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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홍수정 Sep 02. 2023

<오펜하이머>에 거부감을 느끼는 이유

'죽음의 신'이 선사하는 비애감에 취해

최근 'PD저널'에 <오펜하이머>에 대한 글을 기고했다. 곧 올라올 예정이다. 투고 후에는 늘 하루이틀 정도 조마조마한 감정에 시달린다. 사람들이 어떻게 읽을까. 설득이 될까. 잘 썼다고 느낄까.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 마음. 투고한 글에 미처 넣지 못한 내용이 있어 썼다.


※스포일러 있음

<오펜하이머> 스틸컷

  

기고글에도 썼지만 사실 <오펜하이머>는 정치적인 영화다. 영화는 한 명의 과학자를 '신'의 위치로 끌어올린다. 처음 시작될 때 언급되는 프로메테우스에 대한 신화. 오펜하이머를 '죽음의 신'처럼 묘사하는 장면들. 원자폭탄을 제외하고도, 오펜하이머는 자주 죽음의 언저리를 맴돈다. 여기 더해 그의 천재성과 불행한 인생사가 그를 일반적인 인간과 다른 특별한 존재로 보이게 한다.


이 자체만으로도 고민되는 지점이 있다. 이것은 실존인물에 대한 영화고, 그는 여러 사람이 희생된 핵공격에 연루된 인물이다. 그런 인물을 신과 같이 묘사해도 괜찮은가. 실제로 그가 천재적이라는 것과 별개로, 영화가 그의 신적인 면모에 동조하고 취해도 괜찮은가. 나는 이에 대한 답을 고민하는 중이다.


그러나 내가 결정적으로 이 영화에 거부감을 느낀 이유는 따로 있다. <오펜하이머>는 위에서 말한 '죽음의 신'이 주는 비애감에 취해있다. 그가 과학자로서 내린 선택과, 그 과정에서 한 실질적인 고민, 그럼에도 벌어진 비극에 어느정도로 책임을 느끼는지 차갑게 돌아보는 영화가 아니다. 오펜하이머의 탁월한 재능은 그를 높은곳으로 이끌고, 희생자의 고통은 그에게 깊고 어두운 아우라를 덧씌운다. 심지어 연인의 죽음조차 그의 고통을 구성하는 땔감으로 감상적으로 소진된다. 이렇게 현대사에서 중요한 한 과학자는, 운명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죽음의 신으로 산화한 비운의 존재가 된다. 스스로 만든 신을 동경과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는 이 영화의 태도는 수상하다.


일일이 언급하지 않아도 <오펜하이머>는 많은 것을 성취한 영화다. 이런 대작을 기획하고 완성하는 일의 어려움을 어렴풋이 짐작할 따름이다. 그러나 마치 눈부신 저택에서 은근히 풍겨오는 악취처럼, 영화의 전반을 덮은 그 비애감은 역하다. 거기 심취해 비틀거리는 영화도 마찬가지다.



+


여러분 안녕하세요 :D


제글이 이렇게 많은 주목을 받을 줄은 예상 못했는데 보내주신 의견들 감사합니다. 많이 지적하셨듯 위에 글은 각 잡고 치밀하게 쓴 비평이 아니라 저의 감상에 관해 편하게 쓴 짧은 글이 맞아요. 브런치 블로그는 저의 개인적인 공간이라 여겨 기고하진 않지만 남겨두고 싶은 글을 올리고 있어요.


다만 많은 분의 지적대로 평론가의 이름으로 운영하는 블로그이니만큼 더 자세하게 썼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쁜 하루 중에 짬 내서 쓴 것인데, 부족한 글로 보여 불쾌하셨다면 죄송하고 저도 아쉽네요.


하지만 쉽게 여기거나 짧게 생각하고 쓰진 않았고, 과장하거나 냉소하려는 뜻도 없이 솔직하게 썼습니다. 누군가를 상처 주려고 쓴 글도 아니고요.


저도 평가하는 사람이라 제 글에 대한 생각과 의견은 달게 받겠습니다. 다만 글이 아닌 개인에 대한 모욕적인 표현은 상처가 될 수 있으니 조금 자제해 주다면 감사하겠고, 아니라면 그냥 시원하게 써주세요! 영화와 글에 대한 애정 계속 간직해 주시길 바라고 더 좋은 글로 뵙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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