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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홍수정 Sep 23. 2023

고 변희봉 배우를 생각하며

흔히 원로 배우에 대한 찬사는 예우의 차원에서 나온 거라 여겨진다. 하지만 나이와 경력 그 모든 것을 떼고, 그러니까 계급장 떼고 제대로 붙어도 최고라고 느껴지는 배우들이 있다. 천재적인 연기의 김혜자, 맛깔스럽고 뭉근한 연기의 신구, 세련되고 미니멀리즘적인 윤여정. 이들의 연기는 그들이 원로 배우라는 점에 묻혀 오히려 과소평가되는 면이 있다. 그건 단순히 경력에서 우러나오는 노련함을 넘어, 타고난 재능과 오랜 시간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예술작품 같다. 이 만신전에서 또 한 명 빼놓을 수 없는 배우가 바로 변희봉이다.  


마치 노래처럼 운율을 타고 너울거리는 그의 대사는 중독성이 너무 커서 듣는 순간 뇌리에 박혀버린다. 웃을 때 가로로 길어지는 입매와, 놀랄 때 확장되는 눈매는 표현주의적인 영화에 제격이다. 그래서인가. 변희봉은 짓궂은 유머와 폭력, 페이소스가 뭉쳐진 봉준호의 영화에 유독 잘 어울렸다. 그가 나온 명장면을 모두 꼽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유독 생각나는 장면들이 있다.


영화 <괴물> 스틸컷

# 장면 1.

영화 <괴물>. 송강호더러 먼저 가라고 손짓하는 장면이 유명하지만, 나는 이 장면이 더욱 기억에 남는다.  영화의 초반, 매점 밖에서 대화를 나누는 변희봉과 송강호(편의상 이름은 배우의 실명으로 표시했다). 어딘가 모자라 보이는 아들 송강호에게 변희봉이 달래듯 살살 물어본다. 손님이 주문한 오징어의 다리 하나를 네가 떼먹었냐고.

방금 인마, 4번 돗자리에서 항의가 들어왔시야. 오징어 다리가 구개라고... 그거 한 개는 네가 떼먹어부렀냐?


이 장면에서 '오징어 다리를 송강호가 진짜 떼먹었는지'에 관한 하찮은 문제는 마치 괴물의 출현에 필적할 정도로 중요하게 느껴진다. 이 말도 안 되는 서스펜스를 변희봉은 나직한 말투와 진지한 표정으로 만들어낸다. 게다가 "떼먹어부렀냐?"라고 능청맞게 말을 흘리는 유머러스함. 이런 감각은 너무 절묘해서 뭐라 표현하기가 어렵다. 내게 변희봉은 평범한 대사를 불후의 것으로 바꿔놓는 배우다.


# 장면 2.

영화 <플란다스의 개>. 이 영화의 명장면으로 꼽히는 아파트 지하실 씬. 보일러가 울리는 '이이이잉' 소리를 두고 '보일러 김 씨'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대목. 마치 원맨쇼처럼 오로지 변희봉의 썰 푸는 실력과 몇 번의 카메라 움직임으로만 약 5분간의 롱테이크가 지속된다. 웬만한 배우라면 금세 무너지기 마련인 이 장면에서 변희봉은 오히려 그가 얼마나 유능한 배우인지를 느끼게 한다. 목소리. 말투. 눈빛. 손동작. '장면 1'이 변희봉의 감각을 엿보게 한다면 '장면 2'는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그의 단단한 실력을 체감시킨다.  



사실 그가 투병 중이었음을 몰랐다. 그래서 그가 작고했다는 소식이 왜인지 현실성 없이 느껴진다. 내게 변희봉은 언제 어떤 작품에서 만나도, 늘 자신의 색을 유지한 채 새로운 결의 연기를 보여주는 믿음직한 배우였다.

무수한 작품을 남겼음에도 '더 보고 싶다'는 갈망이 들게 하는 배우는 드물다. 나는 아직 그의 연기가 궁금한데, 어린 마음을 달랠 새도 없이 그는 우리 곁을 떠났다. 남겨진 영화 속에 밴 그의 향기를 더듬며 아쉬움을 삼키는 것은 이제 나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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