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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홍수정 Jan 24. 2023

볼 거 없어 민망한 설 연휴 극장가

설 연휴 극장가는 중량감 있는 작품들이 격돌하며 대목 경쟁을 벌일 것으로 예상돼 왔다. 혹은 나 혼자 그렇게 기대했을 수도.


한국 영화 <유령>과 <교섭>이 같은 날 개봉하며 맞붙고, 지난 연말 개봉해 이제 관객수 천만을 달려가는 <아바타: 물의 길>, 비슷한 시기 개봉해 여전히 상영 중인 뮤지컬 영화 <영웅>, 거기다 의외의 선전을 보여주는 <더 퍼스트 슬램덩크>와 <장화신은 고양이: 끝내주는 모험>까지. 기대를 품어 볼만한 라인업이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소문만 무성하고 먹을 것은 별로 없는 잔칫집 밥상을 보는 듯하다. 게다가 한국 영화들만 모아놓고 보면 상황은 더 착잡하다.


<유령> 스틸컷

#예쁜 비주얼 외에는 기대 이하, <유령>

화려한 캐스팅을 자랑하며 "분위기 미쳤다"고 홍보해 온 <유령>은 분위기를 제외한 '스토리'나 '연출'이 엉성하다. 영화를 보며 지속적으로 드는 의심은 '경성 시대를 배경으로 예쁜 여자들이 서로 우정과 애정을 나누다가 총도 빵빵 쏘는 액션 영화'를 만들고 싶어 그에 걸맞은 스토리를 적당히 찾은 것 같다는 것이다(그런 의도가 아니겠으나 그렇게 느껴질 정도로 비주얼을 제외한 부분들이 부족하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정체성은 시대극보다는 여성 액션 영화에 가까워 보인다. 


비주얼은 화려하지만 설정과 캐릭터는 치밀하지 못한 탓에, 이쁜 세트장에서 인형 놀이를 하고 있는 듯한 느낌도 든다. 설경구, 박해수 같이 연기 잘하는 배우들 조차 약간 부자연스럽다. 


확실히 분위기는 이쁘지만 나머지 결점을 다 덮을 정도로 탁월하지 못하다. 앙상한 스토리에 화려한 비주얼로 밀고 가면서 "워 어쩌라고, 솔직히 이쁘잖아?"라고 말하는 듯한 뻔뻔한 영화들을 사실 나는 좋아한다. 그런데 그런 태도는 진짜 이쁜 영화들이 보여야 재미있는 것이다. <유령>은 거기 미치지 못한다.


그래도 박소담의 매력과 연기를 새삼 느끼게 된 것은 좋았다. 앙칼지게, 때로 진지하게 대사를 내뱉을 때 쾌감이 있다. 박소담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젊고 힙한 동시에 어딘가 세상사에 초연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기생충>에서도 잡범에 불과한 가족들 사이에서 홀로 빛이 난다. 타고난 아우라인 것 같은데, 참 귀하다.


<교섭> 스틸컷

#매끈한 만듦새, 실종된 윤리 <교섭>

<교섭>은 뭐라 흠잡기 어려울 정도로 적당히 매끈한 작품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진짜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윤리에 있다. "논쟁적 소재를 끌어들이면서도 애써 논란을 배제하려 한다"는 이동진의 평에 동의하지만, 그런 중립성 혹은 비겁함은 사실 이 영화의 결정적인 문제가 아니다. 모든 영화가 끝까지 가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 내가 결정적으로 이 영화가 '윤리의 선을 넘었다'고 느낀 부분은 따로 있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며칠 후에 PD저널을 통해 올리는 글에서 자세하게 다룰 계획이다. <교섭>으로 이제 내게 임순례는 이전의 임순례가 아니다. 

윤리를 제외하고 보아도, 정치적인 위험을 이리저리 피하며 그 스펙터클만을 취하는 안전하고 무난한 작품에 머물고 있다.

