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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홍수정 Jun 24. 2017

<옥자> 개봉에 앞선 봉준호 복습하기  

※ 봉준호의 작품들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플란다스의 개>(2000), <살인의 추억>(2003), <괴물>(2006), <마더>(2009), <설국열차>(2013)에 이은 봉준호의 새로운 장편 <옥자>(2017)가 개봉을 앞두고 있다.

이 타이밍에 짚고 가는 봉준 복습하기.



봉준호의 집

봉준호의 세계에선 생각보다 공간이 중요하다. 많은 경우 영화는 하나의 집에서 시작한다. 그의 영화에서 특히 자주 등장했던 비슷한 공간, <플란다스의 개>의 문구점과 <괴물>의 매점은 모두 겨우 몸을 뉘일 좁은 공간에 잡동사니가 가득 차 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살인의 추억>에서 송강호(편의상 배우의 이름으로 표시함) 집, <마더>에서 김혜자의 집과 <설국열차>의 꼬리칸.

원작이 따로 있었던 <설국열차>를 제외하고 의 영화들은 모두 집에서 시작해 집으로 되돌아간다. <괴물>을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작은 매점에서 시작하여 다시 조용한 매점에서 끝을 맺는 이야기.


상실과 함께 시작되는 추격

그렇다면 그들이 집을 나서는 이유는 무엇일까. 봉준호의 인물들을 세상으로 인도하는 것은 대개 어떤 사건인데, 보통은 '상실'에 대한 것이다. 누군가가 사라진다. 개가 없어지거나(플란다스의 개), 딸이 사라지거나(괴물), 마을 사람들이 죽거나(살인의 추억), 아들이 누명을 쓰고 잡혀가고(마더), 꼬마 아이가 사라진다(설국열차). 자, 이제 그들은 무언가를 찾기 위해 필사적인 추격을 시작한다. 



같은 곳을 맴도는 질주

이 추격의 과정은 관객을 영화 안으로 이끌어 함께 달리게 만든다. 봉준호는 정신없는 질주로 관객의 혼을 빼놓는 기술이 있다. 이 과정의 쾌감은 여러 평자들이 꼽는 봉준호 영화의 매력이다.

그러나 대개 추격은 실패로 끝이 난다. 그들은 결국 쫓던 것을 찾지 못하거나(살인의 추억, 괴물), 찾더라도 별 의미가 없고(플란다스의 개), 혹은 그들이 원하던 상태가 아님을 깨닫는다(마더, 설국열차). 결국 상실은 치유되지 못한 채 끝이 난다. 그러므로 그들의 질주는 그저 질주로서 남는 것이다.

만일 봉준호의 영화를 다시 볼 일이 생긴다면 이 질주의 과정을 눈여겨 보길 바란다. 그들은 달리는 중간중간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도 하고, 같은 공간을 반복해서 달린다. 그들의 추격은 결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며 같은 공간을 맴돌고, 머뭇거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봉준호 영화의 진짜 특징은 단순한 질주가 아 방향 감각을 잃어버린 질주에 있다.

 

영화 <살인의 추억>의 스틸컷

질주 뒤에 다가오는 풍경

그렇다면 그들은 매번 실패하면서 왜 달리는 것일까? 첫 장면에서 본 집의 단란한 풍경은 상실감만 더한 채 다시 반복되며 끝이 난다. 처음 인물들이 정신없이 달릴 때 우리는 일단 그들을 따라간다. 그러다 그들이 결국 길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결국 무엇을 위하여 달려왔나 반문하는 그 순간. 바로 그 찰나에 그들이 달리던 곳의 풍경을 보게 된다. 필사적으로 질주해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느꼈을 때에 비로소 그 풍경은 무시무시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은 장난으로 버려진 개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의 군상으로도(플란다스의 개), 끊임없이 피해자를 양산하며 견뎌온 어느 시절에 대한 공범의식으로도(살인의 추억), 소외의 자리를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서늘한 자각으로도(괴물), 핏줄(마더)과 시스템(설국열차)에 대한 봉준호의 차가운 시선으로도 다가오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처음의 자리로 되돌아와 끝을 맺는 영화를 보며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결국 바뀐 것은 없고, 저들은 또 무언가를 잃어버릴 것이며, 어디를 향하는지도 모른 채 계속해서 필사적으로 달리겠구나.


영화 <마더>의 스틸컷


은밀한 코드

또 하나 언급하고 싶은 것은 그의 영화 속에 숨어 있는 반복적인 코드들이다.

먼저 그의 영화에는 늘 섹스와 폭력의 그림자가 일렁인다. 그리고 이 그림자의 끝에는 자주 바보의 모습을 한 인물이 서 있다. 그는 폭력적인 수사 끝에 죽기도 하고(살인의 추억), 자식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엄마에 의하여 죽을 고비를 맞기도 한다(마더). <괴물>의 경우 송강호는 약간은 덜떨어진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이를 두고 변희봉은 지나가듯 "내가 밖으로 나돌아서 애가 저렇게 되었다"고 언급한다.

이들은 마치 사회의 하수 처리시설이라도 된 마냥 섹스와 폭력의 난폭함을 견디며 묵묵하게 서 있다. 그러다 다시 발작하듯 폭력을 되갚아주는 것이다. 자신을 때린 형사의 다리를 못쓰게 만들기도 하고(살인의 추억), '바보'라고 놀리는 말에 해코지를 하기도 한다(마더). <마더>에서 아들의 비밀은 결국 밝혀지지 않았음에 주목하자.

과격한 본능이 약한 타깃에게 쏟아지며, 그 타깃이 다른 희생자를 양산하고, 모두가 폭력의 되물림에 필사적으로 침묵하는 사회. 결국 이것이 봉준호가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새 영화 <옥자>.

그리고 새로운 영화가 개봉을 앞두고 있다(아직 필자도 보지 못했다). 영화 <옥자>가 유전자 조작된 돼지에 대한 이야기임은 익히 들었다.

예고편으로 본 바에 의하면, 그의 전작 <괴물>과 동전의 앞뒷면 같은 느낌이 든다. 비슷한 또래의 여자 아이가 괴물에게 납치되는 대신 괴물을 구하러 가는 이야기.


그가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성과 폭력의 코드가 다시 등장할지, 옥자를 향한 질주는 어떤 궤적을 그릴지, 그 질주 끝에 펼쳐질 풍경은 어떠할지.

봉준호의 세계가 다시 새록새록 기억나는가?

새로운 작품을 맞이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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