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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홍수정 Jul 04. 2021

한국형 오컬트, <제8일의 밤>이 성취한 것

#재미가있다 #추천 #많이무섭진않아

※ 스포일러가 있어요


사실 크게 기대하지 않았지만, 놀랍게도 <제8일의 밤>은 생각보다 흥미로운 지점이 많은 영화다. 그리고 자신만의 영역을 일구는 데 성공한 영화이기도 하다. 이 영화만의 매력을 지지하고 싶은 마음에 노트북을 열었다.  


영화의 시작은 평범하다. 진실에 대한 무책임한 갈망과 인정 욕구에 시달리는 인류학자. 그가 깨운 고대의 전설. 요괴를 막으려는 승려. <제8일의 밤>의 시작은 오컬트 장르물의 클리셰를 따른다.


아, 질기고 질긴 인연사

그러나 영화가 진행되며 <제8일의 밤>은 '인간사에 맺힌 인연'들을 찬찬히 살핀다. 그것은 좋은 인연도, 그렇다고 나쁜 인연도 아니다. 서로를 도우면서 해치고 살리면서 죽이는 복잡하고 질긴 인연사.  

<제8일의 밤> 스틸컷

묵언수언을 하던 청석(남다름)진수(이성민)가 신발을 사주는 것을 계기로 입을 연다. 이것은 신생아가 처음 입을 떼고 울음을 우는 것을 연상하게 한다. 

청석은 자꾸만 입을 잔뜩 벌린 채로 (태아와 같은 자세로) 곤하게 잠에 빠져들고, 진수가 고기를 치워주어야 밥을 먹는다. 아버지의 보살핌을 받는 아기가 연상된다. 그러니까 청석과 진수는 유사 부자의 관계를 맺고 있다. 

청석은 진수의 모습이 익숙하다 말한다. 어릴 때 만난 경험이 그의 기억 속에 흔적을 남겼기 때문일 것이다. 


호태(박해준)와 동진(김동영)의 사이도 마찬가지다. 호태는 사고를 당한 동진을 살려주었지만, 이 일을 계기로 동진은 눈과 다리가 불편해진다. 그들의 인연이 동진의 몸에 인장 같은 흔적으로 남은 것이다. 하지만 요괴가 씐 동진은 더 이상 몸이 불편하지 않게 되었고, 멀쩡해진 몸으로 사람들을 해친다. 

선의와 불행으로 덕지덕지 꿰매어진 인연.


청석은 애란(김유정)을 돕기 위해 그와 함께 달아난다. 이때 청석은 애란에게 신발을 선물하는데, 이 영화에서 '신발'이 자유를 선물하기 위한 매개물로 등장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 청석은 애란의 발에 묶인 사슬을 끊어내며, 그녀를 구원한다. 


결국 영화가 8일 동안 요괴를 추적하며 탐색하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 얽힌 인연들이다. 그것은 진수의 등에 업혀 있던 원혼들처럼, 평소에는 눈에 보이지 않으나 홀로 앉아있는 조용한 밤에 사람의 귓가에 속삭댄다. 

영화의 마지막에 '8'자는 가로로 뉘어져서 무한대의 모양으로 바뀐다.

무한히 이어지는 인연과 그것으로 고심하는 무한한 밤들. 

서로 얽어지고 다시 풀어지는 복잡한 인연. 

<제8일의 밤>의 그것을 그리고 있다.


<제8일의 밤> 스틸컷

서사와 장르의 성공적인 결합

영화에 등장한 요괴의 형상과, 미스터리를 추적하는 과정이 새롭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제8일의 밤>은 그것을 보여주기 위한 영화가 아니다. 갑자기 웃는 소녀의 괴기스러운 표정은 이 영화를 켜게 만드는 미끼이지, 핵심적인 부분이라 할 수 없다.


이 영화가 정말 보여주려 했던 것은 불교, 무속, 퇴마가 얽어진 동양의 오컬트가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그리고 '질긴 인연'에 관한 서사는 이 영화의 오컬트적 요소와 매우 잘 어우러진다.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인연은 우리가 예측할 수 없어서 불가사의하다. 불가사의한 것, 무지의 영역에 있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무력감과 경외심, 공포를 갖게 한다. 그런 정서는 알 수 없는 것들이 출몰하는 호러 장르와 높은 친연성을 가진다. 

한 마디로 <제8일의 밤>은 서사와 장르를 잘 버무려서 자신만의 독특한 정서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다.


적막한 호러물

그 독특한 정서를 만드는데 한몫을 하는 것이 이 영화만의 템포이다.

 <제8일의 밤>에는 종종 '적막하다'는 느낌을 주는 장면이 등장한다. 요괴에 씐 청석이 진수를 도끼로 내려칠 때, 돌연 조용해지며 등장하는 상상씬이 그 예다. 그 적막함은 합장을 하고 앉아 조용히 수련하는 고승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러니까 한 승려가 끊임없이 과거를 반추하고, 자신의 운명을 회의하면서도, 또 다음 날이면 조용히 악을 처단하러 길을 나선다는 설정과 이 영화만의 연출법은 매우 잘 어우러진다. (보다 자극적인 액션을 넣을 수 있는 순간에 이 영화가 보여준 자제력을 높이 사고 싶다.


<제8일의 밤> 스틸컷

또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배우들의 열연이다. 

형사로 연기 변신을 보여준 박해준(호태 역), 서글픈 운명을 타고난 소녀를 찰떡같이 소화하는 김유정(애란 역), 동자승을 연상케 하는 해사한 모습의 남다름(청석 역), 요괴에 씐 형사로서 존재감을 보여주는 김동영(동진 역), 고목같이 원숙한 노승을 연기해내는 이얼(하정 스님 역)까지 모든 배우들의 연기가 인상에 남는다.

 

하지만 역시 피 묻은 염주를 손에 두르고 도끼를 든 채, 굳은 얼굴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이성민(진수 역)의 단단한 연기는 쉽게 잊기 힘들다. <남산의 부장들>(2019)에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이성민은 자신의 얼굴을 파괴력 있는 피사체로 보이게 만드는 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미 연기력을 인정받았지만 더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할 배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 이제 글을 마칠 시간이다.

그러니까 '허술한 부분에도 불구하고 <제8일의 밤>이 자신만의 영역을 일궈낸 작품인가'를 묻는다면 나는 '그렇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영화에 대한 한 줄 평을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마치려 한다.


적막함이 매력적인 한국적 오컬트물. 

요괴에 얽힌 미스테리를 통해, 속세에 얽힌 인연을 그려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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