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복순>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논란들 때문에 영화로서 <길복순>에 대한 평가가 활기를 잃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길복순>은 그 자체로 얘깃거리가 있는 작품이다. 이것저것 조합한 듯한 스타일이 지루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건 최근 액션 장르물의 공통점이기도 하고. 여기서는 영화와 감독으로서 <길복순>과 변성현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해보려고 한다.
이전 작품부터 꾸준히 느꼈는데 변성현은 남성 감독인데도 여성의 감수성이 있다. 그의 영화들은 소재는 남성향인데 감성은 여성향이다. 이것이 변성현의 재밌는 점이다. 감옥, 살인, 섹스, 그는 마초들이 술자리에서 걸쭉하게 풀어놓을 법한 소재를 들고 와서는 의외의 여성 감수성을 드러내고는 한다. 오해를 막기 위해 언급하자면 이것은 남성인 변성현에게 여성적인 면모가 보인다거나, 남초/여초 커뮤니티에서 좋아할 법한 소재를 들고 온다는 뜻이 아니다. 변성현의 영화적 세계 안에 남성적인 감성과 여성적인 감성이 혼재한다는 의미이다. 이것들은 서로 녹아들지 않은 채로 뒤섞여 있다. 이런 특성이 앞으로 어떻게 성장하며 그의 영화적 세계를 형성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변성현이 한 번쯤 이런 점을 제대로 풀어놓았으면 한다. 그의 안에 있는 다양한 감수성을.
여태까지 그의 필모를 보면 액션이든, 코미디든 장르성이 강한 작품이 많다. 장르물이 어느 정도의 흥행을 담보하기도 하고,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으로 사랑받았던 터라 앞으로도 그가 장르물을 외면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는 장르물을 그럭저럭 잘 다룰 뿐 이 방면에 특출 나지는 않다. 그의 진정한 강점은 감성이다. 장르물은 이것을 담아내는 가성비 좋은 그릇이었을 따름이다(그리고 나는 그가 어쩐지 익숙한 장르물을 반복하며 무언가 회피하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갈 수는 없는 일. 변성현은 한 번쯤 자기가 가진 감성을 대면하고 지독하게 앓을 정도로 키운 다음에 그것을 중심에 둔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 캐릭터의 감정이 중심이 되는 영화. 예를 들어 나는 그가 연출하는 멜로 드라마가 궁금하다.
다시 <길복순>으로 돌아오자면, 이 작품에서도 돋보이는 것은 그의 독특한 감성에서 뻗어 나오는 것들이다. 특히 인물들 간의 관계성이 눈에 띈다. 변성현은 확실히 관계성의 장인이거나 변태다. 이 작품에서는 여성들 간의 관계가 풍성하다. 항간에 거론되는 동성애 부분은 눈길을 가져가지만 크게 흥미롭지 않다. 길복순(전도연)과 그의 딸 사이가 가장 흥미롭다. 친구도, 선후배도, 갑을도, 모녀 관계도 아닌 그 사이 어디쯤에 있는 관계. 길복순과 인턴(이연) 간의 관계도 흥미로운데, 길복순은 그녀를 후배 이상으로 애틋하게 생각하지만, 완전한 애정을 주지도 않기 때문이다. 관계의 다면성을 잡아내는 작품이야 많다. 중요한 것은 관계 사이의 거리다. 그 애매한 거리감을 제대로 설정해야 마음이 간질간질하고 애가 타는 법인데, 변성현은 두 인물 사이의 요상한 거리를 잡아내는 실력이 좋다. 길복순과 차민규(설경구), 한희성(구교환) 사이의 관계성도 나쁘지 않다.
그런데 써놓고 보니 맛있는 관계성은 결국 전도연의 연기에서 나오는 것 같기도 하다. 특히 두 명의 캐릭터가 일대 일의 관계를 맺을 때, 그 관계를 그려내는 전도연의 연기는 무시무시하다. 예를 들어 딸의 말을 듣고서 그녀를 한참 동안 물끄럼히 쳐다볼 때, 그녀의 흔들리는 눈빛은 이 관계에 깊숙한 홈을 파내고 무수한 결을 새겨 넣는다. 그런 점에서 전도연이라는 배우는 여전히 우리에게 대체불가하다.
재밌는 것은 그녀가 섬세하게 연기하는 관계가 점차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보다 젊었던 때 그녀는 남녀 간의 이성적인 관계를 특히나 잘 살려냈는데(<멋진 하루>, <남과 여> 등), 이번에 <길복순>을 보니 어린 여성을 상대로 모성애를 드러내는 역할을 너무 잘 소화하더라고. 좋은 배우가 세월과 함께 성숙하며 자신의 나이에 맞춰 변화하는 연기 스펙트럼을 펼쳐내니 보기에 기꺼웠다. 그녀는 여러모로 보는 이를 행복하게 하는 배우다.
<길복순>의 액션 시퀀스에는 시간을 되돌리는 연출이 나오는데, 길복순의 천재성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활용된다. 이런 연출을 하는 영화가 없진 않으나 재밌었다. 그런데 <길복순>은 순간순간의 연출이 재밌기는 한데 때때로 과해서 유치할 때가 있다. 보여주겠다는 의욕이 지나치면 촌스러워진다. 또 위에 언급한 전도연의 연기가 훌륭한 것과 별개로 액션 자체는 어찌 보면 육체적인 활동이라, 그녀가 특출 나게 잘 소화한다는 느낌은 없었다. 액션 자체의 쾌감이 떨어지니 영화 전체가 루즈해진다. 이것은 연출의 문제이기도 하다. 전체적으로 변성현은 '스타일리시'에 대한 관심을 내려놓고 본질에 집중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다음 작품에서는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