 느껴진다. 그런데 <킹덤>, <스위트홈>, <보건교사 안은영>까지 최근 주목받는 한국 콘텐츠들은 크리쳐를 다루고 있다는 공통점이 느껴진다. 이들은 다양한 크리쳐를 재현하고, 그것의 질감을 꼼꼼히 살리는 데 많은 공을 들이는 것 같다. 몸에서는 끈적한 점액이 뚝뚝 흐르고, 피부 표면의 수포가 터지고, 괴이한 소리를 지르며 돌아다니는 생생한 크리쳐들 말이다. 넷플릭스가 제작을 지원하는 콘텐츠는 상대적으로 풍부한 제작비, 안정적인 상영 기회 등 많은 장점을 지니고 있을 것이라 예상한다. 그런 풍성한 기회를 '특이한 크리쳐의 물리적 재현'에 몰두하는 것으로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런 의심과 염려가 든다.  



3. 개인적으로 <스위트홈>을 보며 가장 눈에 들어왔던 배우는 이은유 역을 연기했던 '고민시'다. 이은유는 자칫 사춘기를 겪는 평범한 반항아로 보일 수 있는 캐릭터다. 고민시는 이 역할을 자신만의 차고 건조한 태도로 매력적으로 소화해낸다. 그녀가 연기하는 이은유는 무뚝뚝하면서도 여리고 퉁명스러우면서도 비밀스럽다. 분명 어린 역할인데도 존재감이 어른 캐릭터에 뒤지지 않는다. 특히 시즌1 1화에서 편상욱(이진욱)과 대화하는 장면에서, 조용히 충격적인 대사를 전달할 때에는 아우라가 대단하다. 

고민시는 청초함과 당돌함이 동시에 담겨있는 흔치 않은 페이스를 가졌다. 굉장히 넓은 스펙트럼의 역을 소화하며 방송·영화계에서 종횡무진할 수 있는, 묵직한 잠재력을 지닌 배우라는 인상을 받았다. 스크린에서 자주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