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것들은 <풍자와 해학>을 남기고 사라진다.
거만한 모습으로 하늘을 뚫을 듯 솟아오른 고층 아파트.
그곳의 담장 또한 주인을 잘 따르는 개처럼 아주 높게 서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죄수들을 가둔 교도소의 담장과 닮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 사람들은 주변과의 조화를 생략한 채 ... 점점 더 자폐화 되어가는 단지 안의 격리된 주거문화를 <풍요>라고 말합니다.
단지 앞 카페에 모인 일부의 여인들(혹은 여사님들)은 육아와 여성인권을 얘기하다 어느 순간부터는 인근 전통시장의 이전 문제와 아파트 가격의 상관관계를 논하기 시작합니다.
김칫거리는 마트보다는 전통시장 물건들이 더 신선하고 값도 싸다는 어머니의 평소 소신과 주관에 따라 (이젠 더 이상 신선하진 않지만) 철 지난 늙은 아들도 카트를 끌며 어머니를 따라나섰습니다.
시장 입구에서 옆집 할머니를 만나 잠시 수다 삼매경에 빠진 어머니 뒤로 아들은 시장 입구 옆, 떡집 매대에 랩으로 참 먹음직스럽게 포장되어 진열된 각종 떡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과연 '무슨 맛일까?'를 희망차게 상상해봅니다. ~ 순간!
한 팩에 2천 원인데 세 팩을 사면 5천 원에 준다며 화장을 짙게 한, 생각보다 젊어 보이는 떡집 아주머니가 나에게 흥정을 걸어옵니다. ... 그때 어차피 다른 떡집도 세 팩 5천 원에 준다며 어머니가 지원사격을 합니다. ... 옆집 할머니도 거듭니다. 그리고 두 분은 다시 수다를 이어갑니다.
그러자 떡집 아주머니는 어차피 오늘은 일찍 문 닫을라고 했다며, 그럼 네 팩을 6천 원 가져가라며 결정타를 날립니다. ... 어머니와 옆집 할머니는 수다를 멈추고 떡집 매대로 다가와 이건 바람떡, 저건 쑥인절미, 요건 호박떡 등 아들이 처음부터 궁금해하던 각종 떡의 이름과 맛을 논하기 사작합니다. 덕분에 늙은 아들은 간접적이나마 대부분의 떡의 종류를 알게 되었습니다.
옆집 할머니가 어머니에게 천 원짜리 2장 있냐며 물어옵니다. 어머니가 없다고 하자 할머니는 바지 주머니에서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떡 네 팩을 골라 계산하고 바람처럼 사라집니다. ... 어머니는 아들의 의견을 반영해 먹고 싶은 떡을 골라보라고 권합니다.
아들이 화려한 모양의 호박과 콩이 섞인 주황빛 나는 떡을 고르려 하자 바람떡이 맛있다며 어머니는 그렇게 바람떡 세 팩과 쑥인절미 한 팩을 고르고 지갑에서 천 원짜리 6장을 꺼내 떡 값을 지불합니다. 시장 입구 떡집에서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지체한 탓인지 어머니는 서둘러 시장 안으로 들어갑니다.
... 아들은 호박과 콩이 섞인 떡은 과연 '무슨 맛일까?'를 상상하며 ~ "쿠르르 ~ " 카트를 끌고 다시 어머니의 뒤를 따라 시장 안으로 들어갑니다.
김칫거리를 파는 채소가게에서 배추와 쪽파와 마늘 등 각종 김칫거리를 고르던 어머니에게 채소가게 아주머니가 떡을 많이 샀다며 무슨 떡을 샀냐고 물어옵니다. 그런데 분명 채소가게 아주머니는 떡의 종류를 물어왔지만 어머니는 6천 원을 주고 떡 네 팩을 샀다며 떡의 수량으로 응수합니다. ... 그리고 뿌듯해하십니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소통이 이루어집니다.
그때 채소가게 맞은편 기름집 아주머니가 다가와 어머니에게 정보를 하나 알려줍니다. 떡집 여편네는 과부인데 최근 젊은 총각을 만나 매일매일이 즐거울 거라고 합니다. 나이 오십 줄에 마흔셋 직업군인, 그것도 총각을 만났으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을 거라며 떡 네 팩이 아니라 마흔 팩을 퍼줘도 요즘은 전혀 아깝지 않은 기분일 거라며 부러움 섞인 말투로 정보를 누설합니다.
~ 그 순간!
"집에서도 청소나 빨래 같은 궂은일도 다하고, 가게 문 닫을 때도 자주 나와서 챙겨주고, 누가 지 마누라 훔쳐 갈까 봐 하루 종일 물고 빨고 한 순간도 놔주질 않는 데요 ... 아무튼 팔자 좋은 여편네는 자빠져도 가지 밭이라는데 ~ 호! 호! 호! "
기름가게와 옆으로 나란히 붙어있는 건어물 가게 아주머니가 김칫거리를 고르던 어머니 옆으로 다가와 굵은 가지 하나를 골라잡고 크게 흔들며 웃습니다. ... 어머니도 웃고, 채소가게 아주머니도 웃고, 기름집 아주머니도 웃습니다.
아들은 호박과 콩이 섞인 떡이 '무슨 맛일까?'를 계속해서 생각하느라 아주머니들의 웃음에 화합하지 못했습니다.
- 2017년 11월 ... 단풍이 뉴스를 장식하던 어느 일요일 오후에 ]
풍자와 해학은 개인의 삶뿐만이 아니라 시대의 (정서적) 가뭄을 해소하는 역할도 합니다.
모든 것이 바쁘게 <새 것>으로 교체되어도 풍자와 해학은 여전히 살아남아 자신들의 공간을 고수하며 아파트 단지의 <풍요>와 전통시장의 <가치>를 등치 관계로 만드는 비범성을 갖습니다.
전통시장이 이전하면, 그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올지 공공시설이 들어올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사실은 <오래된 것들은 > 아무튼 <새 것>에 의해 주변부로 자꾸만 ~ 자꾸만 밀려나가는 신세라는 점입니다.
... 그리고 더 이상 밀려나갈 공간이 없는 주변부의 끝에 당도했을 때 오래된 것들은 <풍자와 해학>만 남겨놓고 우리들의 기억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새 것>들의 공격적 밀려듦을 너무도 잘 표현했던 김수영의 시 한 편을 소개합니다.
[◆ 금성(金星) 라디오 ]
금성라디오 A504를 맑게 개인 가을날
일수로 사들여온 것처럼
오백원인가를 깎아서 일수로 사들여온 것처럼
그만큼 손쉽게
내 몸과 내 노래는 타락했다
헌 기계는 가게로 가게에 있던 기계는
옆에 새로 난 쌀가게로 타락해 가고
어제는 카시미롱이 들은 새 이불이
어젯밤에는 새 책이
오늘 오후에는 새 라디오가 승격해 들어왔다
아내는 이런 어려운 일들을 어렵지 않게 해치운다
결단은 이제 여자의 것이다
나를 죽이는 여자의 유희다
아이놈은 라디오를 보더니
왜 새 수련장은 안 사왔느냐고 대들지만
- [ 금성라디오, 김수영 전집1, 1966. 11 ]
위 글은 이슈인(issuein.com)에서 <물파스>라는 닉네임을 사용하시는 분의 글을 편집하여 올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