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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홍수정 Mar 28. 2023

<이니셰린의 밴시>, 달라진 점과 여전한 것들

<이니셰린의 밴시> 스틸컷


※ <이니셰린의 밴시>의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마틴 맥도나의 <이니셰린의 밴시>은 언뜻 보았을 때 그의 전작들과 차이가 있다. 

전작인 <킬러들의 도시>(2009), <세븐 싸이코패스>(2014), <쓰리 빌보드>(2018)는 기본적으로 <이니셰린의 밴시>보다 훨씬 자극적이다. 누군가 죽고 심각하게 다친다. 킬러들은 마치 주먹다짐을 하듯 수시로 총을 갈긴다. 스크린에 피가 흥건하다. 


그에 비하면 <이니셰린의 밴시>는 폭력의 강도가 약하다. 아일랜드의 어느 작은 섬마을에서 벌어지는 일인 만큼 고요하고 아기자기하다.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최대의 갈등이 살인이나 방화가 아니라 고작 '절교'라니. 왜 이래, 마틴 맥도나 맞아? 이전과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니셰린의 밴시> 스틸컷

하지만 톤다운이 되었을 뿐,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틴 맥도나의 인장은 선명하다. 

그는 영화의 바닥에 언제나 '차별'이라는 카펫을 깔아 둔다. 그래서 맨발로 영화를 밟고 지나가기에 어딘가 서늘하고 까끌하다. 성별, 인종에 대한 차별은 이제 인간을 구획 지어 나누고 분리하는 수준으로 나아간다.   


콜름(브랜던 글리슨)은 파우릭(콜린 패럴)이 지루해서 싫다. '지루하다'고 순화해서 표현하지만 실은 멍청하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콜름은 그런 파우릭의 태도에 대해 "못됐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자신과 종종 시간을 같이 보내는 도미닉(배리 키오건)이 자신보다 멍청하다고 생각해 무시한다. 도미닉과 그의 여동생은 당나귀를 키운다. 도미닉은 당나귀를 방에 들이고 싶어 하지만, 여동생은 "동물은 집 밖에 두어야 한다"며 강하게 반대한다. 가여운 당나귀는 몰래 집에 들어왔다가 금세 쫓겨나고는 한다.


당나귀는 이 영화에서 차별받는 인간의 형상을 압축적으로 포착한다. 한 공간에 살고 있지만 특정한 능력은 떨어지는 생명체. 귀여워하며 배려해 주지만 동등하게 취급하지 않는. 마틴 맥도나는 물리적인 폭력을 줄였을 뿐 실은 더 못되어지고 독해졌다. 그의 영화 데뷔작인 <킬러들의 도시>에서는 여러 사람이 죽고 내내 총성이 난무하지만, 사회 속에 악취처럼 은밀하게 퍼져있는 차별의 공기를 이토록 독하게 냉소하지는 않았다. 당나귀라니. <이니셰린의 밴시>에서 관계의 단절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공기 중에 독처럼 퍼져있는 차별이다. 그래서 영화 내내 싸우는 것은 파우릭과 콜름이지만, 결국 마지막에 목숨을 잃는 것은 가장 무시받던 이들이다. 도미닉과 당나귀. 이들은 보이지 않는 차별의 독에 중독되어 사망하고 만다. 


<이니셰린의 밴시> 스틸컷

전작에 비해 고요하고 차가워진 <이니셰린의 밴시>에는 마틴 맥도나 세계관의 원형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살인과 폭력이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는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우정과 동물이다. 죽음과 고통은 흔하고, 피할 수 없다. 대수롭지 않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가치가 있는 것은 '함께하는 것, 그리고 누군가에게 다정하게 대하는 것(niceness)'이다. 그래서 가장 큰 고통은 다름 아닌 단절에서 온다. 누군가와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은 가장 큰 불행이며, 인물들은 그것을 피하고자 할 수 있는 모든 최선을 다한다.


마틴 맥도나가 어떤 인생을 살아오며 이토록 차가운 세계를 구축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왠지 그가 보는 세상에 마음이 간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보는 세계와도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때때로 다가오는 고통을 아무렇지 않게 넘기면서도 친절함에는 목숨 거는 인간들. 이 아둔한 인간들 옆에 서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마틴 맥도나와 <이니셰린의 밴시>에 대한 더 자세하고 깊은 이야기는 <씨네21> 1399호 비평 지면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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