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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전호 Apr 14. 2017

한여름의 판타지아

다른 두 그림이 그려낸 아름다운 하모니

필자는 독립영화를 즐겨 본다.

아니, 꽤 많이 일부러 찾아본다.

취향이라면 취향의 문제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독립영화가 주는 어느 정도의 평범함과 담담함이 현실을 살아내고 있는 우리의 모습과 더 깊게 닮아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립영화를 보고 나면 왠지 마음이 편해지고 묘한 대리만족감이 들기도 한다.


내가 살아왔던, 혹은 살 수 있을 것 같은 이야기들이
독립영화에는 녹아 있으니까.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나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인물들이 만들어가는 핑크빛 아름답기만 한 사랑이야기는 아무래도... 현실과는 먼 이야기니까 말이다.

영화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그런 면에서 우리의 삶과 상당히 밀착돼있는 이야기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여행지에서 겪을 수 있을법한 이야기들을,

누구나 내뱉고 있는 일상적인 언어의 대사로,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한 인물들이 자연스럽게 풀어내고 있다.

이 영화는 일본 나라 국제영화제의 지원으로 제작된 영화로 한, 일 합작 영화이다.

일본의 작은 지방 소도시인 고조시를 배경으로 그려낸 잔잔한 이야기가 조용하고 고즈넉한 고조시를 배경으로 자연스레 어울려 있다.



01. 독특한 구성과 그들의 연결고리


영화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다소 독특한 구성을 취하고 있다.

1부 "첫사랑 요시코", 와 2부 "벚꽃 우물".

사실 1부와 2부는 전혀 다른 포맷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실은 서로 기민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 부분은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쉽사리 놓칠 수도 있을 것이다.

1부 "첫사랑 요시코"에서는 한국의 영화감독이 고조시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서 사전 답사를 하는 내용이다.

필자는 처음에 실제로 등장인물인 감독과 통역가가 정말 실제 영화감독과 통역인 줄 알았을 정도로 1부는 현실적인 다큐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젊은이들이 떠난 조용한 고조시 마을에서 카페, 식당, 폐교된 학교 등 고조시가 가지고 있는 풍경과, 그 풍경 속에서 고조시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만들어내는 분위기가 1부의 흑백 화면에 녹아있다.

사실 필자는 1부를 보면서 흑백의 색감이라던지, 다큐 형식을 취하는 스타일에 다소 지루함을 느끼기도 했었다. '이런 장면과 대사가 이 영화에서 꼭 필요한 걸까?'라는 의문을 품기도 했고, 조금은 답답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런 의문들은 2부가 시작되면서 해결이 된다.

1부에 등장하는 감독은 고조시를 배경으로 어떤 영화를 만들어야 할지를 고민한다. 그는 사람에 집중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영화에 풀어내고 싶었다. 그래서 고조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인터뷰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장소에 엮여있는 사람들의 기억과 추억. 그리고 그것들에 엮여있는 감정들 까지. 그런 그의 고민들의 결과물이 2부 "벚꽃 우물"에서 펼쳐진다.

쉽게 말해서 1부에서 어떤 영화를 만들어야 할지에 대한 감독의 고민이 2부에서 고조시를 배경으로 펼쳐진 한 편의 영화라는 결과물로 이어지는 구성인 것이다. 게다가 여자 주인공인 혜정(김새벽)과 유스케(이와세 료)는 1인 2역을 맡으며 1부, 2부에 모두 등장하게 되니 그들 사이의 기민한 연결고리를 찾아보는 것도 나름 재미있었다.

2부 "벚꽃 우물"에서부터 영화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1부가 집을 짓기 위해 터를 다지는 작업이었다면 2부는 본격적으로 기둥을 올리며 집을 짓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1부가 고조시와 조용한 마을 시노하라의 풍경을 보여주는 배경 중심의 이야기였다면 2부에서는 본격적으로 두 주인공인 혜정과 유스케를 중심으로 화면이 구성된다. 필자는 2부 "벚꽃 우물"을 보면서 비포 시리즈를 떠올리기도 했다. 이유는 2부의 구성은 철저하게 두 인물의 대화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화면 또한 그들을 중심으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마치 오스트리아, 파리, 그리스의 구석구석에 걸쳐있는 비포 시리즈의 두 주인공처럼 말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비포 시리즈의 두 주인공은 사랑에 능숙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 혜정과 유스케는 다소 서툴고 풋풋한 느낌이 있다.


1부에서 영화감독이 영화를 고민하며 돌아다녔던 고조시의 여러 곳을 2부에서 주인공들이 함께 다니며 그들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구성.

1, 2부를 모두 보고 난 뒤에야 고개가 끄덕여지는 구성.

