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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홍수정 Jul 10. 2017

봉준호 세계의 변화와 <옥자>에 대한 어떤 오해.

영화 <옥자> 비평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전체적인 내용은 마지막 7. 단락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1. 봉준호 영화의 움직임과 '응시'

봉준호 세계의 특징 중 하나는 긴박하게 이어지는 추격과 질주다. 그런데 나는 이 질주의 특이한 움직임 하나가 늘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목표를 향하여 달리다가 어느 순간, 느닷없이 멈춰서는 움직임이다.

예를 들어보자. <괴물>에서 가족들이 현서를 찾다가 문득 매점에 모여 밥을 먹던 장면. 이 장면에서 괴물을 추격하던 가족들은 배가 고파졌는지 어두운 매점에 모여 현서와 함께 라면, 김밥 등을 먹는다. 이때 현서는 이미 괴물에게 잡혀간 상태이므로, 현서의 등장은 아마도 상상일 것이며, 그래서 판타지의 느낌도 풍긴다. 또 <살인의 추억>에서 형사 박두만(송강호)은 살인자를 추격하는 틈틈이 집에 돌아와 부인과 실없는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마더>의 엄마는 범인을 추격하던 중 집에 들렀다가 아들의 친구 진태와 마주친다. 이 장면들은 모두 이야기의 진행과는 무관한 장면들이다. 그런데도 질주의 스릴을 중시하는 봉준호가 달음박질 중인 주인공들을 갑자기 멈춰 세우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와 비슷한 움직임은 봉준호 특유의 클로즈업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자주 인물의 얼굴에 카메라를 바짝 당긴 클로즈업 신을 찍곤 한다. 예컨대 오열하는 주인공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후 잠시 그대로 정지시켜, 일그러진 주인공의 얼굴을 관찰하는 식이다. 어찌 보면 짓궂다고 밖에 표현할 길 없는 연출 방식. 그 순간 우린 주인공에게의 이입에서 빠져나와 낯선 시선으로 그를 관찰하게 된다.


그런데, 의문점은 이것이다. 봉준호의 영화들은 왜 자꾸 달리다가 돌연 멈춰서는 것일까. 추격 중에 느닷없이 집으로 돌아오는 주인공, 감정이 폭발하는 중에 갑자기 인물의 얼굴을 집요하게 관찰하는 카메라. 그것은 질주 가운데 끼어드는 서늘한 정적이다. 이 특이한 움직임의 정체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이것이 분명 '응시'와 관련이 있다는 얘기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봉준호는 자주 자신의 영화를 '버스'에 비유한다. 그것은 잘못된 곳에 도달하리란 것을 알면서도 달리는 속도의 짜릿함과 엉뚱한 곳에 도달해버리는 쾌감에 못 이겨 자꾸만 다시 오르게 되는 버스다. 관객을 태우고 신나게 달리던 중 느닷없이 속도를 멈추는 순간, 정지한 곳의 풍경은 관객의 뇌리에 각인된다. 그러므로 질주 가운데 정지하는 운동은 우리가 영화를, 영화가 자기 스스로를 응시하는 순간을 위하여 복무한다.


2. 옥자에 드러난 변화

그런데 <옥자>는 이상하다. 이 영화에는 봉준호 특유의 달리다 멈춰서는 움직임이 잘 포착되지 않는다. 대신 <옥자>를 은밀하게 지배하는 것은 제자리에 머무르려는 욕망이다. 처음 영화가 시작될 때 산골 안에서 뛰노는 옥자와 미자. 이 장면은 봉준호 영화 사상 거의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평온하다. 또한 그것이 서사적으로 차지하는 비중에 비하여 약간 길다는 느낌을 준다. 영화는 이 산골의 평화로운 순간에서 서성이며 나아가길 주저한다. 또한 미란다 컴퍼니의 조니 박사가 옥자와 실험실에 남겨졌을 때, 옥자를 학대할 듯 시간을 끌며 혼잣말을 하던 장면. 이 장면의 긴장감은 좀 이상하다. <살인의 추억>과 비교해 보자. 봉준호는 연쇄살인범을 기다리는 매 장면마다 울렁거리는 긴장감을 심어놓았다. 반면 이 실험실의 장면은 어딘가 긴장감이 부족하며 늘어지는 느낌을 준다. 이렇게 얘기하고 싶다. 이 장면에서 영화는 옥자에 대한 학대가 이루어지기 전의 순간에 버티고 서서 나아가길 주저한다고. 이런 머뭇거림은 비록 방향을 잃을지언정 늘 쾌속의 질주를 보여주던 봉준호의 세계에서 매우 이례적인 움직임이다. 


