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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홍수정 May 17. 2020

그들이 쌓아올린 불안한 세계, <인간수업>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인간수업>의 긴장은 어디서 올까

사실 화제성에 비해 <인간수업>은 서사도, 연출도 무난하다. 별다를 게 없다. 항간에는 이 드라마가 10대의 성범죄를 비판하는지, 옹호하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지루한 일이다. 이 드라마는 성범죄를 가벼이 다루는 것 외에 별다른 스탠스가 없어보인다. 물론 그 가벼움조차 비판받을 여지가 있지만 어디 하루이틀의 일인가. 지금의 콘텐츠 시장에서 깊이가 부족한 시선을 마주치는 일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인간수업>에는 분명 마지막까지 지속되는 모종의 긴장이 느껴진다. 뭘까. 이 긴장의 정체를 더듬을 때 2020년을 떠도는 폭력의 얼굴을 엿볼 수 있으리란 생각이 다.


언제 끝날지 모를 소꿉놀이

<인간수업>을 볼 때 느껴지는 우리의 불안은 '언제까지 이 위험한 소꿉놀이가 지속될지 모른다'는 데서 온다. 10대의 성매매, 10대 포주, 동업자, 정체모를 기도와 건달들. 위험천만한 설정들이 연이어 튀어오르는 가운데 <인간수업>은 이 정신나간 질주가 위험해도 짜릿하지 않냐고 묻는다.

그러나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경찰에 들통나지는 않을까. 정말 나쁜 어른에게 걸려 돌이킬 수 없는 길에 빠지지는 않을까. 그들을 지켜보는 우리는 이 비정상적 세계가 언제까지 유지될 리 없으며 엄청난 후폭풍이 몰려오리라는 예감을 떨칠 수가 없다. 그리고 이 유희적인 세계에 어느정도 동조하면서도, 기형적인 구조의 붕괴에 대한 불안을 느끼게 된다. 그건 우리가 살아온 세계에 비춰보았을 때 직감할 수 밖에 없는 상식적인 감각이다. 10대들이 쌓아올린 이 기형적인 세계가 언젠가 붕괴할 수 밖에 없으리란 상식.


그리고 이 불안은 정확히 지금 시대 기반해 만들어졌다. 온라인을 통한 사업, 음성변조 유지되는 익명성이 10대들 이룬 왕국의 토대가 된다. 그 토대의 지각변동이 이 드라마에 긴장을 부여하는데, 이것은 예전에는 상할 수 없는 연출이다.


내면화하고 승리하라

또하나 이 영화의 특이한 점은 2004년 나온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와 비교하면 두드러진다. <말죽거리>서 소년들의 분노는 정글을 떠올리게 하는 학교와, 그곳의 폭력을 방치하는 어른들에게로 쏟아진다. "대한민국 학교 다 X까라 그래"가 <말죽거리>의 분노의식을 관통하는 말이다.

반면 <인간수업>의 아이들은 그들이 놓인 폭력적 사회에 분노하지 않는다. 대신 이 구조의 상부로 날아오를 기회를 주지않은 부모를 한심해하며, 어른의 자리에서 세상의 폭력 갖고논. "내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미친놈을 만나 죽을지도 모른다"는 민희(정다빈)의 끔찍한 협박은, 세상의 폭력을 깊이 내면화 해 오히려 공격의 칼날로 어른에게 돌려주는 이곳 아이들의 사고방식을 보여준다.


<말죽거리>는 70년대를 영화의 배경으로 설정했지만, 2004년에 개봉된 이 영화는 당대의 공기로 소비됐다. 그리고 이 점은 <인간수업>을 바라보는 2020년의 우리도 마찬가지다. 두 영화 사이에 놓인 약 20년의 시간을 두고, 우리는 폭력을 대하는 아이들의 차이를 본다. 칼날에 려 고함치던 아이들은 20년이 지나 그 칼날로 해맑게 저글링을 한다. 이 신기하고도 아연할 광경앞에 우리는 무슨말을 할 수 있을까. <인간수업>이 던지는 기분나쁜 쾌감.


붕괴한 왕국의 공터에는

<인간수업> 시즌1이 끝나며 잔혹한 놀이도 끝이 난다. 동화처럼 유지되던 아이들의 세계도 어른들의 침범에 붕괴하고 만다. 폐허가 된 자리에는 무엇이 남을까. 아이들은 성장해 어른의 세계에 녹아들까, 아니면 다시 그들의 기괴한 성을 쌓을까. 그 점이 시즌2에서 보여지리라 짐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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