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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홍수정 Sep 06. 2017

형식과 욕망이 어긋날 때, <엘리자의 내일>

씨네21에 기고한 비평 (일부 수정)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씨네21>에 기고한 글을 일부 수정한 것입니다.

원문은 http://www.cine21.com/news/view/?idx=6&mag_id=88091 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엘리자의 내일>(2016)은 어느 날 우연히 폭행을 당한 딸 엘리자(마리아 빅토리아 드라구스)를 무사히 영국에 유학 보내려는 아버지 로메오(아드리안 티티에니)의 분투를 담고 있다. 여기에는 불행이 ‘침입’하는 순간과 아버지가 이를 ‘방어’하는 순간이 혼재한다. 그런데 영화가 끝난 뒤 내게는 유독 강렬한 인상 하나가 남았다. 그것은 이 영화의 침입의 순간이 품은 미혹에 대한 것이다. 그 순간은 실로 뭐라 형언하기 힘든 강렬한 미혹을 품고 있다. 이 글은 그 미혹의 실체를 더듬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날아든 돌이 창문을 깨고, 차 앞으로 무언가가 뛰어들며, 범인인 것 같은 남자가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영화에서 침입의 순간들은 잠깐 등장했다가 곧 증발하지만 줄곧 이어지는 방어의 시간을 압도하며 형형한다. 그 미혹은 장면에 담긴 '미학적 아름다움'에서 온 것일 수도 있고, 정체를 알 수 없다는 '미지의 속성', 혹은 지금 이 순간에 발발한다는 '현재성'에서 기인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것으로도 보는 이를 잡아끄는 미혹의 핵심을 충분히 설명할 수는 없다.

반면 영화의 나머지를 채우는 것은 로메오의 방어의 시간이다. 여기에는 부정한 결탁과 건조한 행위의 연쇄가 자리한다. 크리스티안 문주는 로메오의 핏기 없는 에 집중하는데,  그 얼굴은 루마니아 민주화 세 노병들이 맞이한 현실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들은 보상 없이 지나간 과거를 후회하며 부패한 시스템에 거리낌 없이 합류한다. 로메오는 한때 혐오하던 게임을 능숙하게 플레이한다. 그 능숙함에서 시스템을 고치지 못할 바에야 너희의 방식대로 승리해주겠다는 모순적 욕망을 느꼈다면 무리한 감상일까. 하지만 그는 결국 승리하지 못한다. 딸의 시험은 그의 노력과 별개로 진행되고 사회는 달라진 게 없으며, 오직 그의 행동만이 맨 얼굴을 드러낸 채 상흔처럼 남게 되었다. 로메오는 마치 거미줄에 걸린 곤충과 같다.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는 투명한 그물에 우연히 포획되고, 그의 애절한 발버둥은 줄을 출렁이며 부패한 조직망을 드러낸다. 이것이 크리스티안 문주가 루마니아 사회를 조망하고 영화적으로 구축하는 방식이다. 침입과 방어의 순간들로 세공된 이 섬세한 구조물의 끝에는 루마니아의 현실이 도사리고 있다. 나는 이 끔찍한 풍광이야말로 영화가 도달하고자 목표하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마지막에 이르러 영화는 목표점에 성공적으로 안착한다. 그런데 이 성공은 어딘가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의구심은 영화에 나타난 몇몇 특징에서부터 시작된다. 먼저 카메라가 로메오와의 사이에서 유지하는 거리가 눈에 들어온다. 영화는 그와 간격을 두기도 하고(수풀 속에서 로메오가 홀로 우는 장면), 지근거리에서 그를 쫓기도 하며(범인으로 의심되는 남자를 쫓는 장면), 그의 사적인 거리를 지켜주려는 듯 물러서 있기도 한다(로메오가 산드라를 애무하는 장면). 그런데 유독 로메오가 다른 남성들과 결탁하고 부정행위를 계획하는 장면마다, 카메라는 특정한 바스트 숏을 반복하며 그들에게 밀착되어 있다. 이 거리는 로메오와 상대 남성과의 거리와도 유사하여, 카메라가 이 자리에 공범으로서 입회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이때 카메라가 점하는 자리는 이상하다. 루마니아의 현실을 차갑게 보여주는 순간마다 카메라는 특정한 자리에 똬리를 틀고서 그들의 대화를 폭로하고픈 욕망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 장면들은 다시 영화가 목표하는 현실 폭로에 충실히 복무한다. 이 공교로운 개입은 과연 우연일까. 또 다른 의문은 앞서 언급한 침입의 순간에 대한 것이다. 산드라의 아들 마테이는 놀이터에서 규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에게 분노하여 돌을 던진다. 이 장면으로부터 돌은 불의에 대한 응징으로 던져진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렇다면 영화는 왜 첫 장면에서 로메오에게 돌을 던지며 시작될까. 이것은 과연 뒤이어 벌어질 불의에 대한 단순한 예고에 불과할까. 로메오는 그에 응하듯 밖으로 뛰쳐나간다. 불의와 응징의 수상한 도치. 이는 영화가 로메오의 불의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미리 계획하고 기다린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고서 원하던 순간이 오면 그곳에 입회하여 현실을 폭로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침입의 순간이 유독 미혹적인 이유에 대한 숨겨진, 그러나 가장 설득력 있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그것은 로메오를 침범하는 듯 보이나 사실은 그를 유혹하고 꾀어낸다. 그 미혹의 핵심은 영화가 로메오에게 건네는 유혹의 손길에 있다. 불현듯 삶을 침범하고 들어와 어디론가 유혹하는 손짓, 기다렸다는 듯 밀회에 참석하여 현실의 단편을 담아내는 카메라. 여기에는 인물을 잡아끌어 목표에 이르고자 하는 영화의 숨겨진 야심이 엿보인다.


