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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홍수정 Nov 27. 2021

멈춤과 움직임의 미학, <프렌치 디스패치>


<프렌치 디스패치>는 웨스 앤더슨이 <뉴요커>로부터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고 알려졌다.


<뉴요커>의 열렬한 애독자라는 그가 '잡지'에 매료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해 보인다. <판타스틱 Mr. 폭스>(2009)부터 <개들의 섬>(2018)까지 웨스 앤더슨은 이미 두 편의 스톱 모션을 선보인 바 있다. 말 그대로 멈춰 있는(stop), 그러다 움직이는(motion) 것들에 대한 그의 애정은 각별하다.


그렇다면 잡지는 어떨까? 잡지에 등장하는 '사진'은 세상을 잠시 멈추어둔 화면처럼 보이고, 이를 설명하는 '글'은 (독자의 머릿속에서) 사진이 잠시 멈추어둔 풍경을 다시 역동하게 만든다. 잡지는 웨스 앤더슨이 애정하는 '멈춤'과 '움직임'의 미학을 그대로 체화하고 있는 매체다. 그러니 매거진을 향한 웨스 앤더슨의 사랑은 사실은 이것에 대한 사랑이 아닐까 한다. 멈춤, 그리고 움직임의 미학.


그런 의미에서 <프렌치 디스패치>는 특별한 작품이다. 여태 웨스 앤더슨의 필모그래피에서 '멈춤과 움직임'에 대한 그의 애정이 이다지도 투명하고 선명하게 드러난 작품은 없었다. 그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프렌치 디스패치> 스틸컷


멈춤, 그리고 움직임.


<프렌치 디스패치>는 한 편집장의 죽음에서 시작된다.

잡지 '프렌치 디스패치'의 발행을 책임져 온 이 편집장(빌 머레이)의 죽음은 잡지의 쟁쟁한 기자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으고, 그들은 마지막 발행본에 실을 특종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누군가의 죽음. 그것을 계기로 모여드는 개성 강한 캐릭터들.

이것은 웨스 앤더슨의 시그니처라 할 수 있는 전개이다. 그는 흔히 자신의 영화를 이런 방식으로 시작하고는 한다. 마담 D.의 죽음을 계기로 호텔 지배인을 찾아가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2014),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자식들이 속속 모여드는 <로열 테넌바움>(2002)을 보면 알 수 있다. 웨스 앤더슨은 자주 위기에 봉착한, 붕괴 직전의 조직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위기를 맞기 전, 화려했던 시절을 떠올리고는 하는 것이다. 그래서 웨스 앤더슨의 작품에는 늘 어딘가 달콤쌉싸름한 노스탤지어가 흐르고 있다. 그의 작품이 알록달록한 파스텔톤이라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정확히는 어딘가 살짝 빛바랜 파스텔이다. 그래서 어여쁜 동시에 가슴 한구석이 시리고는 한다.


<프렌치 디스패치> 스틸컷


<프렌치 디스패치> 거의 모든 장면들은 사진처럼 멈추어진 상태에서 시작된다.

정면을 바라보는 사람의 정지된 얼굴. 아무런 움직임 없이 제시되는 블라제의 풍경. 그 멈춘 장면들은 말할 것도 없이 잡지 사진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잡지의 글, 혹은 지문에 해당하는 부분은 내레이션으로 설명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2시간 동안 마치 영화로 만든 잡지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웨스 앤더슨은 관객으로 하여금 '매거진'이라는 매체를 연상하게 함으로써, 그것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고백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다음 부분이다.

멈춰있던 장면에서 다시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한다. 사람은 움직이고, 멈춘 풍경에서 새가 날고 차가 움직인다. 그 순간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보고 있는 화면이, 사진이 아니라 영상임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멈춤에서 움직임으로 넘어가는 그 찰나를 '전환의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전환의 순간은 화면을 '사진'으로 착각했던 우리의 인식을 '영상'이라는 깨달음으로 돌려놓는다. 아주 잠깐 사이에 우리의 인식은 사진에서 영상으로 건너오게 된다. 그 짧은 찰나를 통해 우리는 잡지와 영화라는 두 매체의 경계를 폴짝 뛰어넘는다.


