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선언>은 이런 것들로 꽉꽉 채워져 있지만,영화를 영화답게 만드는 것들에는 철저히 무심하다. '철학'까지는 말할 것도 없다. 테러, 바이러스, 추락 같은 자극적인 설정들을 이리저리 펼치고 별 고민 없이 회수한다. 그 과정은 단순하고 극단적인 해결책과, 배우들의 눈물 연기에 기대고 있을 따름이다.
호들갑스러운 재난 상황, 눈물 콧물 쏟는 신파, 히어로의 돌발 행동을 통한 해결이 반복된다. 관객을 긴장시키기 위해 클로즈업을 남발하고 카메라가 쉴 새 없이 흘들린다. 강약 조절 실패. 남는 것은 진한 피로감이다.
<살인의 추억>, <부산행> 등에서 본 듯한 장면들을 계속 나온다. 기시감.
송강호, 전도연, 이병헌 같은 배우들이 총출동하는데도 연기가 평이하다. 캐릭터들이 자신만의 스토리가 없고 (있다 하더라도 상투적인 수준에 그치고), 기능적으로 소모되기 때문이다. 연기할 여지가 없으니 연기력이 안 보일 수밖에.
좋은 부분도 있다. 비행기라는 공간을 폐소 공포증을 자아낼 정도로 철저히 폐쇄된 재난의 장소로 연출한 감각이 돋보인다. 여러 캐릭터를 한 자리에 불러 모으는 시도도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초반부가 후반부보다 낫다(후반부를 구원할 정도는 아니지만). 액션 장면에 힘을 많이 줬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시도에 그치고, 나머지 요소가기대 이하다.
한재림 감독은 이보다 나은 연출을 할 수 있는 연출자기에 아쉬움이 더 크다.최동훈의 <외계+인>과 더불어, 올여름 대작들에는 재기 발랄함이 실종됐다. 소위 천만 영화에 걸맞은 요소들을 욱여넣다 보니 영화가 딱딱하고 지루하다. 그러고 보니 '천만 영화'가 나왔다며 자축했던 것이 장기적으로 한국 영화계에 독이 된 것 같다. 흥행에 성공했다는 이유로 작품을 올려쳐 주고, 오글거리는 신파와 소란스러운 액션에도 너그럽게 우쭈쭈 해주던 분위기가 결국 그런 것들로 뒤덮인 영화들을 양산하는데 기여했다. 재능 있는 감독들이 작품이 아닌 흥행 상품을 찍어내기 위해 골몰하는 환경 속에서 한국의 상업 영화 수준은 퇴보하고 있다.
<비상선언>은 여태 한국의 천만 영화에서 엿보이던 흥행 요소를 다 때려박고 개연성, 디테일, 고민, 철학 등 흥행과 무관해 보이는 것들은 깨끗하게 제거한 작품이다. 하지만 나는 도리어 여기 없는 것들의 소중함을 다시금 깨닫는다. '한국형 블록버스터 대작'의 성공 사례가 되기를 바랐겠지만, 안타깝게도 나쁜 사례로 남을 것 같다.
별 점 : ★★☆ (5점)
한 줄 평 : 요란스러운 재앙 체험관.
※아래에는 스포가 있어요
이 영화의 서사를 보며 가장 크게 받은 인상은 '무책임하다'는 것이다. 개연성이 부족한 부분을 일일이 언급하기도 어렵다.
장관급 회의에서 형사 한 명이 튀어나와 말을 하니 상황이 정리된다. 이 형사는 오로지 협박만으로 의료인들을 좌지우지한다. 다국적 기업의 반항은 국토부 장관의 등장만으로 손쉽게 제압된다. 마치 어린애의 상상 같다.
일본의 고위 관료는 중대 발표를 하면서 백신이 안 통할 것 같다는 둥 불안을 조장하는 말을 천연덕스럽게 한다. 마치 승객들이 듣고 울기를 기다리는 듯. 기장이 관재탑과 하는 대화는 온 나라에 라이브로 방영된다(굳이 왜?). 모두 스펙터클을 만들기 위한 억지 설정이다.
마지막에 "너무 위험한 결정 아니었냐"는 비판에 전도연은 "그래서 (국토부 장관직에서) 나왔지 않습니까"라는 답변으로 일축한다. 나는 이게 이 영화의 태도를 그대로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장관이 저러는 게 말이 되냐"는 질문에 "그래서 관뒀다고 썼잖아"라고 대답하는.
영화에서 전도연은 여성으로서 장관의 자리까지 오른 인물이다. 하지만 그녀에게 엿보이는 것은 그만큼의 무서운 정치력이나 정무적 감각이 아니라, 무대뽀에 가까운 실행력과 지나친 순수함이다. 비상 상황마다 자신의 직을 거는 사람이라면 저렇게 높은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었을까? 영화를 보며 이런저런 의문을 떠올린 게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의문들에 답하지 않는다. 이건 가능성을 열어놓는 유연함이 아니라 무책임함이다. 나는 이 영화가 때때로 관객이 던질만한 질문 앞에서 도망치고 있다고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