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상업의 미묘한 줄타기
필자는 알랭 드 보통을 다양한 분야의 다양한 주제를 다양하게 풀어내는 잡식성 작가라고 부르고 싶다.
사실 좀 더 깊게 들어가 보면 그는 대학에서는 역사학을 공부했으며, 대학원에서는 철학을 공부한 작가보다는 철학자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우리가 철학자를 생각했을 때 떠올릴 수 있는 이미지를 그는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좀 더 개방적이며 좀 더 대중적이다.
쉽게 말해서 우리가 철학자라는(쉽게 떠올릴 수 있는 이미지로 말이다) 직업(?)을 생각했을 때 떠올리기 쉬운 흰머리와 수염, 다소 무거워 보이며, 약간은 보수적이고, 꼰대스러운 느낌이 그는 없다. 뭐, 물론 필자가 가지고 있는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이다.
그는 국내에서 철학자라기 보단 베스트셀러를 집필한 작가로 더 알려진 것은 사실이니까.
알랭 드 보통은 저서는 국내에도 여럿 소개되었듯이 유럽권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굉장히 유명하다.
다양한 분야의 주제를 글로 풀어내는 그가 그래도 가장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는 주제는 사랑의 감정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이다. 그는 사랑의 감정이 인간의 가장 근본적이고도 피할 수 없는 정신적 문제이자 행복이라고 생각한 듯싶다.
가끔은 소설도 쓰지만 주로 비문학 책을 집필하고 역사와 철학, 건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호기심이 많으며 그것에 관한 글들을 꾸준하게 쓰고 있다.
분명 그는 세상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작가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필자가 드 보통의 이야기를 좋아하고 매력을 느끼는 이유는 그의 글은 사물과 현상을 꿰뚫어 보는 날카로움뿐 아니라 그것들의 통찰을 통해 웃음을 이끌어내는 위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무겁고, 때론 현대를 사랑가는 우리가 피하고 싶은 부분들도 위트 넘처는 문체로 그것에서 거부감을 없애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작가이다.
오늘 소개할 드 보통의 책은 어떻게 보면 그의 전공(?) 분야의 책은 아닐지도 모른다.
<공항에서 일주일을>은 드 보통이 일주일간 히드로 공항에 머물며 공항에 관해 글을 써 내려간,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공항의 세세한 이야기를 담아낸 책이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철학자이자 작가인 드 보통이 공항에서 지내며 바라본 것들,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 다소 불안하게 현실을 살아내고 있는 우리에게 던진 질문들은 무엇일까?
<공항에서 일주일을>이라는 책처럼 제목에서부터 책의 내용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는 책도 드물 것이다.
이건 일종의 자신감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제목에서 이미 어떤 내용의 글들이 쓰여있는지를 밝히고 있지만, 그럼에도 필자가 망설임 없이 이 책을 들어 올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책의 주제가 가지고 있는 신선함 때문이었다.
과연 어느 작가가 이런 독특한 시도를 해보았겠는가 말이다.
우리에게 공항은 분명 일주일이나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는 곳이다. 혹시 이런저런 사정으로 계획했던 것보다 공항에 더 오래 머무르게 되면(예를 들어 비행기가 딜레이 된다거나 뭐 그런 상황들) 불만 가득한 얼굴로 탑승게이트를 뚫어져라 바라보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런 공항에서 철학가이자 작기인 드 보통은 일주일 동안 머물며 과연 무엇을 보고 느꼈을까?
내가 공항에 일주일을 머물게 되면 난 어떤 걸 할 수 있을까?
등등의 의문들과 호기심이 이 책을 집어 들게 만들었다.
물론 분명 아쉬운 점도 있다. 이 책의 기획을 제안했던 사람들은 드 보통의 표현을 빌리자면 상업의 세계에 있는 사람이다. 그 세계의 사람들은 돈의 논리 아래 모든 것을 판단하고 행동한다. 아마 드 보통에게 이런 콘셉트의 책의 집필을 제안했던 그는 드 보통의 책을 통한 일종의 홍보 효과를 노렸을 것이다.
