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저널'에 기고한 글입니다
극장가에 기이한 기류가 흐르고 있다. 충무로 대작들이 연이어 개봉한다. 하지만 예상 외의 썰렁한 반응. 무안함은 반복된다. 최근 개봉한 한국 영화 중 의외의 선전으로 관객수를 쓸어간 <서울의 봄>을 제외하고 목표치를 상회한 작품을 찾아보기 힘들다.
업계 기대를 등에 업고 개봉한 <노량: 죽음의 바다>도, 순제작비만 400억 원 이상이 들었다는 <외계+인> 시리즈도 마찬가지다. 소위 '천만 영화'가 되었어야 할 대작들이 자꾸만 침몰한다. 기대와 결과가 어긋난다. 관객수 예상은 '과거'의 데이터에 기반하고, 실제 관객수는 '현재'를 반영한다. 그러니 기대와 결과가 어긋나는 것은, 극장가의 과거와 현재 사이에 간극이 생겼음을 알려준다. 그 틈새를 나는 오래 지켜보았다. 그렇게 정리된 생각을 말하자면 이렇다. 천만 영화의 시대는 갔다.
먼저 이것부터 말해보자. 천만 영화란 도대체 무엇인가. 단순하게는 관객수가 천만 이상인 작품을 말한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한국의 천만 영화들은 그 이상의 특징을 공유하므로. 특징은 이렇다. 극적인 서사 구조를 가진다(<광해, 왕이 된 남자>). 신파가 약간 혹은 잔뜩 가미됐다(<7번방의 선물>, <신과함께> 시리즈). 액션이 많거나(<범죄도시> 시리즈, <해운대>), 역사물로서(<명량>, <암살>) 볼거리가 풍부하다(<부산행>). 캐스팅이 호화로워 걸출한 배우들이 하나 이상 등장한다(<베테랑>, <도둑들>).
천만 영화는 대개 CJ ENM, 롯데엔터, 쇼박스 등 기업에서 투자배급한다. 거액의 제작비가 투입된 만큼 때깔이 좋다. 돈을 들인 티가 난다. 대신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도록, 흥행에 초점을 맞춰 제작한다. 관객의 입맛에 맞춰 기획된다. 흥행이 될지 어떻게 아냐고? 앞서 천만 관객을 모았던 영화의 공식을 따른다. 위에서 언급했던 것들. 그렇게 천만 영화의 문법이 탄생했다.
하지만 지금의 천만 기획 영화들은 이름값을 못한다. 누가 보아도 천만 영화의 문법을 정직하게 따른 것들이 관객들의 외면을 받는다. <노량: 죽음의 바다>(25일 기준 관객수 452만)의 예상외의 부진, <외계+인> 2부(116만)의 처참한 실패. 윤제균의 최근작 <영웅>(327만)는 <국제시장>(1427만)의 반에 반에도 못미친다. 이제 천만 영화의 문법은 한국 관객에게 통하지 않는다.
이유가 뭘까.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한국 극장가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여러가지가 있다. 극장이 저물고 OTT가 부상했다. 넷플릭스와 디즈니플러스가 콘텐츠 세계의 강호로 떠올랐다. 굳이 극장에 가지 않아도 재밌는 것이 천지. 그리고 천만 영화 문법은 간파당했다. 이런 스토리와 캐스팅이면 '천만 영화 한 편이 뚝딱'이라는 밈이 돌 정도로. 관객의 수준을 무시하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상투적이었던 구성 탓이다.
이런 변화가 수면 위로 부상할 즈음 코로나가 터졌다. 한국 영화는 달라진 극장가를 몸소 체감하며 치열하게 변화할 '골든 타임'을 놓쳤다. 그렇게 다가온 2023년. 이전과 달라진 극장가에 마치 과거에서 온 옛날 사람처럼 천만 기획 영화들이 줄줄이 개봉했다. 시대착오적인 불시착. 철 지난 농담처럼 반응은 썰렁했다. 혹은 피식하는 데 그쳤다. 반면 OTT 콘텐츠는 진화를 반복하며 새 트렌드를 만들고 있다. 이제 '천만 영화' 대신 넷플릭스의 '오늘 영화 순위 1위'가 활개치는 세상이 됐다.
지금 극장가는 카오스다. 그 어느 때보다 흥행 예측이 어렵다. <서울의 봄>의 대흥행은 로또 당첨에 가깝다. 무책임하게 들릴지 몰라도 사실이다. <서울의 봄>은 끊임없는 쾌감을 유발하는 유려한 만듦새, 화려한 출연진과 맛깔나는 연기를 선보인다는 점에서 천만 기획 영화의 범주에 든다. 그렇다 하더라도 흥행의 보장은 없다. 영화 개봉 시기, 대진표 등 환경적인 요인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지만 이런 인기는 운에 가깝다. 반면 <범죄도시> 시리즈는 한국의 시리즈물 중 거의 유일하게 매번 흥행몰이를 성공했다.
한편 지난해 개봉했던 <잠>(147만)과 <달짝지근해: 7510>(138만) <콘크리트 유토피아>(384만)의 작지만 야무진 성공도 주목할 만하다. 이들 모두 '가정'을 주제로 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공식으로 내세우기는 아직 조심스럽다. 그러니 천만 시대가 저문 지금, 흥행을 담보할 규칙은 없다. 예측할 기준도 없다. 다만 대체적인 부진 속에서 일부 색깔있는 작품이 소소한 성공을 거두고, 게중에 천운을 만난 수작이 홈런을 치는 것이 지금의 극장가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
이전과 같은 기획 작품을 꿈꾸던 제작자는 답답할 것이다. 불안정한 상황이 리스크로 느껴질테니. 하지만 한국 영화계를 생각한다면 지금의 상황은 청신호다. 영화는 안정적인 투자 상품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재미없는 규칙이 통하는 예술 세계는 망가지기 마련이다. 둔탁했던 천만 영화의 규율이 사라진 공터에 변화의 바람이 분다. 그러니 조금 혼란스러워 보일지 몰라도, 나는 한국 극장가의 다음이 기대된다. 천만 영화의 시대가 저물었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