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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홍수정 Jul 04. 2023

한층 과감해진 멀티버스, '스파이더맨'에 보내는 찬사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의 멀티버스가 남다른 이유

※ PD저널에 기고한 글입니다(원문 하단)

※ 영화에 대한 스포일링이 있습니다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스틸컷


[PD저널= 홍수정 영화평론가] 6월 여름, 극장가는 뜨겁고 즐겁다. 디즈니·픽사의 화사한 애니메이션 <엘리멘탈>을 선두로 15년 만에 돌아온 해리슨 포드의 <인디아나 존스: 운명의 다이얼>, 전작의 흥행을 이어가는 <범죄도시3>까지. 여기 DC 스튜디오의 히어로물 <플래시>와 웨스 앤더슨의 신작 <애스터로이드 시티>도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이 모두를 조용하고 과감하게 압도하는 작품이 있다. 6월 극장가로 한정해 평가하기 미안해진다. 나의 관심과 이목을 온통 앗아간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이하 <스파이더맨>)를 보며 나는 올해의 작품을 목격하고 있음을 느꼈다.


<스파이더맨>은 애니메이션의 매혹으로 승부를 보고 완승을 거두는 영화다. 놀랍도록 아름다운 색색의 작화. 아주 적절한 정도로만, 딱 그 정도로만 역동적인 절묘한 리듬감. 어쩌면 그것이 이 영화의 전부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에 대한 설명은 다른 전문가에게 맡기고 싶다. 다만 나는 최근에 너무 많은 영화들이 편의적으로 소모하는 '멀티버스'를 토대로 <스파이더맨>이 이끌어내는 깊은 이야기와, 그것을 이미지로 구현하는 연출에 대해 말하고 싶어진다.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아니, 일어나야만 한다. 어떤 우주에 있더라도. 그렇지 않으면 그 우주는 파괴되고 만다. <스파이더맨>은 이렇게 일어나고야 마는, 혹은 일어나야만 하는 일들을 '공식설정 사건(Canon event)'이라고 부른다. 멀티버스의 스파이더맨들이 공유하는 필연적인 사건들을 말한다. 방사능 거미에게 물리고, 소중한 이를 잃는 것과 같이 스파이더맨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건들 말이다. 기타를 치고, 결혼을 하는 경험들은 일어나도 되고 안 일어나도 된다. 그것은 스파이더맨의 개성을 빚어낼 따름이다. 그러나 공식설정 사건은 스파이더맨의 존재 여부를 결정짓는다. 스파이더맨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 경계선을 긋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식설정 사건이 스파이더맨을 창조한다.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스틸컷


공식설정 사건은 행복인 동시에 고통이다. 모든 우주의 스파이더맨들은 반드시 사랑하는 사람을 사고로 잃는다는 것을 알고 난 뒤, 이들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는다. 하지만 이 괴로운 경험을 관통하지 않은 자는 아무리 훌륭한 히어로라 하더라도 스파이더맨이 될 수 없다. 이 아픈 진리는 우리 모두에게로 확대된다. 처음 마주쳤을 때, 불행은 어떻게든 피하고픈 뜨거운 재앙이다. 하지만 한소끔 끓어오른 열기가 식고 나면 타고 난 자리에 남은 재가 삶의 발자취가 된다. 보드라운 살과 흉터가 얽어진 모양이 피부에 결을 만든다. 즐거움과 고통으로 지나온 시간이 우리를 우리답게 만든다고 나는 믿는다.


<스파이더맨>은 이런 보편적인 진리를 보편적이지 않은 이미지로 구현한다. 그래서 특별하다. 이 영화를 보는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는, 여러 우주의 스파이더맨을 표현하는 다채로운 작화를 보는 일이다. 코믹스에 기반한 마일스 모랄레스, 보다 유연하고 부드러운 그웬 스테이시, 누군가 갈긴 낙서 같기도 한 스파이더 펑크까지. 서로 다른 만화라고 해도 믿을 만큼 차이가 나는 작화를 하나로 관통하는 것은 스파이더맨의 특질이다. 스파이더맨을 상징하는 붉은 색감과 거미줄의 문양. 그 색과 줄 덕분에 이들은 마치 하나의 팀처럼 보인다. 조금의 색감도 없이 하얗고 까만 문양만을 입은 스팟의 모습은 이들과 대비를 이룬다.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스틸컷


그렇지만 <스파이더맨>은 여러 스파이더맨 간의 안온한 화합을 보여주는 영화는 아니다. 아니, 오히려 이 영화는 반대로 간다. 그간 영화가 소환하는 '멀티버스'에 사람들이 염증을 느낀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이 방대한 스토리와 수습 불가능한 설정들을 간단히 무시하고, 영화 전체를 리부팅(rebooting)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파이더맨>은 다르다. 이 영화는 자아 간의 합일이 아니라 오히려 스파이더맨의 고독을 말하기 위해 멀티버스의 문을 연다. 스파이더맨은 자주 외로웠고, 한때 다중우주 속 다른 스파이더맨으로 외로움을 달랬으나, 다시 혼자임을 절감한다. 적당히 유희적인 태도로 멀티버스를 대하는 다른 영화와 달리, <스파이더맨>은 그것으로 인한 혼란과 한계를 직시한다. 이런 면은 특히 영화의 마지막, 모두의 추적을 따돌리고 도망치는 마일스 모랄레스에 관한 환상적인 시퀀스에서 구체화된다. '멀티버스'라는 소재의 한계를 피하지 않고 대면한 다음, 그것을 정체성에 대한 물음으로 흡수하는 <스파이더맨>의 과감함이 이 작품의 특별함을 직조한다.


어쩌면 <스파이더맨>이 끝내 보여주고 싶은 것은 삶의 역설인지도 모르겠다. 피하고픈 불행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그것이 없는 나는 내가 아니라는 역설. 그것을 짊어진 자의 고독감은 내가 아닌 이상 아무도 모를 것이다. 바로 그때 다중 우주의 문이 열리고, 그 외로움을 알아줄 무수한 '나'들이 등장했다. 잠깐, 너무 많이 등장했다. 수많은 '나' 사이에 둘러싸인 스파이더맨은 그럼에도 끝내 외로울 수밖에 없는 인생의 역설을 깨닫게 된다. 돌고 도는 아이러니와 그것을 둘러싼 가공할 만한 이미지를 품에 안고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우리와 만났다. 이런 만남이야말로 역설적인 삶의 길을 걷는 외로운 여행자를 달래주는 축복일 것이다. 이 순간을 즐기라는 말밖에 더할 말이 없다.


원문 : http://www.pd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75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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