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신파’의 기술
※'고대신문'에 기고한 글입니다.
※마지막 장면에 대한 스포가 있습니다.
하마터면 속을 뻔했다. 김한민 감독의 ‘이순신 3부작’ 중 마지막 작품인 <노량: 죽음의 바다>는 얼핏 기존의 천만 영화와 거리를 둔 것처럼 보인다. 천만 영화들이 고질적으로 앓는 ‘신파’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마지막에 이르러, 영화가 조금 다른 방식으로 관객의 눈물을 짜내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신과 함께> 시리즈나 <7번방의 선물>이 구사했던 방식과는 결이 약간 다르다.
전반부까지 <노량: 죽음의 바다>는 절제된 톤을 선보인다. 이순신 장군(김윤석)역은 아들의 죽음 앞에서도(여느 신파극처럼) 구구절절 슬픔을 토해내며 오열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충격으로 황폐해진 동공과, 그럼에도 비극을 극복하려 애쓰는 투박한 몸짓을 보여준다. 이런 연출은 제법 세련미를 느끼게 한다. 초반에는 말이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노량해전이 시작되며, 영화는 마치 거북선 용머리가 불을 뿜듯이 신파를 뿜어내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몇 가지 기법이 동원된다.
먼저 카메라는 이순신이 이끄는 군사의 위치에서 전장을 보기 시작한다. 마치 직접 군사가 된 듯 말이다. 이런 연출은 한·일 수군이 배 위에서 백병전을 벌이는 장면에서 극에 달한다. 카메라는 정확히 한 명의 수군의 위치에서 터지는 포화에 반응하고, 쓰러지는 동료를 돌아보고, 적을 쫓아 달려간다. 그리고 관객인 우리는 카메라의 시선을 공유한다. 우리는 카메라가 제시한 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이런 방식의 연출에 동의하든 안 하든) 여지없이 한 명의 군사가 되어 전장에 동참하게 된다. 보는 것은 생각하는 것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우리는 점차 이순신과 함께 사투를 벌이는 군사에 동화된다. 또 하나 인상 깊은 연출이 등장한다. 바로 ‘이순신이 북을 치는’ 장면의 연출이다. 물론 이때 불굴의 의지로 타북하는 이순신, 다른 사운드를 자제하고 북소리만을 들려주는 연출, 음파 공격이라도 당한 듯 귀를 잡고 쓰러지는 시마즈(백윤식) 등 ‘킬포’는 많다. 하지만 우리가 영화적으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바로 ‘속도’다.
영화는 이순신이 북을 치는 모습을 자주 ‘슬로모션’으로 보여준다. 영화에서 중요한 장면이 슬로모션으로 연출되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러나 이것을 시마즈에 대한 연출과 비교해 보면 의미심장하다. 영화는 시마즈가 누군가를 검으로 베는 장면을 주로 ‘패스트모션’으로 보여준다. 이것은 기본적으로는 시마즈의 뛰어난 검술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하지만 마치 히어로-빌런처럼 상반된 두 인물을 두고, 영화가 슬로모션(이순신)과 패스트모션(시마즈)을 구사하는 점은 흥미롭다. 슬로모션은 관객이 영화 속 인물에게 공감하게 만드는데 유리한 기법이다(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나, 많은 경우 그렇다). 동작의 상영 시간이 길어지기 때문에, 관객은 인물의 행동과 감정을 자세히 느낄 수 있다. 반면 패스트모션은 어떤 인물을 초현실적으로 보이게 만들어주지만, 인간미는 반감된다. 그의 표정이나 몸짓에서 드러나는 감정의 흔적을 따라가기 어렵기 때문이다. <노량: 죽음의 바다>는 이런 속도의 차이를 통해, 관객이 시마즈를 두려워하고 이순신에 감화되도록 유도하고 있다.
오해하지 않았으면 한다. 연출 기법에는 잘못이 없다. 다만 <노량: 죽음의 바다>는 다소 과한 방식으로 이것을 거듭 구사해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한다. 관객을 군사에 동화시키고, 이순신의 마지막 모습을 느리게 재생하며 말이다. 이런 연출은 결국 영화를 비통함의 바닷속으로 침몰시킨다. 흔히 신파가 그렇듯, 적당하면 괜찮지만 과하면 거북한 법이다. <노량: 죽음의 바다>에는 요란스러운 오열이 없지만, 눈물을 강요당할 때 느껴지는 특유의 피로감이 있다. 조금 더 담백했으면 좋을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