<옥자>에서는 클로즈업의 성격도 변했다. 일그러진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던 그의 클로즈업은 이 영화에 이르러, 적당한 거리에서 평온히 지켜보는 시선으로 변한다. <옥자>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클로즈업은 옥자와 귓속말을 주고받으며 교감하는 미자의 얼굴이다. 미자의 편안한 표정, 지나치게 다가가지 않는 카메라, 그들의 귓가를 스치는 바람. 예전 봉준호의 클로즈업은 감정의 상승 상태를 따라간 다음 그것의 폭발을 뜯어보았던 반면, <옥자>에서의 클로즈업은 평온하며 정적인 한 때를 스치고 지나간다.


3. <옥자>에 나타난 응시의 금기

이와 관련해서 언급하여야 할 중요한 장면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옥자>에 나타난 '금기'에 관한 것이다. ALF의 리더 제이는 미자에게, 옥자를 구출하는 순간 뒤에 상영되는 영상을 보지 말라고 한다. 여러 신화와 전설에서 반복되는 그 금언. 뒤를 돌아보지 마. <옥자>에 이르러 이 금언은 '응시'에 대한 것으로 등장한다. 즉, 보지 말라는 것이다. 바로 이 금언이 여태 봉준호 영화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했던 '응시'와, <옥자>에 이르러 나타난 머뭇거림을 동시에 설명할 수 있다. 주저하는 시선과 제자리에 머무르려는 욕망.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옥자>에 이르러 봉준호의 응시는 금기에 부딪쳤다고.


영화에 등장하는 ALF의 리더 제이(폴 다노)는 감독으로서의 봉준호와 겹쳐 보인다. 그는 동물의 실상을 영상으로 폭로하길 원한다. 그러므로 제이가 옥자의 귀에 넣은 것은 봉준호의 카메라다. 제이는 폭로의 과정에 뒤따르는 폭력성에 대하여 늘 고민한다. 그는 마지막까지 미자에게 말한다. 이것까지 보여줘야 하는지 고민했어. 그러므로 관객인 우리는 제이 앞의 미자와 같다. 봉준호는 <옥자>에 이르러 내가 폭로하는 그것을 과연 어디까지 지켜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 부딪친 것 같다. 그 고민의 잔여물은 영화 곳곳에 떨어져 있으며, 봉준호 자신의 모습은 '제이'에게 많이 투영되어 있다. 어쩌면 폭력에 대항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폭력성을 숨기지 못하는 제이의 모습은, 운동가가 아니라 봉준호 스스로에 대한 조소일지도 모른다.


결국 <옥자>는 봉준호가 여태 지녀온 응시와 그에 대한 금기 사이에 자리한다. 영화는 두 세계 사이에서 홀로 시름하며 묵묵히 나름의 선택을 한다. 그 선택은 위에서 언급한 움직임으로 드러난다. 때로 나아가며, 때로 응시하며, 자주 고개를 떨구고 정지하는 움직임으로. 그리고 마지막 산골의 평온함은 감히 침범할 수 없는 평화로운 세계를 형성한다. 이러한 평온한 정조가 <옥자>를 열고 닫는 것이다.


