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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홍수정 Sep 22. 2022

(글을 쓸 때) 가벼운 건 앞으로, 무거운 건 뒤로

읽히지 않는 글만큼 우울한 것도 없다. 그래서 어제에 이어 오늘도 글의 가독성에 대해 말해보겠다.


글은 항상 두괄식으로!

이 말을 잠언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글의 내용이 쉬울 때에는 굳이 둘러가지 말고 핵심부터 말하는 게 좋을 때도 있다.


그러나 두괄식이 독이 되는 경우도 있다(나는 전문가들이 이 경우에 대해 말해주지 않으면서 두괄식만 찬양하는 것이 조금 짜증이 난다). 그건 언제일까? 글의 내용이 어려운 경우이다.


글의 내용이 어려운데, 머리에다 바로 핵심을 박아두면 독자들은 경기를 일으킨다. 알 수 없는 제목이 적힌 책을 펼쳐보고 싶을까? 위화감을 먼저 불러일으킬 이다.


묵직한 내용을 다룰 때도 시작은 가벼운 것이 좋다. 어려운 표현, 전문 용어, 길고 복잡한 문장을 구사하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뒤쪽에 쓰자. 문단의 뒤쪽, 글 전체의 후반부에.


왜 그래야 할까? 독자에게 본론을 이해할 시간을 주기 위함이다.

독자들은 글의 앞부분을 읽으며 정보를 습득하는데, 이것은 후반부를 이해하기 위한 기초 된다. 먼 곳으로 떠나기 위한 예행연습 것이다. 이런 과정을 지나친 후에 어려운 내용을 쓰면 소화가 된다. 피타이저 없이 스테이크부터 때리면 소화력이 약한 사람은 급체를 다.


아래 문단을 예로 들어보겠다.


(1) 매버릭이 탑건들을 교육하는 장면에서 의미심장한 대사가 나온다. (2) 매버릭은 우리의 적이 'time(시간)'이라고 말한다. (3) 미션을 수행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미션의 성패를 좌우할 것이라고. (4) 그런데 이때 'time'의 의미는 단순히 물리적인 시간을 넘어 '시대'로까지 확장된다. (5) 그러니까 매버릭과 탑건들이 상대할 진정한 적은 국가도, 인간도, 기계도 아니다. (6) 어린 루스터(마일즈 텔러)를 청년으로 성장시킨 그것, 매버릭의 몸을 마모시키고 은퇴하게 만들 그것, 끝내 지상 위의 모든 탑건들을 소멸시킬 그것의 이름은 바로 'time', 시대이다. (7) 파일럿들의 가치를 의심하는 시대 앞에서, 그들은 온몸을 내걸고 일대 전투를 벌이는 중이다. (8) <탑건>에서 매버릭이 상대하는 진정한 적은 바로 시대다.

- <PD저널>에 기고한 "'매버릭'이 필사적으로 싸운 적의 실체" 中 일부를 수정한 글 -


위 단락의 주제는 (8)번 문장이다. 그러나 글의 첫머리부터 "이 영화에서 매버릭은 '시대'와 싸운다"라고 하면 뭔 소리인가 싶을 것이다. 추상적인 내용이라 어렵게 느껴진다. 사전 정보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1)에서 우선 의미심장한 대사를 언급하며 관심을 유도한다. 독자들은 영화 속 대사들을 떠올리며 글의 맥락을 따라올 것이다. (4)는 결론으로 가기 위한 연결고리가 된다. 그리고 후반부에는 이르러 (6)번 문장이 등장한다. 비교적 긴 문장이지만 부담이 덜하다. 앞부분의 정보가 습득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7)번 문장은 비유적이지만 앞의 내용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 이해하기 쉽다. (8)에서는 하고 싶었던 말, 결론이 등장한다.


어려운 글을 쓸 때에는 기억하자.  

가벼운 건 앞으로, 무거운 건 뒤로.

짧고, 쉽고, 말랑한 내용은 앞에다 배치한다. 길고, 어렵고, 투박한 내용은 뒤로 뺀다. 그러면 독자들은 앞부분을 디딤돌 삼아 뒤의 내용도 소화한다.


다만 주의를 주고 싶은 부분이 있다. "글을 항상 라이트하게 시작하라"는 뜻으로 오해하지 않았으면 한다. 때로 날카롭고 묵직한 시작도 매력이 있다. 글의 성격에 따라 서두를 무겁게 시작해야 되는 경우도 있다. 다만 글을 구성할 때에 독자가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은 되도록 뒷부분에 배치하는 것이 가독성을 높일 수 있다는 의미다. 가독성을 희생해서 스타일대로 쓰는 것도 훌륭한 선택이다. 다만 많은 사람이 먹기를 원하는 스테이크에는 애피타이저를 곁들이는 것이 영리한 결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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