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영화평론가 홍수정
Feb 21. 2021
봄이 맹렬하게 다가오고 있음이 느껴지는 2월 말, 포근한 일요일.
내게는 최근에 자각한 버릇이 하나 있는데, 책을 무수히 사서 방에 쌓아두는 것이다. 지금도 책상 주변에만 백 권 넘게, 책상 위에는 이십 권 정도 놓여 있다.
원래 책이란 다 읽지도 못하면서 잔뜩 사서 쌓아두는 맛이지. 그러다 시간 날 때 귤 까먹으면서 쏙쏙 읽다 다시 놔두고. 여태 그렇게 생각해왔지만, 뭔가 이상함을 느낀 것은 최근이었다. 나는 다 읽지도 못할 책을 왜 이렇게나 많이 사서 쌓아두는 것일까. 더 나은 글을 쓰고 싶은 갈망? 책 속으로 도피하고 싶은 욕구? 뭐가 되었든 줄줄이 쌓인 이것들이 내 욕망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기분이 복잡미묘해졌다. 이제는 차근차근 읽어 정리해야지. 한적한 일요일 낮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타고 자리에 앉아 책을 열었다.
그리고 곧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는 여러 사람이 나와서 각자 자기 심경을 내게 토로해왔다. 그들은 신기하게도 내가 듣고 싶지 않았던, 피하고 싶었던 아픈 이야기들만 쏙쏙 골라 들려주었다. 열심히 듣다 보니 그들의 이야기가 돌고 돈다는 점을 느꼈다. 가만, 너는 내 친구 같기도 하고 예전에 알고 지낸 동생 같기도 하고. 지금 이곳은 내 방 같기도 하고 예전에 떠나온 하숙집 같기도 하고.. "여기 혹시 꿈속 아니야?"라고 말하니 앞에 앉은 이가 모욕을 입은 표정을 지었다. 있는 힘껏 눈을 떠서 잠에서 깼다.
깨어나 생각해보니 나는 대체 얼마나 많은, 풀지도 못할 감정의 매듭들을 만들며 살아온 것인가 싶어 정신이 아득해졌다. 피해 주지 않고 정갈하게 살고 싶었는데.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지우지 못할 흔적들을 만들며 주변에 양해받고 살아가는 것이 삶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책상 위에 놓인 브라우니를 한 점 집어 먹었다. 유명하다는 베이커리에서 별생각 없이 샀는데, 생각보다 맛있어서 놀랐다. 달콤한 브라우니를 꼭꼭 씹어 삼키니 목이 퍽퍽하게 메어왔다. 아직 얼음이 남아있는 아메리카노 한 잔을 꿀꺽 삼키니 쌉싸름한 액체에 목이 부드럽게 풀려왔다.
아직 읽지 못한 책들. 풀지 못한 감정들. 그리고 브라우니. 달콤하고 퍽퍽한 일요일의 한낮이었다. 다시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