독특한 시도였지만 서로 기민하게 연결되어 있고 그것으로 충분했던 다른 두 그림이 그려낸 아름다운 하모니 같은 영화이다.



02. 평범함이 주는 신뢰감


앞에서도 말했지만 필자가 독립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독립영화가 주는 평범함이다.

우리는 익숙한 것에서 신뢰감을 얻는다. 그것은 우리가 그 익숙함 속에서 계산을 할 필요도 없고, 다른 무엇과 비교할 필요도 없는 자연스레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익숙한 모든 것은 우리에게 신뢰를 주고,
그것들이 주는 신뢰감이 나는 좋다.

영화를 보기 전까지 필자는 여배우 김새벽을 알지 못했다.

영화의 1부에선 실제로 그녀가 정말 영화 스탭인 줄 착각했을 정도로 무지했었다. 인물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필자는 그녀의 외모를 상당히 평범하다고 생각했었다. 여자 주인공을 할 정도인가?라는 의심을 품기도 했었으니까.

실제로 영화 속에서 여주인공 혜정은 매우 평범한 캐릭터이다. 화려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도 않고, 말과 행동도 튀지 않는다. 그저 요즘의 청춘이 그렇듯 청춘의 어려운 고민 하나를 가지고 현실을 살짝 피해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온 평범한 여성이다. 어쩌면 실제 누구나 여행지에서 가질 수 있는, 가져볼 법한 이미지를 그녀는 연기해냈다. 그런 그녀의 평범한 이미지는 필자에게 묘한 신뢰감을 주었다. '내가, 혹은 내 주변의 누군가는 충분히 저런 일을 겪을 수 있겠구나.'라는 신뢰감 말이다.

물론 영화가 끝날 때쯤 필자는 이 영화의 최고의 캐스팅은 김새벽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이 영화를 이렇게 담담하고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으로 그려낼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녀가 가진 묘한 매력에 그녀의 다음 작품을 꼭 보겠다는 다짐까지.

필자는 남자 배우인 이와세 료를 영화 <최악의 하루>에서 처음 만났었다. 당시 영화 <최악의 하루>를 통해 비친 그의 이미지는 수줍음이었다. <한여름의 판타지아>에서도 그는 <최악의 하루>에서의 이미지와 상당히 비슷하다. 다소 수줍음을 품고 있지만 때론 대담하고, 잔잔한 부끄러움으로 자연스러움을 연기해낸다.

어떻게 보면 전형적인 일본인 남자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상당히 예의 바르고, 다소 수줍으며, 튀지 않는 평범함까지.

이와세 료 역시 외모가 출중하다,라고 말하기는 조금 어려운 배우일지도 모른다(요즘엔 정말이지 엄청 조각처럼 잘 생긴 배우들이 많으니까). 어쩌면 그와 비슷한 외모의 평범한 일본 남자 한 두 명을 우리는 친구르 가지고 있을지도. 확실한 건 김새벽과 이와세 료가 풀어낸 혜정과 유스케를 따라 고조시를 걷다 보면 우리는 이 장면이 우리의 삶 가운데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나도 할 수 있겠다는 묘한 편안함과 신뢰감을 얻게 된다. 그리고 그 신뢰감은 강한 여윤으로 남아 며칠은 우리를 영화 속에 머물게 한다.



03. 롱 테이크 촬영이 주는 아찔한 긴장감


앞에서도 말했지만 필자가 이 영화를 보면서 비포 시리즈를 떠올렸던 가장 큰 이유는 아마 롱 테이크 편집 때문일 것이다. 롱 테이크는 영화의 한 장면을 길게 촬영하는 기법을 말한다.

쉽게 말해서 우리가 접하는 일반적인 상업영화의 한 커트는 10초 내외엔 반면에 롱 테이크 촬영을 택한 이 영화는 1~2분 이상 별다른 편집 없이 두 주인공의 대화를 어어서 보여준다.

이런 촬영 방법은 분명히 치명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다. 그건 자칫하면 영화가 한없이 지루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제한된 시간이라는 제약을 가진 영화에서 빠른 화면 전환은 필수적일 테니까.

같은 촬영기법을 택한 비포 시리즈가 지루함을 피할 수 있었던 점은 남 여 주인공이 자신의 생각들에 대해서 거침없이 쉬지 않고 말을 뱉어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두 주인공이 영어에 유창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두 주인공은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게다가 혜정은 한국에서 일본으로 여행을 온 여행자이고 유스케는 일본에 살고 있는 일본인이기 때문에 두 사람의 대화는 온전히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대화와 단어의 선택에 제약이 있고 몇 번인 가는 의미를 되물으며 대화를 이어가기도 한다.


