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진' 희생으로 완성된 해피엔딩 신뢰하기 어려운 이유
※ 'PD저널'에 기고한 글입니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PD저널=홍수정 영화평론가] 미리 말하고 시작하겠다. 나는 <스즈메의 문단속>에 동의할 수 없다. 여기에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묵직한 모순이 있다. 물론 영화를 향한 상찬에는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부분들도 있다. 동일본 대지진의 상흔을 쓰다듬고, 폐허가 되어버린 공간을 그곳에 녹아있던 기억으로 위무하려는 시도는 애틋하다.
그러나 솔직히 이런 애틋함은 낯설지 않다. 일상으로 재앙에 맞서려는 태도도 어여쁘되 낯익다. <너의 이름은>에서 타임 슬립과 '기억'에 대한 테마를 제시하고, 그것을 재난과 구원에 대한 이야기로 유려하게 풀어낸 신카이 마코토. 그로부터 이다지도 낯익은 감동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의 풍광, 천재지변, 그리고 의식의 너머를 그려내는 작화는 눈이 부시다. 특히 도심의 맑은 하늘 위로 솟구치는 붉은 기둥 '미미즈'의 형상이 스크린에 퍼져나가는 것을 보는 경험은 황홀했다. 여기까지였다면 나는 <스즈메의 문단속>을 그럭저럭 무난하게 평가했을 것이다. 전작에 비해 탁월하지 않고 아쉬움도 남지만 자신만의 매력을 지닌 작품이라고.
그러나 이런 생각은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뒤집혔다. <스즈메의 문단속>에는 한가지 가슴 아픈 아이러니가 하나 등장한다(여기서부터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나오니 영화를 관람하지 않았다면 유의해 주기를 바란다). 세계의 구원과 스즈메(하라 나노카)의 사랑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영화는 지극히 개인적인 관계와 세계의 운명을 연결 짓는 '세카이계' 작품 답게, 스즈메가 좋아하는 소타(마츠무라 호쿠토)에게 구원자의 역할을 맡긴다. 이제 소타는 꼼짝없이 요석이 되어, 대재앙을 막기 위한 재물로서 투신하여야 할 운명이다. 애니메이션이 한 단계 도약하는 순간은 바로 이런 때일 것이다. 그것이 삶의 진리와 만나는 순간. 때로 선의를 가지고 대의에 투신하는 숭고한 인간이 개인적인 행복마저 놓아버려야 할 때가 있다.
세상을 구원하려는 노력이 보상이 아닌 더 큰 희생으로 이어지는 아픈 아이러니. 홀로 병상에 누운 소타의 할아버지처럼, 끝내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외로운 희생을 짊어져야 하는 것이 구원자의 고난일 것이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이런 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꿋꿋하게 체화해낸다.
소타는 고뇌하지만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스즈메를 마지막까지 괴롭히는 사실이 있었으니, 이런 결말을 불러온 게 그녀 자신이라는 점이다. 작은 실수가 좋아하는 남자의 운명을 바꾸었다. 그녀는 소타를 구하기 위해 위험한 세계로 향한다. 이 장면이 영화의 가장 극적인 순간이다. 세계의 구원과 개인의 사랑 가운데서 갈등하던 스즈메는 전자를 택하지만 후자도 포기하지 않고, 이제 스스로를 던져 사랑을 구원하는 순간으로 나아간다. 그녀가 자주 외친 "두렵지 않다"는 말은 돌고 돌아서 이 순간과 연결된다.
결국 소타를 구해내는 스즈메. 하지만 이제 그를 대신해 누군가 요석의 자리를 메워야 할 때다. 스즈메를 향해 운명이 물어온다. 모든 것을 이룬 너는 이제 무엇을 내놓을 거지? 이것은 스토리를 넘어서 보는 이의 가치관을 건드리는 모멘텀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중요한 순간에 영화가 내놓은 답은 의외다. 소타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다름 아닌 고양이 '다이진'이다. 그는 스즈메의 사랑을 얻을 수 없음을 깨닫고 체념했다는 듯, 혹은 끝까지 스즈메를 도와주겠다는 듯 요석이 되기를 자처한다. 언뜻 보아 아름다운 이 선택은 편의적이고 잔인하다. 비록 실수라 해도 스즈메는 자신의 손으로 다이진을 풀어주었고, 그 자리의 숙명은 소타가 물려받았다.
만일 소타를 구원하고 싶다면 요석의 자리를 물려받는 것은 그런 결정을 내린 스즈메여야 하지 않을까. 오해를 막기 위해 강조하자면, 나는 스즈메가 요석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누구든 결단을 내린 자가 결과를 감내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야만 이 세계의 윤리는 무너지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차마 스즈메의 불행을 보지 못하겠다는 듯 다이진을 그 자리에 밀어 넣고 서둘러 자리를 뜬다. 우리는 이런 결말을 의심 없이 받아들여도 좋은가.
생각해보자면 이 영화가 다이진을 대하는 태도는 처음부터 조금 수상하다. 일관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 등장했을 때 다이진은 깜찍하다. 그래서 스즈메는 저항 없이 그것을 대하고, 비로소 모험이 시작된다. 다시 나타난 다이진은 재앙이 발생하는 곳마다 출몰하기 때문에 스즈메는 그가 재앙을 불러온다고 믿는다. 이런 믿음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다. 영화가 다이진의 개구진 모습을 보여주며 그런 의심을 유도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다이진은 영화에 필수적인 빌런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마지막에 이르러 다이진의 극단적인 선택은 스즈메와 소타의 해피엔딩을 가능케 한다. 깜찍했다가, 빌런도 됐다가, 결국 스즈메가 감당해야 할 아이러니까지 짊어지는 다이진의 어깨가 지나치게 무거워 보인다. 그는 시시각각 영화의 필요에 맞춰 편의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소타가 그리도 괴로워하던 요석의 역할을 다이진이 자처하는 상황은 (사랑에 실패했다는 좌절감을 고려해도) 받아들이기 힘들다.
이런 선택이 이해되는 상황은 단 하나다. 영화가 바라는 결말, 스즈메와 소타 누구도 희생되지 않고 해피엔딩을 맞는 결말을 위해 다이진을 희생시키는 상황. 그래서 나는 수상한 희생 위에 얻어진 이 영화의 해피엔딩을 신뢰하기 어렵다.
<스즈메의 문단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참사의 자리에서 잊혀가는 목소리들을 스즈메가 안간힘을 다해 불러내는 순간이다. 그것은 작고 평범한 존재들의 흔적이 재앙을 막을 정도로 귀하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영화는 과연 스스로 강조했듯이 모두를 귀하게 대하고 있는가. 마음에 드는 결말을 예비하기 위해 캐릭터를 희생시키는 영화의 선택은, 희생자의 고통을 보듬는 아름다운 장면들과 어울리지 않는다. 이름 모를 목소리의 소중함을 역설하면서 캐릭터를 침묵시키는 태도는 모순적이다. 그래서 무수히 아름다운 장면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스즈메의 문단속>에 끝내 동의할 수 없다.
출처 : PD저널(http://www.pd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748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