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이라 이름 붙이고 달아난 순간을 소환하는
※'PD저널'에 기고한 글입니다
[PD저널=홍수정 영화평론가] 영화는 눈에서 시작된다. 온 힘을 다해 응시하는 눈. 아들을 향하는 엄마 사오리(안도 사쿠라)의 눈. 애써 괜찮은 척 감춰왔던 불안을 터뜨리며 아들의 안녕을 물을 때, 그녀의 형형하는 눈에서 영화 <괴물>은 마침내 시작된다. 아들 미나토(쿠로카와 소야)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 그의 몸에 새겨진 상처. 이 어둠을 몰고 온 괴물은 누구인가. 뚫어지게 응시하는 사오리의 눈빛은 영화를 여는 열쇠이자, 관객의 시선 그 자체다. 우리는 그녀를 통해 이 세계로 들어간다.
초등학생 아들을 홀로 키우는 사오리는 어느 날, 아들 미나토가 스스로를 가리키며 '돼지의 뇌를 가졌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는다. 아들이 폭력을 당했다고 판단한 사오리는 누가 그런 말을 했느냐고 따져 묻는다. 호리(나가야마 에이타) 선생님. 사오리는 학교를 찾아가지만, 마치 기계처럼 자신을 응대하는 학교 측에 상처받는다. 하지만 예측하지 못했던 진실이 하나 둘 씩 떠오르기 시작한다. 이다음부터는 스포일러가 있으니 유의해 읽어주기를 바란다.
사오리에게 아들 미나토는 수수께끼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다가선다. 그녀가 아들을 향해 다가가는 길목에 호리 선생님이 있다. 처음 그는 이 영화가 말하는 '괴물'에 가까워 보였다. 아이들을 때리고 폭언을 한다니 말이다. 그러나 호리의 사정이 드러나며, 그에게는 오히려 사오리가 괴물처럼 느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사오리와 호리가 학부모와 담임의 사이를 벗어날 때, 사회가 규정한 관계에서 벗어나 '사라진 아이들을 함께 찾아 나서는 그 어떤 연대'로 변화할 때, 이들은 마침내 아이들의 세계를 접하게 된다. 그러니까 사회의 틀을 벗어나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어른만이, 이 아이들의 신비로운 세계를 접할 자격을 얻게 된다.
상징적인 장면이 있다. 영화에서 산속에 버려진 기차간은 미나토와 요리(히이라기 히나타)만의 아지트다. 이곳은 공간적인 동시에 정서적이다. 그래서 미나토와 요리가 자신들만의 공간뿐 아니라, 감성적인 세계를 키워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곳을 가기 위해 건너야 하는 굴다리는 이 세계의 초입이다. 아이들의 내면을 엿볼 수 있는 창인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컴컴하고 생소해 두려움을 느끼게 만드는 굴다리의 풍경은, 어린 아들의 내면을 대하는 엄마의 심정으로 볼 수 있다. 알 수 없어 두렵고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어느 폭풍우 치는 날, 사오리와 호리 선생님은 함께 굴다리를 건넌다. 이것은 두 어른이 폭풍우 치듯 거세게 흔들리는 아이들의 내면 속으로 들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다음 장면부터, 우리는 미나토와 요리에 관한 진실을 보게 된다.
여기서부터는,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친구를 좋아하지만 도와줄 수 없어 교실의 물건들을 내던지고 부수는 마음은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버려진 기찻칸에서 기차 소리를 내며 운전대를 돌리는 순간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단어는 없다. "아빠처럼은 될 수 없다"며 자기 몸을 차 밖으로 던지는 마음은 언어화할 수 없다. 우정, 휴식, 유희, 사랑, 안식, 일탈, 도피. 아이들이 자신의 세계에서 찾은 것이 무엇인지를 잡아내는 단어는 없다.
미나토와 요리뿐 아니다. 이 영화의 많은 부분은 알려지지 않은 채 공백으로 남겨졌다. 교장 마키코(타나카 유코)는 정말 그날 운전대를 잡았을까. 좋은 사람 호리 선생님은 걸스바에 갔을까. 쉴 새 없는 폭력에 노출되는 요리는 어째서 그리 밝은 걸까.
마치 미나토가 부는 트럼본 소리처럼, 마키코가 접은 종이배처럼. 언뜻 보아 익숙하지만, 자세히 뜯어볼수록 정체를 알 수 없는 것들이 도처에 산재해 있다. 어쩌면 우리는 친숙한 이들이 품은 검은 심연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불안과 슬픔, 두려움을 숨기기 위해 '괴물'이라는 말만 중얼거린 채 서둘러 자리에서 달아나고 있는 게 아닐까.
영화 <괴물>은 그렇게 명명된 순간들을 소환한다. 우리가 '괴물'이라 이름 붙이고 달아난 순간들. 거기에는 너무 깊고 깊어서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마음과, 상처받은 영혼이 있다. 이 순간 앞에서 고민하다 그저 '괴물'이란 꼬리표를 고이 달아주는 이 영화는 사실 언어의 실패를 고백하는 중이다.
그래도 <괴물>을 보고 난 뒤, 달라지는 것들이 있다. 이제 우리는 '괴물'이라는 단어 앞에서 이 어여쁜 인간들이 겪은 시간을 회상하게 될 것이다. 그 상처 많고 애틋한 시간을 경유하지 않고 이 단어를 대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제 내게 '괴물'은 미지의 무언가를 향한 애수와 존중을 담은 단어로 영원히 바뀌었다. 그렇게 영화 <괴물>은 알 수 없는 마음과, 상처받은 인간의 형상을 '괴물'이라는 단어에 아로새기는 데 성공한다. 그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지만, 낯설고 아름답고 여리고 상처 많은 세계가 바로 이곳에 있다. 영화가 보여주어야 할 지평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괴물>은 올해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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