4. 평화로운 환상으로의 도피

그런데 이 평온함은 어떤 결단이나 깨달음보다는 도피에 가깝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설국열차>에 대하여 허문영 평론가가 이 영화의 결말이 남궁민수(송강호) 부녀가 보는 환상일 수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설국열차>의 마지막 장면은 어딘가 판타지에 가까운 구석이 있다. 열차의 폭발과 두 아이의 생존, 하얀 설원과 북극곰의 등장은 차라리 환상에 가까운 이미지다. 그런데 <옥자>에 이르러 이 비현실적인 느낌은 더욱 심해진다. 일단 영화가 시작하는 산골의 풍경은 단순한 시골이라기보다 무릉도원에 가까운 모습이며, 커다란 돼지라는 소재 역시 동화적이다. 가장 이상한 것은 미자의 추격이다. 어린 소녀가 홀로 서울의 미란다 컴퍼니를 찾아간 것은 그렇다 치자. 신기하게도 미자가 달려간 곳엔 늘 어김없이 옥자가 있고, 그녀는 옥자가 도축되기 직전에 귀신같이 그곳에 도착한다. 봉준호의 전작들을 보자. <괴물>에서는 GPS의 도움이, <마더>에서는 관련자들의 증언이, 하다못해 <살인의 추억>에서는 라디오 사연자를 찾는 과정이라도 있었다. 그러니 미자의 추격은 <옥자> 자체의 동화적인 분위기와 맞물려 더욱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으로 보인다.


미자가 돼지 도살장에 도착할 즈음부터 영화는 판타지의 성격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슈퍼 돼지들이 가득한 도살장, 돼지들의 집단적인 울음소리. 이것은 차라리 악몽에 가깝다. 이곳에 도착하기 직전 미자가 잠에서 깨며 눈을 깜빡이는 것이 화면에 연출된다. 그런데 나는 이때 어슴프레 눈을 뜨는 것이 미자가 아닌 영화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판타지의 느낌이 가득한 이 도살장에서 영화는 현실을 보여줄 용기가 없어 환상 속으로 도피한다. 그 도피는 봉준호가 여태 지녀온 현실 감각과 배치되므로 당혹스럽다. 그런데 이 화가 현실성을 버리면서까지 구하고 싶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옥자'이다. 그렇다. 결국 이 영화가 많은 순간 봉준호의 규칙을 무너뜨려가며 구출하고 싶었던 것은 하나의 생명이다. 그러므로 <옥자>에 이르러 봉준호의 영화가 지니는 태도는 눈물을 머금고 도살장을 떠나는 미자의 태도와 같다. 사랑하는 옥자를 구하기 위해, 눈 앞의 현실이 지옥 같지만, 보지 말고 고개를 숙인채 잠자코 이곳을 떠나자.


5. <옥자>의 마지막 장면, 그리고 <괴물>의 어떤 장면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옥자와 집에 돌아온 미자는 할아버지와 밥을 먹는다. 이 자리에는 도살장에서 구출한 새끼 돼지도 함께 있다. 그런데 이 장면에는 무섭도록 불길한 느낌이 있다. 앞서 <괴물>의 식사 장면을 언급한 바 있다. 현서와 가족들이 매점에서 함께 다정하게 식사를 하던 그 장면. 그런데 이 장면에서 현서의 등장은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다음 장면에서 현서는 떨어지는 빗물을 받아먹으며,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도살장에 도착해서 껌뻑이며 눈을 뜨는 영화. 악몽과 같은 돼지 도살장. 비현실적으로 시기적절하게 옥자를 구출하는 미자. 그리고 괴물의 한 장면과 닮은 이 영화의 마무리.


이렇게 해석하면 어떨까? 영화는 행사장에서 옥자 구출에 실패한 순간, 이어지는 비극을 받아들이지 못하여 계속 꿈을 꾸고 있다고. 환상 속으로 도피한 영화가 꿈속에서 옥자와 집에 돌아온 다음, 그 상태에서 끝을 맞이한 것이라고. 무리한 해석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만큼은 다시 한 번 언급하고 싶다. 이 영화의 마지막은 <괴물>의 식사 장면에 멈추어 있다.