이상한 일이다. 우리가 열광하는 리얼리즘은 대상을 존중하고 그것의 성질을 드러낸다지만 여기에는 대상을 누른 채 영화의 의도 아래로 복속시키려는 인력이 존재한다. 영화는 인물에게 개입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싶어 하는 동시에(형식), 그들 사이에 적극 개입하여 루마니아의 현실을 폭로하고 싶어 한다(욕망). 형식과 욕망의 불일치. 이 간극을 메우기 위해 영화는 로메오에게 과도한 짐을 지운다. 그는 러닝타임 내내 루마니아의 부패한 현실을 전하느라 분주하다. 그러나 사건을 대하는 그의 태도, 바쁜 움직임과 적당한 눈물에는 이상하게도 제멋대로 돌출된 부분이 없다. 대부분은 현실을 반영하고 지시하며, 영화의 목표에 충실히 복무한다. 엘리자는 이 모든 사건의 당사자임에도 로메오를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희미하게 물러나 있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졸업 시험이, 폭행이 그녀에게 무엇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니까 영화 안에서 벌어진 사건이 인물들에게 던진 파장 중에서 영화가 욕망하지 않는 부분은 매끈하게 정리되고 삭제되어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인물들은 생기를 잃어간다. 생기란 인물의 삶이 스크린에서 수동적으로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영화의 순간을 충실히 살아갈 때 느껴지는, 말 그대로 살아 있다는 기운이다. 영화 안의 인물들은 영화 밖의 현실을 지시하기 위하여 소용된다. 이것은 연출의 방식일까, 또 다른 착취일까. 결론이 무엇이든 나는 그것에 동의할 수 없다. 영화의 모순된 욕망을 위하여 희생되어서는 안 될 것이 희생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우연히 발생한 침입에 인물이 반응하는 모습에서 현실이 비추어 보인다고 얘기한다. 그러나 내가 본 것은 그 반대다. 영화는 현실의 재현을 욕망하고 인물을 필요로 하며, 그를 꾀기 위하여 미혹을 건넨다. 그 사이에 선 로메오의 창백한 얼굴은 허락할 수 없는 희생의 감각을 전한다. 이것이 윤리의 선을 넘었는지에 대해서는 판단을 보류하고 싶다. 그러나 이것만은 말할 수 있다. 나는 이 영화에 끝내 동의할 수 없다. 영화는 높은 곳으로 이끌어 서 있는 곳의 풍경을 보라 하지만 나는 내가 밟고 선 것이 무엇인지가 의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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