이처럼 혜정과 유스케의 대화는 공백으로 채워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필자가 이 영화에서 지루함을 느끼지 못했던 이유는 대사와 대사 사이의 공백, 그 사이를 흐르고 있는 두 주인공의 미묘한 감정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의 일이 잘 풀리지 않아 도망치듯 떠나온 여행. 남자 친구가 있음. 그래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유스케를 밀어내려고 해보지만 그에게 끌리는 감정을 통제하기는 쉽지 않음. 건너오는 모든 말들에 감정에 응답하지 않으려 해보지만 표정만은 숨기지 못함. 진심을 외면할 만큼 모질지 못함.

이런 것들이 주인공 혜정의 표정과 몸짓과 눈빛에 걸려 대사보다 더 정확하게 관객에게 전달되었다.


고조시에서 감을 재배하는 일을 하고 있는 유스케. 안내소에서 처음 만난 혜정에게 반함. 그녀를 안내해주면서 여러 번 자신의 감정을 비추지만 몇 번인가 거절당함. 하지만 혜정을 좋아하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는 못 함. 진심을 건넸으므로 충분했지만 이뤄지지 않았으므로 아쉬움. 유스케는 혜정에게 건네는 말 한마디, 보이는 표정, 망설이는 몸짓 하나하나에 자신의 감정을 담아낸다.

사실 혜정과 유스케가 현실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는 많았다.

우선 둘의 국적이 다르다는 것. 생활의 영역이 겹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행이 주는 열린 마음과 설렘이 있겠지만 그것을 지속해나가는 것은 쉽지가 않을 것이다.

또 유스케는 혼자였지만 혜정은 남자 친구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유스케를 거절하는 이유가 된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가 그들의 이야기에 공감하고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은 여행지가 주는 설렘 그 자체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04. BEST CUT


1. 삶을 살아가는 방법

혜정은 고민을 가지고 있는 청춘이다.

영화에서 그녀의 고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나와있지 않지만 그건 미래에 관한 부분일지도 모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에 대한 부분일지도 모른다.

혜정은 유스케와 대화를 통해서 모호했던 것에 대한 스스로 답을 찾아간다.

행복하게 사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2. 사랑은 타이밍

제가 좀 늦게 만났네요...


남자 친구가 있다는 혜정의 말에 유스케는 웃으며 말한다. 유스케의 말처럼 일찍 만났다면, 혜정에게 남자 친구가 없었다면, 그래서 혜정이 유스케의 마음을 받아줄 수 있었다면...



3. 이루어지지 않아도 사랑은 사랑

사실 이 장면에서는 관객들에 따라서 약간의 호불호가 있을 것이다.

뜬금없는 키스? 남자 친구가 있는데?라는 비판을 쏟아 낼 수 도 이겠지만, 적어도 영화 속 혜정과 유스케의 감정선은 충실이 따라왔다면 마지막 키스신은 상당히 아름다울 수 있다.

저기엔 끝이라는 게 담겨 있다.

혜정에게 자신이 한국에 가면 가이드를 해달라고 부탁했던 유스케도, 그렇겠다고 연락처를 적어준 혜정도 알았을 것이다. 오늘이 둘의 마지막이란 것을. 다시는 서로를 볼 수 없다는 것을.


마지막을 담고 있는 모든 것은 슬프고,
슬프고,
또 슬프다.



05. 필자의 감상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걸 보면서 곰곰이 생각해 봤다.

무엇이 마지막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고 영화에 집중하게 만들었을까?

롱 테이크 촬영기법을 택했지만 인물들의 대화는 많지 않다. 더군다나 서로의 모국어가 다른 까닭으로 대화는 자꾸만 공백을 만들어 냈다. 그럼에도 인물의 표정 하나라도 놓칠까 나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중요한 건 대사가 아니라 표정일지도 모른다.

진심을 전달할 수 있는 건 말이 아니라 눈빛일지도 모른다.

아니, 맞다.

진심을 담을 수 있는 건 표정과 눈빛이다.

많은 거짓들과 왜곡들을 포장해 진실을 숨기려 하는 세상 속에서 여행지에서 만난 혜정과 유스케는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에게 진심을 전달했다. 최선을 다해 서로를 대했다.

이 영화는 그런 진심들이 묻어난 영화였다.

그래서 대화 사이의 공백이 지루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 진하고 깊게 다가왔다.

결국 모든 게 다 말이었다.


건넸던 모든 것이 진심이었으므로 그들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어도 이루어진 것이다.



가르치고, 여행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글을 씁니다.
저서로는 “첫날을 무사했어요” 와 “버텨요, 청춘”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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