완전한 사진도, 영화도 아닌 순간. 동시에 사진이자, 영화인 순간. 그 '전환의 순간'에는 사진과 영화라는 두 매체가 위태롭게, 그러나 매혹적으로 공존한다. 그러므로 <프렌치 디스패치>에서 웨스 앤더슨이 은밀하게 시도하는 것은 사진과 영상의 만남이자, 잡지와 영화의 접목이다. 우리는 작품을 보는 내내 비록 아주 잠깐이지만 반복적으로 그 오묘한 순간을 체험하게 된다.


<프렌치 디스패치> 스틸컷

또 하나, 웨스 앤더슨이 사진과 영상의 경계에 천착한다고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예를 들어 영화가 종종 마치 파노라마처럼 멈춘 사람들을 줄지어 보여주는 순간이 있다. 이것은 언뜻 보기에 스틸컷 같기도 하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배우들이 움직임을 멈춘 채, 스틸컷처럼 연출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잠시 멈췄다가 움직이는 장면이 아니라) 영영 멈춘 채 스틸컷처럼 보이는 장면에서조차, 웨스 앤더슨은 배우들로 하여금 그것을 연기하게 한다.


종종 사람들이 사진을 찍는 척하며 동영상을 키면, 상대방은 사진일 찍는 줄 알고 멈춘 포즈를 유지하고 있을 때가 있다. 이 영화에는 마치 그런 순간을 보는 듯한 연출이 종종 등장한다. 이것은 움직임 없이 멈추어 있기에 사진 같고, 분명 시간이 흐르고 있으므로 영상이다. 둘 중에 어느 쪽인지를 고민해 결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웨스 앤더슨이 보여주고 싶은 것은 둘 모두가 공존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프렌치 디스패치>는 끝내 영화로 돌아와, 그것을 찬미하는 작품처럼 느껴지기도 하다. 잠시 멈췄던 화면이 유려하게 움직일 때, 그 움직임의 순간들이 너무도 아름답기 때문이다.

도시를 활강하는 자전거. 꿈틀대는 시위대. 유괴범을 잡으려고 도시의 좁은 거리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남자.

<개들의 섬>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웨스 앤더슨의 작품에서 인물들은 자주 미로같이 촘촘한 공간을 이리저리 좌충우돌 이동한다. 화면을 좌우, 위아래 가로지르며 도도도 뛰어다니는 주인공들. 그것은 '움직이는 사진'으로서 영화의 속성을 분명히 드러내는 장면들이다. <프렌치 디스패치>에서도 여지없이 이런 순간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다른 작품에 비해 그것에 탐닉하는 비교적 경향은 약해졌다. 그것은 위에서 말했듯이 이 영화가 다른 작품들보다 더 자주 사진과 잡지를 바라보며, 그것에 가까이 다가가기 때문으로 보인다.


<프렌치 디스패치> 스틸컷

이건 사진이야, 영상이야?

잡지일까, 영화일까?

웨스 앤더슨은 당신에게 이렇게 물어올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아마 당신의 답을 바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는 단지 대답을 고심하는 당신의 표정이 보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다.


천재 화가 모세스(베네치오 델 토로)가 카다지오(애드리언 브로디)의 주문을 받고 작품을 완성해 지하 감옥에서 공개했을 때, 카다지오는 좋아서 어쩔 줄 모른다. 하지만 곧이어 그것이 벽화(프레스코)임을 깨달았을 때, 카다지오의 난감한 표정. 어쩌면 그것은 사진과 영상을 오가는 <프렌치 디스패치>를 보는 우리의 표정일지도 모른다. 내가 보고 있는 대상의 진정한 정체성을 깨달은 자의 당혹스러운 얼굴을 웨스 앤더슨은 좋아한다. 카다지오는 당혹함을 이기지 못하고 모세스를 비난하고 모욕하지만, 곧이어 그를 꼭 껴안으며 이야기한다. 그 벽화는 최고의 작품이라고.


그를 따라 해 보는 것이 장난스러운 웨스 앤더슨을 대하는 관객에게 필요한 태도일지도 모르겠다. 멈췄다 움직이길 반복하며, 두 매체의 경계 사이에서 방황하며, 자신만의 영역을 고심하는 <프렌치 디스패치>를 볼 때. 영화를 꼭 안아주며 '아름답다'는 격려를 보내는 것 외에 더 이상 붙일 말을 찾기는 어려워 보인다.






※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 채널에 올라간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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