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브스 프리미엄'에 기고한 글입니다.
최근 극장가에서는 희한한 영화 하나가 주목을 끌고 있다. 한국형 오컬트를 표방하는 <파묘>다. 관객 수 약 300만 명을 기록하며 순항 중이다. 최근 주춤했던 한국 영화가 다시 주목받는다는 점에서 <파묘>의 인기는 반갑다.
<파묘>를 연출한 장재현은 오컬트에 잔뼈가 굵다. 장편 데뷔작 <검은 사제들>(2015), 전작 <사바하>(2019) 모두 같은 장르. 2014년에 만든 단편 <12번째 보조사제>도 마찬가지다. 처음 <검은 사제들>이 나왔을 때에는 단편적인 시도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음을 장재현은 연이은 작품으로 증명했다. 작품의 만듦새를 떠나, 좁은 길을 꾸준히 간다는 측면에서 그는 눈길이 가는 감독이다.
장재현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오컬트 외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감독이 어느 정도 주목을 받으면 '대중성', '흥행' 따위를 고려한 선택들이 영화에 보이기 시작한다. 투자금이 커지며 어쩔 수 없는 어른의 사정도 생기겠지. 그러면서 영화는 좋게 말해 쉬워지고, 나쁘게 말해 난잡해진다. 감독은 자신만의 색깔로 주목받았지만, 그것을 잃게 되는 딜레마에 처한다. 그런데 장재현은 그런 게 없다. 그의 영화는 시작부터 끝까지 그냥 오컬트다. '이쯤에서 질려하는 관객도 있을 테니 분위기를 환기해 볼까?' 따위의 타협도 없다. 미련해 보인다. 그런데 그 미련함이 흥미롭고 믿음직스럽다.
장재현의 필모그래피를 보며 놀라운 점이 있다. 생각보다 스타 배우를 많이 기용했다는 점이다. <검은 사제들>에는 강동원과 김윤식, <사바하>에는 이정재와 박정민, <파묘>에는 최민식, 김고은, 유해진, 이도현까지. 면면이 화려하다. 그런데 이들은 신기하게도 (홍보 단계에서 화제를 모을지언정) 영화가 시작되면 자연스레 영화에 동화된다. 그들의 존재감은 튀지 않고 작품 속에 흡수돼 버린다.
장재현은 이들의 스타성을 적극 활용할 의지도 없어 보인다. 그 심드렁한 태도가 놀랍다. 강동원, 이정재, 김고은을 앞에 두고 이런 선택을 하기란 쉽지 않은 일. 하지만 이것은 스타들에게도 새로운 기회다. <검은 사제들>의 강동원은 좋은 사례다. 여태 강동원이 출연한 영화들은 강동원 앞에만 서면 그의 스타성을 찬양하는 방식으로 변모하곤 했다. 혹은 변질됐다. 그러다 보니 강동원의 스타성만 비추어 오히려 재미가 없었다. 하지만 <검은 사제들>의 강동원은 파리한 얼굴에 미숙하지만 신념 곧은 사제 그 자체다. 덕분에 우리는 강동원이라는 배우의 새로운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러니까 강동원이라는 잘생긴 배우조차 자신의 오컬트 세계를 완성할 장기 말 중 하나로 보는 장재현의 그 무신경한 태도는 강동원에게 오히려 기회로 작용했다. 스타들은 이토록 흔치 않은 찬스를 통해 배우로 성장한다.
<파묘>에 이르러 기회를 움켜쥔 이는 김고은이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내게 김고은은 <은교>(2012)에서 보여준 여리여리하고 청초한 이미지에 기반한 스타의 이미지가 강했다. 물론 그녀의 연기력은 동년배 중에서 뛰어난 축이다. 또한 그녀는 다양한 작품을 하는 부지런한 배우다. 하지만 그녀가 맡은 배역은 그 특유의 청초함에 뿌리를 두고 가지를 뻗은 것들이 많았다. 원류가 같으니 어딘가 비슷한 느낌을 준다. 멜로의 주인공이거나(<유미의 세포들>, <도깨비>), 파워풀한 존재에 처절하게 맞서거나(<영웅>, <몬스터>), 자기보다 큰 여성을 따르는(<계춘할망>, <차이나타운>) 캐릭터들. 이들은 김고은 특유의 여리고 사랑스러우며 나풀거리는 느낌을 공유한다.
그랬던 김고은이 달라졌다. <파묘>에서 김고은이 맡은 무당 '화림'은 그녀가 여태 맡았던 캐릭터들과 궤를 달리한다. 결이 다르다. 어리지도, 여리지도, 러블리하지도 않다. 화림은 어딘가 얄미우면서도 프로페셔널하고, 속물스러우면서도 진중하다. 화림을 볼 때 '당참', '카리스마', '실력자' 따위의 단어가 자연스레 연상된다. 물론 김고은이 연기한 다른 캐릭터도 야무지고 당돌한 순간들이 있었지만 일부분에 머물렀다. 자신보다 나이 지긋한 풍수사를 설득하고 법사를 이끌며 사건을 파헤치는 화림은, 자신의 힘으로 이야기를 끌고 갈 뿐 스타 김고은의 매력에 의존하는 면이 없다. 화림은 자기 일을 사랑하고, 때로 염려하며, 주변을 챙기는 직업인으로서 무당 그 자체다. 배우 김고은의 필모그래피에서 새롭게 등장한 캐릭터이자, 도약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장재현의 뚝심도 인정할 만하다.
물론 <파묘>는 단점이 없는 영화가 아니다. 많은 이들이 지적했듯이 뒷심이 약하다. 후반부에 나오는 특수효과는 수준이 높지 않아 몰입감을 깬다. 느닷없이 등장하는 희생정신도 조금은 뜬금없다. 하지만 이야기의 마지막까지, 신파나 값싼 감성에 호소하지 않고, 오컬트 세계의 규칙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우직함이 돋보인다. 장재현의 필모그래피를 관통하는 인상 역시 우직함이다. 한 가지만 뛰어나도 이치에 이른다 하지 않나. 우직하게 한 길을 걷는 장재현에게 기대를 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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