 

<아바타: 물의 길>(왼쪽)과 <영웅>(오른쪽) 스틸컷

#전시회를 가는 느낌으로 <아바타: 물의 길>, 뮤지컬 보는 기분으로 <영웅>

<아바타: 물의 길>에 대한 이야기를 이제 와서 새삼 더 할 이유는 없다. 이 영화는 단순히 작품성만으로 평가하기 어려운데, 제작과 상영 자체가 하나의 의미 있는 기획이기 때문이다. 제임스 카메론이 밝혔듯 어마어마한 자본이 들어갔으며, 이런 기획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다. 그런 면에서 영화 상영보다는 기획 전시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나는 작품만을 본다면 <아바타: 물의 길>이 관람을 추천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영화관에서 이 작품을 보기를 권한다. 우리 시대의 영화 기술이 어디까지 발전했는지를 목격할 수 있는 기회이므로. 희귀한 전시회에 참여한다는 생각으로 볼 만한 작품이다. 


뮤지컬 영화 <영웅>은 아바타보다도 할 말이 많지 않다. 지난 대담 때 홍보에 전력을 기울이면 손익분기점인 350만에 맞출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는데, 현재 290만이 든 것을 보면 착잡하기도 하고. 이제와 말하지만 <영웅>은 한 마디로 영화로서의 매력이 적은 영화다. 유튜브 클립을 보지 않고, 굳이 극장을 찾아 이 영화를 보아야 하는 이유가 많지 않다. 이전과 같이 스타 배우, 신파 등 '천만 영화'의 요건을 갖추었다고 관객수가 적당히 들어주던 호시절은 끝났다. 천만 영화 시대가 저물고 있음을 <영웅>을 보며 더욱 명확하게 느낀다.


<정이> 스틸컷

#의외의 놀랑움 <정이>

의외의 놀라움을 준 것은 넷플릭스의 <정이>였다. 연상호 감독의 작품은, 그의 전작들이 갖는 소재의 무거움에도 불구하고, 대중적으로 소비된다. 그 이유는 무겁되 어렵지 않고, 매번 '가족애'와 같은 보편적인 정서를 영화의 한 축으로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이번 작품에서 그는 AI 시대의 기술과 윤리에 대해 말한다. 그런데 '감정이 있는 AI는 사람인가 기계인가?

'와 같은 적당한 주제를 고민하는 선에서 마무리 지을 줄 알았던 영화가 의외의 지점까지 나아갔다. 막판에 보이는 관점의 전환이 신선하다. 연출의 측면에서 발전된 부분은 딱히 없다. 하지만 서사의 측면에서 이 작품은 한 단계 도약했다. 여태 안전한 지점에서 멈춰 온 연상호의 필모를 고려한다면 말이다.  


#다음 세대의 실종

설 연휴에 대단한 걸 바라지는 않았으나(사실 여태 대단한 작품들이 격돌한 연휴도 딱히 없었지만), 지금의 앙상한 극장가가 한국 영화계에 대한 예고편으로 보여 착잡한 심정이다.  


요즘 한국 영화계는 (독립 영화계를 제외하고 보자면) 철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 거장들의 영화와, 연상호처럼 OTT에 새 둥지를 튼 이들이 내놓는 자본력 빵빵한 기획 영화, 흥행을 노리고 감독의 색깔마저 지운 채로 특색 없이 만들었다가 관객의 외면을 받은 '실패한 천만 영화'와, 여타의 놀랍지 않은 영화들로 나뉘는 것 같다. 


박찬욱, 홍상수, 봉준호를 이을 다음 주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은 이제 배부른 소리가 됐다. 다음 주자는 고사하고 다음 세대조차 보이지 않는다. 새로운 감성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선보이는 새로운 세대가 없다. 거장의 영화와, 상품이 된 영화, 상품이 되는 데 실패한 영화가 대부분이다. 이런 앙상함이 어떤 결과를 몰고 올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한국 영화계는 아마도 지금의 위상을 이어나가기 힘들 것이다. 이런 예측이 깨어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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