6. <옥자>의 도피의 한시성

게다가 이 도피는 매우 한시적으로 보인다. 이 영화를 간단히 말하자면 미자와 옥자의 러브스토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영화를 자세히 보면, 옥자에 대한 미자의 사랑은 '소녀성'을 전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할아버지는 미자를 향해 "이제 옥자하고만 놀지 말고 남자 친구를 사귀라"고 한다. 그리고 미자는 자신의 결혼 자금이라는 황금 돼지를 집어던진다. 이때 미자가 던진 것은 성인 여성으로서의 가능성의 일부분이다. 이런 미자가 소녀의 시기를 벗어나 성숙한 여인이 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옥자는 이 집에서 평온한 생활을 계속할 수 있을까? 미자의 여자로서의 욕망은 어떤 방식으로 꿈틀대게 될까.

봉준호는 이 영화가 그의 첫 번째 러브스토리라고 언급했다. 그렇다면 영화는 사랑의 도피적이고 한시적인 속성까지 품은 것일까. 그들의 사랑이 끝나는 순간 찾아오는 것은 무엇일까. <옥자>의 도피는 훗날 무엇을 불러올지 알 수 없기에 불안하다.


7. 가장 슬프고도 불안한 작품, <옥자>

<옥자>에 드러난 봉준호의 변화는 넷플릭스에서 세계인을 상대로 영상을 공급하고자 하는 봉준호의 상업적인 선택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점에서 <옥자>는 심각한 오해를 받고 있다.


봉준호가 여태 지녀온 날카로운 응시는 <옥자>에 이르러 금기에 부딪친다. 그것은 "이렇게 계속 뚫어지게 쳐다봐도 괜찮은가"에 대한 고민이다. 레드(릴리 콜린스)는 옥자가 학대당하는 영상을 끄라고 소리치고, 제이(폴 다노)는 미자더러 뒤를 돌아보지 말라 한다. <옥자>는 끊임없이 "더 이상 보지 말라"는 비명을 내지른다. 그리하여 산골에 머무르려 하고, 학대 앞에서 주저하는 <옥자> 특유의 머뭇거림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은 정신없이 내달리던 봉준호의 영화 세계가 맞은 꽤 중요한 변화다. 인물의 감정을 샅샅이 훑어보던 봉준호의 카메라는 이제 미자와 옥자 사이에 끼지 못한다(우리는 끝내 그들이 나눈 귓속말이 무엇인지 듣지 못했다). 봉준호의 응시는 이 영화에 이르러 고개를 숙이며 주저한다.

그리고 끝내 현실을 지켜볼 자신이 없었던 영화는 환상속으로 도피한다. 유달리 동화적인 <옥자>의 분위기. 악몽 같은 도살장과 판타지에 가까운 구출. 이것은 늘 징그럽도록 현실적인 세계와 비극적 결말을 보여주던 봉준호에게 있어 이례적인 선택이다. 그 선택은 오로지 옥자라는 한 마리의 돼지를 살리기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슬프게도 미자 가족의 마지막 식사 장면은 <괴물>에서의 식사 장면(식구들이 환상 속에서 현서와 함께 식사를 하는 장면)과 너무도 닮았고, 우리는 <괴물>의 비극적인 마지막을 알고 있다. <옥자>는 정확히 <괴물>에서의 식사 장면에 아직 멈춰 있다.

이 슬프고도 필사적인 도피. 현실에 대한 외면. 이것들은 모두 미자의 "소녀성"을 전제하지만, 그녀는 곧 자라날 것이다. 미자가 성숙하는 순간, 영화가 필사적인 사랑의 도피를 관두는 그 순간. 이 평화로운 오두막엔 어떤 변화가 불어닥치게 될까.

나는 어쩐지 아직도 영화가 끝나지 않은 것 같은 착각이 자꾸만 든다. <옥자>는 그 다음 이야기가 더욱 궁금해지는 영화다.


<옥자>는 단순히 평화롭고 즐거운 해피엔딩의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는 철저히 전작들과의 연장선 위에서 평가받아야 한다. 여기에는 전에 없던 고민과 머뭇거림이 들어있고, 한 생명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의 흔적들이 묻어있다. 그러나 미자는 곧 어른이 될 것이고, 이 영화가 사수하는 평화도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다. 즐겁고 안온한 작품이란 평을 받지만, 내게 있어 <옥자>는 봉준호의 필모에서 가장 슬프고도 불안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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