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문화'에 기고한 글의 수정본입니다.
루카 구아다니노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8)으로 한국에서도 탄탄한 팬층을 확보하며 사랑받았다. 그런 그가 최근 소설 원작에, 할리우드에서 가장 사랑받는 청년 '티모시 샬라메'를 앞세워 영상미가 끝내주는 작품을 찍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전작만큼 사랑받지 못한 채 잊혔다. <본즈 앤 올>(2022) 이야기다. 아래부터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링이 포함돼 있으니 유의해 읽어주길 바란다.
무려 '식인'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내는 <본즈 앤 올>은 그 소재의 충격성 때문인지, 전작만큼 알뜰한 사랑을 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내게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보다 더 기억에 남는다. 아니, 잊히지 않는다. 전작보다 더 잘 찍었다는 말이 아니다. 그냥 인상에 박힌다. 그것은 마치 귀엽고 곰살맞아서 모두에게 사랑받는 아이보다, 그 옆에 입을 쭉 삐집고 앉아있는 아이에게 눈길이 가는 것과 비슷한 심리일 것이다. 이 아이는 너무 솔직해서 대놓고 사랑을 갈구한다. 그 생생한 날것의 감정은 너무 뜨거워 주변의 사람들을 내쫓아버린다. 하지만 그 투명한 감정에 오히려 애정이 가는 것이다. <본즈 앤 올>은 사회성이 부족할 정도로 솔직해서 귀엽지 않은, 그러나 내 기억의 한 구석에 비집고 들어와 지워지지 않는 아이 같은 작품이다.
<본즈 앤 올>의 스토리는 간단하다. 식인 식성을 가진 소녀 매런(테일러 러셀)은 그 끔찍한 본능 때문에 일찍이 부모로부터 버림받는다. 그런 자신을 잘 알아서 애정을 구걸하지도 못하는 매런은 티 내지 않아도 외로워 보인다. 그녀는 우연히 자신과 같은 취향의 리(티모시 샬라메)를 만나 함께 여정을 떠난다. 리는 자신만의 노하우를 알려주며 매런과 가까워진다.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혹은 해치려는, 혹은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려는 사람들 사이에서 둘은 고독하다. 하지만 서로가 있으니 괜찮다. 그렇게 둘만 서로를 오롯이 이해하며 함께 길 위를 여행한다.
<본즈 앤 올>의 스토리는 비유적이다. 정체성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식인에 대한 이야기를 끌고 온다. 그러면서 성인을 위한 잔혹 동화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실제로 사람을 먹는 취향인지 보다, 그들이 얼마나 이해받지 못하는 존재인지가 중요하다. 맞다. 누구나 갖고 있는 외로움을 영화는 응시한다. 그것을 알아주고 위로해 주는 단 하나의 사람. 그런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 영화의 매런과 리는 운이 좋은 편일지도 모르겠다. 이토록 철저하게 사회로부터 내쳐진 누군가가 인생을 나눌 누군가를 찾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무리 힘겨운 인생이라도 그런 사람이 곁에 있으면 버틸 수가 있다. 이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란 것을, 시간을 보내온 사람들은 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매런의 성향과, 사랑은 같이 갈 수 없다. 무슨 말인고 하니, '식인 식성'이라는 취향의 본질은 '사랑'과 불화한다. 둘의 사랑이 정말 특별한 것이 되려면, 누군가를 먹고 싶어 하는 매런의 본능은 번복할 여지없이 아주 강해야 한다. 하지만 그 본능이 정말 강하다면 리 역시 예외일 수 없다. 매런은 리까지 먹을 것이다. 반대로, 매런이 리를 의지대로 먹지 않을 수 있다면, 식인 본능이 그다지 강하지 않다는 뜻이 된다. 그 정도의 본능이라면 사회로부터 내처질 정도로 외로울 이유가 없다. 그녀는 자신의 본능을 제어할 수 있을 테니까. 결국 둘의 사랑이 진실될수록, 둘 사이의 파국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된다.
물론 영화는 대놓고 이렇게 얘기하지 않는다. 영화에서는 리가 어쩔 수 없이 아픈 상황이 되고, 어차피 죽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을 먹어달라고 매런에게 부탁한다. 하지만 이런 스토리와 별개로 '식인 식성 때문에 혼자가 된 사람이, 자신을 온전히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난다'는 말 안에는 시작부터 예고된 불행이 내재해 있다. 매런의 성향을 설정한 순간부터 파국은 예정됐다. 하지만 리는 끝내 그 길을 간다. 그는 매런과 헤어지지 않고,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이것을 보다 보편적인 사랑에 대한 이야기로 치환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누구나 도저히 남과 공유할 수 없는 일면을 지니고 있다. 나조차도 눈을 돌리고픈 미운 비밀. 우리는 언제나 그런 모습까지 사랑해 줄 수 있는 누군가를 기다린다. 온전한 사랑은 나의 전부를 받아들여줄 수 있는 것이니까. 전문가들은 말한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고. 서로의 못난 면을 받아들이되 영향받지 않으며 동행하는 것이 바람직한 연인의 모습이라고. 하지만 모자란 나는 늘 거리조절에 실패한다. 서로를 인정하는 것을 넘어 하나로 합쳐지기를 바란다. 이런 모지리들에게 '나의 단점까지 받아들여주는 사랑'은 모순이다. 거리조절 없이 모든 것을 받아들여주는 사람은, 나의 단점이 내뿜는 독에 취하고 말 것이다. 그때 우리 사이는 어떻게 될까.
그 순간에 <본즈 앤 올>이 말한다. 그래도 나는 사랑할 거야. 니가 내뿜는 독에 취하게 될지라도. 이런 사랑의 끝이 파국이라는 점이 너무나 분명하게 보이더라도. 나는 끝까지 사랑할 거야. 그게 너의 전부를 안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본즈 앤 올'은 대상의 모든 것을 먹어치운다는 은어다. 살부터 뼈까지 전부 다. 이 잔혹한 개념은 어쩐지 파괴적인 사랑을 연상시킨다. 너무 뜨거워서 서로를 태워버리는 사랑. 오해를 막고자 강조하겠다. 나는 이런 파괴적인 사랑을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는 서로를 활활 태워 연소하는 관계를 지양해야 한다. 그런 태도로는 일상을, 현실을 살아갈 수 없다. 하지만 마음 한켠에는 그런 사랑에 대한 판타지를 놓지 못하는 어린 심정이 있다. 실천하지 못하지만, 쳐다보고 상상하며 기다리는 마음 말이다.
하나는 잡아먹히고, 하나는 먹어버렸다니. 연인에게 이보다 더한 형벌이 있을까. 실로 아픈 결말인 것을 알면서도, 그 길을 걷겠다 다짐하는 연인의 모습에 나는 눈길을 빼앗긴다. 나의 모든 것을 내던져 끝내 소멸해 버려도 좋을 사랑. 이토록 부적절하고 아름다운 감정. 영화의 전반에 흐르는 핏빛에 가까운 핑크색이 마음을 물들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