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저널에 기고한 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그레타 거윅은 지금 할리우드에서 '여성 서사'를 잘 쓰는 대표적인 감독 중 하나다. 하지만 무겁지 않고 경쾌하다. 재기발랄하고 풋풋하지만, 진지함을 버리지 않는다. 사실 여성보다는 소녀의 이야기에 가깝다 할 것이다. 소설 원작의 <작은 아씨들>(2020), 소녀의 성장기를 다룬 <레이디 버드>(2018)까지. 아직 덜자란 여성이 좌충우돌하는 사랑스러운 세계를 그녀는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랬던 그녀가 신작 <바비>를 들고 왔다. 제목부터 의외다. 그레타 거윅은 완벽한 미를 표상해 온 '바비 인형'보다는 어딜 보아도 완벽하지 않은 여자들의 이야기를 해 왔으므로.
좋아하지 않은 소재를 전면에 내세운 작가의 내심이 무엇일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된다. 풍자. 한번 제대로 신명 나게 비꼬아 보겠다는 것이다. <바비>도 그 길을 간다. 그래서 자신의 삶을 전시하는 여성, 우월주의에 빠진 남성을 조준해 비튼다. 여태 짓궂은 유머를 가끔 선보였지만 가벼운 농담의 수준에 머물렀던 그레타 거윅에게 풍자는 하나의 도전이었으리라 짐작한다.
<바비>가 제대로 풍자하는 대상은 '가부장제'다. 영화에서는 '가부장제'로 번역되지만 남성우월주의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영화는 자신과 정서적으로 연결되어 연대할 수 있는 존재를 찾고 점차 성장하는 바비(마고 로비)와, 우월주의에 빠져 마을을 망가뜨리는 켄(라이언 고슬링)을 비교해 보여준다.
특히 바비 월드를 망가뜨리는 가부장제, 그것을 퍼뜨리는 켄에 대한 영화의 비꼬기는 가차 없다. 비록 적당히 귀엽게 연출되지만, 잠시나마 우위를 점했던 켄에게 영화는 마지막까지 애정을 주지 않는다. 대법관이 되고 싶다는 켄의 말에 "너희는 좀 낮은 직종만 할 수 있다"라고 답한 대법관 바비의 대답도 이런 태도를 보여준다. '켄'들은 바비의 주변부에 머물며 봉합 가능한 갈등을 불러왔다가 희화화되는 대상으로 소진된다.
풍자하고 웃는 태도는 문제가 없다. 문제는 그런 태도가 일관되게 유지되지 못할 때 발생한다. 전작에서 그랬듯이 <바비>에서도 몇 가지 신성불가침의 가치가 등장한다. 하나는 '모녀 관계'요, 다른 하나는 '어리고 서투른 여성의 성장'이다. 이런 소재 앞에서는 그레타 거윅도 농담을 던지지 않는다. 바비를 가지고 놀았던 엄마와 딸, 그들과 유사 모녀 관계를 맺는 바비의 사이는 (비록 약간 진통이 있더라도) 흔들림 없이 공고하다.
또 바비가 정체성에 혼란을 겪고 정서적으로 커가는 부분도 풍자가 끼어들지 않는 신성한 부분이다. 매번 감성적인 음악에 감동적인 내레이션으로 여성 성장 서사를 돌파하는 빈약한 연출력은 둘째치고, 이런 태도는 앞선 장면과 일관되지 않아 고개를 갸웃하게 한다.
풍자가 진정으로 의미 있으려면 그 날카로운 칼날이 어디에나 공평하게 향해야 한다. 스스로를 제외하는 풍자는 의미가 없다. 신랄한 말을 쏟아내며 깔깔거리는 사람은 스스로에 대해 같은 태도를 유지하지 못하면, 그저 남을 패기 좋아하는 불량배와 다름이 없다. 진정한 풍자는 남을 까던 기준으로 스스로를 깔 때 완성된다.
그런 점에서 <바비>의 태도는 아쉽다. 가부장제에 상처받고 독립하는 여성의 이야기는 숭고하게 대하지만, 성 반전된 켄의 이야기는 웃음거리로 소비하는 태도. 이것은 영화 전반의 설득력을 떨어뜨린다. 이런 태도가 그저 나쁘다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영화의 선택일 뿐.
하지만 어리게 느껴진다. 아직 미숙한 소녀의 폐쇄적인 공상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다. 귀엽긴 하지만 설득력 없는 태도. 이 순간 <바비>는 스스로 그렇게나 강조했던 '성장'으로부터 오히려 멀어진다. 여성 서사 영화, 혹은 복합적인 풍자 영화로 도약할 수 있었던 <바비>는 그렇게 자기중심적인 소녀의 세계에 갇혀 쪼그라들고 만다.
이런 지적이 어느 성별을 편드는 단순한 프레임으로 비치지 않기를 바란다. 하지만 설사 그렇게 된다 쳐도 평자로서 느낀 바를 솔직하게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여성/남성의 차원이 아니라 <바비>의 태도에 대해 말하고 싶다. 누군가의 꿈은 신성불가침이지만 누군가의 희망은 너무 쉽게 웃음거리로 소비되는 장면을 볼 때, 나는 한 명의 관객으로서 불쾌감을 느꼈다. 이런 풍자는 별로 재밌지 않다.
좀 다른 이야기지만 그레타 거윅이 남성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데 썩 재능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감독이 이성의 서사에 서투른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또 모든 연출자가 양성에 해박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남성적인 세계에만 몰두한 감독들을 무수히 보아오지 않았나.
다만 이럴 때는 다른 성별에 대한 이야기를 너무 깊게 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예를 들어 "어째서 누아르물에 여성 캐릭터가 없냐"는 비판에 여성 킬러를 등장시킬 수는 있다. 하지만 여성으로서 그녀의 삶과 아픔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게 나을 수 있다. 모르는 상태에서 하는 이야기는 쉽게 편견으로 번지니까.
그레타 거윅도 여성 서사를 전면에 내세우며 남성 캐릭터를 감초로 등장시켰던 전작의 연출이 좋았다. <레이디 버드>에서 한 번씩 등장해 허세를 부리던 카일(티모시 살라메)도 귀여웠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가부장제를 다루고, 그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남성 캐릭터의 이야기를 다루는 그레타 거윅의 연출력이 썩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리더로서 힘듦을 토로하며 우는 켄을 보고, 다른 켄들이 화이팅을 외치는 모습은 피상적이다(게다가 '우는 남성'의 이야기는 이미 <레이디 버드>에 나왔다). 서둘러 무성의하게 서사를 봉합한다는 인상이다.
여기에 풍자와 성장 서사를 둘러싼 일관되지 않은 태도까지 가미되니 영화가 좌초한다. <바비>는 그레타 거윅의 가장 화려한 영화일지 모르겠으나, 나는 이 작품에 이르러 더 이상 그녀의 연출력을 신뢰하지 않는다.
여성 서사도 보여주고 싶고, 현실에 대한 풍자도 하고 싶고. 여성 서사는 진지해야 하고, 풍자는 과감해야 하고. 양쪽 욕심 사이에서 <바비>는 길을 잃는다. 결국 이런 태도의 결과는 영화가 감당한다. 자기중심적인 소녀의 세계의 머무른 채로 문을 닫으며, 그렇게 <바비>는 절반의 절반을 위한 영화로 축소된다. 그레타 거윅의 <레이디 버드>를 무척이나 아꼈던 관객으로서는 안타까운 일이다.
출처 : PD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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