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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홍수정 Sep 21. 2022

글은 디자인이다

글을 쓸 때 '내용'만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알맹이, 즉 내용이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글은 눈으로 읽는 것이다. 눈에 쉽게 흡수되는 글을 쓰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사람들은 "잘 읽히는 글을 써야 한다"고 말하고는 한다. 나는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고 싶다. 글은 디자인이다. 마치 물건의 디자인을 고민하듯, 글의 가독성을 검토해야 한다.


 알롭달록 이쁘게 꾸미라는 뜻이 아니다. 글을 '시각적인 차원'에서 검토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저 창문 밖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듯 내가 쓴 문장이 한눈에 들어오는가? 문장의 길이, 단락의 크기까지 두루 고려하며 글을 쓸 줄 알아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문장의 길이가 적당해야 한다. 

독자의 눈을 가장 강하게 잡아끌어야 하는 첫 문장은 되도록 짧은 게 좋다. 짧은 문장은 머리로도 잘 이해되지만, 눈에도 빠르게 흡수된다. 눈을 이리저리 굴려가며 읽어야 하는 긴 문장은 독자를 피로하게 만든다. 일단 짧은 문장으로 독자의 흥미를 잡아 끈 다음에 뒤 쪽에 긴 문장을 배열하는 것이 좋다.

물론 상황에 따라 다르다. 첫 문장이 반드시, 언제나 짧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문장 자체가 흥미롭거나, 내용이 쉬워서 술술 읽히면 좀 길어도 상관없다.


글이 올라가는 지면이나 플랫폼의 성격을 확인하는 것도 필수다. 문장의 배열 방식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내 글은 어떻게 생긴 지면에 실리는가. 가로로 긴 지면인가? 혹은 가로가 좁고 세로로 길게 들어가는 지면인가? 글은 배열에 따라 전혀 다르게 읽힌다.


예를 들어보자.


"이리저리 부딪치고 구르는 생생한 육체들. 그 이미지가 끝내 감동스럽다면, 그것은 뜨거운 육체의 활동이 이 시대에 남겨진 파일럿의 존재 의미를 온몸으로 체화해 역설하기 때문일 것이다."

                                               -'PD저널'에 기고한 <매버릭'이 필사적으로 싸운 적의 실체> 中


여기서 두 번째 문장의 가독성은 배열 방식에 따라 달라진다.


(1) 그 이미지가 끝내 감동스럽다면, 그것은 뜨거운 육체의 활동이 이 시대에 남겨진 파일럿의 존재 의미를 온몸으로 체화해 역설하기 때문일 것이다. 


(2)

그 이미지가 끝내 감동스럽다면,

그것은 뜨거운 육체의 활동이

이 시대에 남겨진 파일럿의 존재

의미를 온몸으로 체화해

역설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면에 따라 (1)처럼 가로로 주르륵 늘어진 지면이 있고, (2)처럼 가로는 좁고 세로로 긴 지면이 있다. (2)와 같은 지면에는 문장을 좀 길게 써도 괜찮다. 문장을 배열하는 과정에서 알아서 줄 바꿈이 일어나기 때문에, 문장을 끊어주는 효과가 발생한다. 반면 (1)의 경우 그런 효과가 없으므로 긴 문장을 늘어놓으면 독자는 쉽게 피로감을 느낀다. 이럴 때에는 문장을 더 짧게 쳐주어서 가독성이 높인다.


사진이나 삽화가 자주 들어가는 지면도 있고, 그런 게 아예 없는 지면도 있다. 독자를 환기시키는 그래픽이 없는 지면의 경우 문장의 문턱을 낮춰서 가독성을 더 높이는 게 좋다. 혹은 단락을 좀 더 자주 나눠서 글에 리듬감을 부여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가장 좋은 것은, 독자가 읽는 방식대로 그대로 글을 인쇄해서 검토하는 것이다.

보고서를 썼다고 치자. 보고 받는 사람이 인쇄물의 형태로 읽게 된다면, 나도 인쇄해서 글을 검토해야 한다. 보는 사람들이 스크린으로 읽는다면 나도 스크린에서 검토한다. 분명 느낌이 다를 것이고 다듬어야 할 부분이 보일 것이다.


이번 글에 못다 한 이야기는 앞으로 찬찬히 풀어놓을 예정이다. 어찌 되었든 강조하고 싶은 것은 글의 생김새를 뜯어보는 일이다. 내용이 아니라 '시각적' 차원에서 내가 쓴 글을 바라보자. 그림을 감상하는 관객의 마음으로. 손을 대야 할 부분들이 새로이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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