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평론가 홍수정 Aug 28. 2022

[끌올] 끝나지 않을 술래잡기, <겟아웃>

<놉> 개봉에 맞춰 다시 올리는 <겟아웃>(2017) 리뷰. 

아래 글에서 특히 '조던 필의 근원적 공포'에 대한 부분에 대한 생각은 여전하다. 조던 필의 영화들은 늘 통제를 벗어난 신체가 공포스럽다고 말한다. 침범되고 잠식된 육체들은 의지와 다르게 제 멋대로 움직인다. 그가 주목하는 테마가 무엇이든, 그것으로 망가진 사람들은 마리오네트처럼 '통제할 수 없는 신체'로 형상화된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겟 아웃> 스틸컷


 내게 조던 필 감독은 '현재의 미국을 이야기하는 감독'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로 치켜세워지는 느낌이 강했다. 미국적임을 과시하고, 트렌디하고, 스펙타클 할 것 같다는 선입견이 개인적 취향과는 맞지 않아 관람을 미루던 차에(나는 평론가 치고 영화를 편식하는 편이다) 더 이상은 미루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 그의 데뷔작 <겟 아웃>(2017)을 보았다. 


두 갈래의 길

내가 <겟 아웃>을 보고 처음 놀랐던 것은 조던 필에 대한 선입견과는 다르게 간결하고도 임팩트 있는 오프닝 때문이었다.

한 흑인이 길을 걸어가며 '엣지우드 웨이'와 '엣지우드 레인'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웨이(way)와 레인(lane)은 모두 '길'을 의미하는 단어로, 그는 지금 두 개의 길에 대해 얘기를 하는 중이다. 곧이어 흑인 청년은 괴한에게 납치를 당하는데 그 과정이 흥미롭다. 그는 좁은 인도를 걷다가, 차도 위의 하얀 차에 쫓기고, 잠시 차도로 내려간 사이 피습된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이곳에 '두 종류의 길'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좁은 길과 넓은 길이 분리돼 있고, 좁은 길의 사람은 넓은 길에 발을 디딘 순간 그 길의 사람에게 공격받아 흡수된다. 그러니까 조던 필이 보는 미국은 '투 트랙(two-track)'으로 이루어진 세계다. 이런 투 트랙에 대한 의식이 조던 필의 영화 세계를 관통하는 대전제가 된다. <겟 아웃>의 오프닝은 이 점을 분명히 하면서도, 그것을 간결하고 세련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막상 스크립트가 오르며 펼쳐진 영상들은 다소의 실망감도 안겨주었음을 고백해야 될 것 같다. 빵을 고르는 여자와 단장을 하는 남자, 그러니까 고르는 위치에 선 여자와 선택받는 위치에 선 남자. 지하실을 두고 '검은' 곰팡이가 폈다고 말하는 여자의 아버지. 흑인의 우수함을 언급하며 눈을 번뜩이는 가족들, 혹은 다른 문화권에 대한 탐욕 어린 시선. 이런 대사와 행동들이 이 영화의 불길한 분위기를 직조하지만 그 표현방식이 다소 직접적이며 유치한 것도 사실이다.


통제력을 상실한 신체

오히려 나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어떤 '마비된 신체들'의 이미지였다. 차에 치인 채 바닥에 누워있는 사슴, 어색하게 손을 들어 인사하는 흑인 관리인, 최면에 걸린 채 침잠의 방에 빠져드는 주인공. 벽에 걸린 채 박제된 사슴의 머리. 이 이미지들은 스스로의 통제권을 상실한 채 굳어버린 몸뚱이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서로 다른 세계 사이의 차별'이라는 주제는 (그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낯선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차별에 대한 공포를 '마비된 몸'으로 표현하는 지점은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이것은 조던 필이라는 작가가 인식하는 공포의 원형적 이미지를 관객에게 드러낸다. 그러니까 차별적 상황이든, 엽기적 의술이든, 트라우마든, 최면이든 자기 몸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고 다른 이에게 몸을 내맡기는 상황이야말로 조던 필이 생각하는 진정한 공포인 것이다(이런 컨셉은 <어스>에서 지하세계 인간들이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지상의 인간들을 따라 움직이는 상황에서 다시 한번 반복된다).  


영역의 침범

그렇다면 이들이 통제력을 상실하는 이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주로 영역 침범에서 기인한다. 다른 이의 집에 들어서고(로즈의 집에 간 크리스), 자동차의 영역에 들어가고(차도에서 피습되는 흑인 청년), 타인의 머릿속으로 들어가는(최면) 행위들이 통제력을 상실시킨다.

<겟 아웃>에서 조던 필은 끊임없이 '영역'에 대해 질문한다. 저들의 영토로 들어갈 수 있을까. 다치지 않고 그곳에서 나올 수 있을까. 내 영역에 침입한 자를 몰아낼 수 있을까. 미국 사회의 계층 문제에 대한 조던 필의 관심은 이 영화에서 쫓고 쫓기는 게임으로 추상화된다. 러니까 <겟 아웃>은 물질적, 정신적 영토를 두고 벌이는 술래잡기에 대한 영화라고도 볼 수 있다. 다만 이 게임의 술래는 늘 백인이고 숨는 쪽은 늘 흑인이다. 술래의 지위는 견고하고, 숨는 쪽은 모든 것을 걸고 도망쳐야 된다. 이런 일방적인 술래잡기를 우리는 사냥이라 부른다. 그러니 '겟 아웃'은 영역을 앗긴 자의 비명이자, 사냥감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명제라고 볼 수 있다.


흔히 <겟 아웃>을 인종 차별에 대한 영화로 언급하지만, 사실 이 영화에서 인종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여기서 인종은 약자를 구분 짓는 하나의 표지일 따름이다. 영화에서 로즈의 가족들은 끊임없이 흑인의 우수성을 언급하지만, 우리는 거기서 존중이 아닌 구별과 대상화를 본다. 타인과 나 사이에 선을 긋고 그것을 재미 삼아 넘나드는 태도. 그것이야말로 폭력의 본질이 아니냐고 <겟 아웃>은 묻는다. 우리는 위의 태도를 한 마디로 '침범'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의 제목인 '겟 아웃(get out)', 즉 나가라는 말은 늘 침범을 전제한다. 나가라는 비명 앞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그만큼 잔인한 침범이 과거에 있었다는 사실이 아닐까.


술래잡기

두 시간이 지나면 크리스의 술래잡기는 끝이 나지만 이 유희적이며 잔혹한 영화는 어쩐지 현실의 술래잡기를 떠올리게 한다. 그곳에서는 두 시간이 지다 하여 게임이 멈추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영화관을 나서는 관객에게 <겟 아웃>은 이렇게 묻는 것만 같다. 들키지 않고 그 세계 들어갈 수 있겠니.

자, 술래가 온다. 도망칠 시간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요란스러운 재앙 체험관, <비상선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