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D저널에 기고한 글입니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잊혀야 하는 영상이 있다. 세상과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야 하는 영상. 원치 않게 찍힌 영상이나, 누군가의 고통을 찍은 영상, 죄 없는 피해자를 만드는 영상 등이 그렇다.
이것들을 지칭하는 말을 달리 찾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영상'이라 부르지만, 사실 그것들은 영상으로서 존재할 자격을 얻는 데 실패했다. 폭력과 고통의 흔적. 원죄를 품고 태어나 세상에 덩그러니 남겨진 것들. 그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연히 목격자가 되어버린 현실에 미안함을 느끼며 서둘러 자리를 뜨는 것이다. 그리고 본 것을 잊는 것이다. 더 이상 누군가의 고통이 퍼지지 않도록, 영상이 만들어지기 이전의 상태로 세상을 되돌릴 수 있도록 침묵을 지키는 것이다.
타인의 고통을 연민하는 우리는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카메라가 있다 하여 모두 찍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영상이 있다 하여 모두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찍고, 보고, 떠올리는 일에는 윤리가 있다. 지금처럼 영상이 삶 깊숙이 들어온 시대에는 더더욱 '영상의 윤리'가 중요하다. 그것은 우리가 야만의 땅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주는 최소한의 보루이다. 그 경계 안에서 비로소 영상은 예술이 되고 영화가 된다.
최근 개봉한 영화 <교섭>에는 '고 김선일 씨 피살 사건'을 연상케 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사건을 모르는 이도 있겠지만, 아는 이들은 아마 잊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전 국민에게 트라우마를 안긴 참사였다. 참상의 순간은 녹화된 영상의 형태로 대중에게 무방비하게 공개됐다. 진정으로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영상이었다. 누군가의 고통을 동의 없이 촬영하고 송출하는 물질. 그것이 태어나고 공유되는 모든 순간이 폭력이라는 것을 달리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영화에서 국정원 요원 박대식(현빈)은 뚜렷한 이유 없이 아프가니스탄에 남은 채로 한국인 피랍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후반부에 그가 이 사건에 그토록 필사적인 이유가 밝혀진다. 그는 과거 이라크에서 한국인 구출 작전에 실패하고 피해자가 희생되던 순간에 관한 잔상에 시달렸다. 같은 순간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그는 달린다.
박대식이 이라크에서 겪은 참사를 회상하는 장면에서, 고인과 닮은 외모의 배우가 카메라를 바라보며 절박하게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이 장면이 실제 영상과 얼마나 유사한지를 정확히 판단할 수는 없다. 고인에 관한 그 영상은 현재 온라인에서 찾기 힘들고, 설사 찾을 수 있다 하더라도 보아서는 안 된다. 다만 이 장면이 즉각적으로 우리의 머릿속에서 과거의 참상과 그것을 찍은 영상에 관한 기억을 자극하며, 그와 관련된 이미지가 떠오르게 한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물론 디테일은 다르다. 그러나 이라크, 납치, 피살, 영상, 이런 몇 가지 지표만으로도 과거는 우리의 머리에 금세 소환된다. 그만큼 강력하기 때문에. <교섭>이 이런 반응을 몰랐다고 할 수 없다. 아니, 오히려 이 영화는 우리의 트라우마를 정확히 자극하는 방식으로 해당 장면을 찍었다. 한마디로, 이 장면은 분명 과거의 참상이 담긴 '그 영상'을 재현한다.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영상을 소재로 차용한 다음 영화의 일부로 재현한 것이다.
이 짧은 장면 하나로 <교섭>은 영화의 윤리를 벗어났다. 선을 넘었다. 안타깝게도 내게는 이 장면이 비윤리적이라는 당연한 소리를 새삼 그럴듯하게 설명할 재주가 없다. 이 장면은 실제 영상의 많은 부분을 따라 하며 잊힌 이미지를 관객의 머리에서 되살린다. 그러면서 그 영상의 폭력성을 되풀이하고 있다. 잊혀야 하는 영상 앞에서 침묵해야 되는 것은 사람뿐만이 아니다. 영화도 같은 의무를 진다.
통상 영화에서 '재현의 윤리'를 말할 때에는 장면이 재현되는 방식을 논평한다. 폭력을 재현하는 방식이나, 범죄를 재현하는 방식 등. 그런데 이 장면은 그런 논의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것은 재현하는 '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소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재현하느냐를 떠나, 애초에 재현해서는 안 되는 것을 다루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장면을 연출한 이유를 이해해보려고 했다. 윤리적 위험에도 불구하고 비판을 감수하면서까지 이 장면을 넣어야 했던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규율을 어기는 것을 감수해서라도 어떤 효과를 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맥락을 살펴보았다. 이 장면은 박대식이 중동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활용된다. 그런데 그의 전사(前史)가 이 영화에서 꼭 필요한 것일까. 혹은 반드시 이러한 방식으로 등장해야 했던 것일까. 안타깝게도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리고 그 장면의 뒤로 탄탄한 몸을 물로 씻는 박대식의 샤워 장면이 붙는다. 이것은 보통의 영화에서 한 인물이 과거를 회상할 때 흔히 나오는 연출이지만, 이 장면의 무거움을 생각할 때 지나치게 무신경한 연출이다. 영화가 스스로에게 가해질 비판을 예상하고 결연한 마음으로 그 장면을 연출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이 장면은 두 번 나의 머리를 친다. 잊혀야 하는 영상을 재현함으로써 관객의 머리에서 과거의 이미지를 되살려 폭력을 되풀이한다는 측면에서 한 번. 이토록 중요한 장면을 스토리를 진행시키는 재료로 적당히 활용하기 위해 썼다는, 그 무신경함에서 또 한 번. 두 번의 안타까움. 결국 그 영상은 재현되어서는 안 됐고, 이런 맥락과 방식으로는 더더욱 그렇다. <교섭>을 기점으로 이제 내게 임순례는 이전의 임순례가 아니다.
우리 일상은 매일 (우리 의도와는 상관없이) 영화로 빠르게 바뀌어가고 있다. 우리 인생의 많은 순간들이 자꾸만 영상으로 탈바꿈한다. 찍고 보는 일의 윤리가 어느 때보다 중요해진 시점이다. 그리고 나는 경계를 모르는 영화를 대면할 자신이 없다. 내게 영화에 대한 애정은 그것이 윤리의 선을 지키고 서 있을 때에 비로소 허락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는다. 영화는, 우리는 어디까지 찍고 볼 수 있을까. 겸허해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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