상업 세계와 예술 세계는 불행한 동반관계인 경우가 많아 서로 강한 의심과 경멸이 섞인 태도로 바라보기 일쑤이지만, 전화를 건 사람의 회사가 출구 게이트 안쪽에서 푸드코트를 관리하고 지구의 평균 기온을 높이는 데 일조할 가능성이 높은 테크놀로지를 운용한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의 제안을 검토조차 하지 않겠다고 거부하는 것은 너무 야박하다는 느낌이 들었다._12p
그러나 나라고 해서 감추고 싶은 비밀이 없는 사람은 아니니 내가 심판을 할 입장은 아니었다. 나는 전장이나 시장에서 축적되는 돈도 고상한 미학적인 목적을 향하여 정정당당하게 방향 전환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내 머릿속에는 아테나에게 바치는 신전을 짓는 데에 전리품을 사용한 고대 그리스의 조급한 정치가들, 유쾌한 얼굴로 봄을 기념하는 섬세한 벽화를 그리게 하던 무자비한 르네상스 귀족들이 떠올랐다._13p
드 보통도 이 프로젝트를 처음 제안받았을 때 어느 정도의 고민을 했다. 하지만 결국 그가 이 제안을 받아들인 데에는 상업 세계도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내느냐에 따라 철학적, 미적 영역으로 편입될 수 있다는 믿음이었을 것이다.
드 보통은 평소에도 철학적 영역이 그저 테이블 위에서 나누어지는 담론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실제 삶의 영역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러므로 그의 다른 작품에서도 그는 끊임없이 철학적 질문을 우리의 일상성에 던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공항에서 일주일을>에서도 공항이 대표하고 있는 상업성 속에서 우리가 찾아낼 수 있는 인간의 본성과 그것이 나아가야 할 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공항이라는 장소는 굉장히 특별한 장소이다.
필자는 공항을 좋아한다. 여행을 좋아하고 여행에 관한 책을 썼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공항이라는 장소 그 자체에 엄청난 매력을 느끼고 있다.
종종 일상이 답답하지만 당장 떠날 수 없을 때 인천공항에 가서 출국 게이트 앞에 몇 시간을 앉아 있다 온 적도 있었다.
공항이라는 제한된 장소에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감정들이 녹아있다.
만남의 순간, 헤어짐의 순간.
누군가를 떠나는, 떠나보내야 하는 슬픔.
재회의 기대를 품고 내딛는 첫 발걸음들 까지.
문득 올려다본 하늘에 떠 있는 비행기.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던 몇 가닥의 순간들.
착륙 중이건 이륙 중이건 비행기들이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감정들을 싣고 모이는 곳.
그것 자체로 출발이자 동시에 도착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곳. 그러므로 절대로 지루할 수 없는 곳.
그곳이 바로 공항이다.
보통 좋은 여행이라고 하면 그 핵심에는 시간이 정확하게 맞아 들어간다는 점이 자리하기 마련이지만, 나는 내 비행기가 늦어지기를 갈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야 어쩔 수 없는 척하면 조금이라도 더 공항에서 뭉그적거릴 수 있으니까._10p
혼돈과 불규칙성이 가득한 세계에서 터미널은 우아함과 논리가 지배하는 훌륭하고 흥미로운 피난처로 보인다. 공항 터미널은 현대 문화의 상상력이 넘쳐나는 중심이다. 만약 화성인을 데리고 우리 문명을 관통하는 다양한 주제들-테크놀로지에 대한 우리의 신앙에서부터 자연 파괴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상호 관계성에서부터 여행을 로맨틱하게 대하는 태도에 이르기까지-을 깔끔하게 포착한 단 하나의 장소에 데려가야 한다면, 우리가 당연히 가야 할 곳은 공항의 출발과 도착 라운지밖에 없을 것이다._16p
드 보통도 이런 공항에 큰 매력을 느꼈다. 그는 책을 집필하는 동안 공항이라는 정해진 장소에 머물며 글을 썼기 때문에 그에게 공항은 특정한 장소였다. 그러니까 일주일간 드 보통의 목적지는 오로지 공항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공항 자체가 목적지가 될 수는 없다.
우리에게 공항은 출발과 도착의 첫 관문일 뿐이다. 배행기를 타고 내리는 정류장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건조하게 공항을 명명하기엔 공항은 그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공항이라는 곳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장소가 아닌 장소
다시 한번 말하지만 <공항에서 일주일을>은 드 보통이 일주일간 공항에 머물면서 공항 그 자체와 그 안의 사람들을 관찰하며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낀 것을 적어 내려 간 책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이 책을 통해서 우리가 알지 못했던 공항의 여러 모습들을 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면 공항에서 일하는 사람들 모습과 공항이라는 거대한 시스템을 별 탈 없이 흘러가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는 그들의 모습들. 또 공항 뒷 편의 여러 물리적인(기계적인) 시스템들 까지.
하지만 이 책이 좋았던 점들은 결국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점이다.
대합실의 분위기는 쓸쓸하다. 그러나 묘하게도 그 느낌은 자비롭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그렇기 때문에 혼자만 외로울 경우에 겪을 수도 있는 불편이 없고, 그래서 역설적으로, 혼잡한 도시의 술집이 분명히 더 쾌활하기는 하겠지만, 그런 환경에서는 가능하지 않을 것 같은 방식으로 새로운 만남을 시도하는 것이 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_157p
그러나 수하물 찾는 곳은 공항의 감정적 클라이맥스의 서막일 뿐이다. 아무리 외롭고 고립된 사람이라도, 아무리 인류에게 비관적인 사람이라도, 월급을 줄 걱정에 시달리는 사람이라도, 도착했을 때 누군가 의미 있는 사람이 맞으러 나와주기를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_ 186p
우리는 모든 것을 잊는다. 우리가 읽은 책, 일본의 절, 룩소르의 무덤, 비행기를 타려고 섰던 줄, 우리 자신의 어리석음 등 모두 다. 그래서 우리는 점차 행복을 이곳이 아닌 다른 곳과 동일시하는 일로 돌아간다. 항구를 굽어보는 방 두 개짜리 숙소, 시칠리아의 순교자 성 아가타의 유해를 자랑하는 언덕 꼭대기의 교회, 무료 저녁 뷔페가 제공되는 야자나무들 속의 방갈로. 우리는 짐을 싸고, 희망을 품고, 비명을 지르고 싶은 욕구를 회복한다. 곧 다시 돌아가 공항의 중요한 교훈들을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만 하는 것이다._205p
세상에서 사람과 엮이지 않고, 사람들이 가진 감정을 품지 않고 온전히 의미를 가지고 있는 장소는 없을 것이다.
결국 장소가 의미를 갖기 위해선 사람을 배재하면 안 되는 것이다.
순간순간 자신이 가진 충실한 감정을 표현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모여있는 공항에서 우리는 어쩌면 삶의 짧지만 진한 순간을 만나게 될 것이다.
드 보통이 히드로 공항에서 일주일을 머물며 관찰했던 것은 결국 사람이었다.
수많은 국가의, 수많은 도시의, 수많은 연령과 각양각색의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는 공항이겠지만 그 안의 감정들은 진실되고 적극적이며, 결국은 동일했다. 누구나가 가지고, 가질 수 있는 진한 감정들이 여과 없이 아름답게 빛나던 공항을 그는 책을 통해 전하고 있다.
처음 <공항에서 일주일을>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필자가 처음 기대했던 느낌과 감성은 영화 <터미널>의 그것이었다.
아버지의 추억과 기억을 따라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던, 하지만 그가 비행기에 올라 하늘 위에 있는 동안 자신의 나라가 사라져 버려 미국에 입국하지 못하고 공항에서 머물러야만 했던 그의 이야기. 그에 의해서 변화되고 또 그들에 의해서 변화되는 주인공의 이야기가 녹아있는 영화 <터미널>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것과는 살짝 다르다. 물론 다르다 뿐이지 드 보통이 바라본 공항의 표정이 틀리지 않았다.
공항이라는 장소의 특별함과 그것이 가지고 있는 감성. 그 장소의 사람들 까지.
드 보통은 그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날카로운 관찰력과 위트 넘치는 문체로 공항의 표정을 적어 내려 간 책이 바로 <공항에서 일주일을>이다.
필자는 공항에 가는 것이 좋아 여행을 간다고 말할 정도로 공항을 좋아한다.
공항에 가는 것만으로도 이미 또 다른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 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여행을 다녀온 기본이었다.
공항으로, 그리고 사람으로의 여행을.
가르치고, 여행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글을 씁니다.
저서로는 “첫날을 무사했어요” 와 “버텨요, 청춘”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