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게 지중해의 찬란한 햇살 때문이야
수년 전부터 우리나라에도 일명 "고전 읽기"열풍이 분 적이 있다. 그리고 그 열풍은 차츰 수그러들었겠지만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다.
그 시절 고전읽기의 여풍 가운데 필자가 다시 한번 손에 집었던 책이 바로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이었다.
카뮈는 필자가 상당히 좋아하는 작가 그룹에 속해 있었다. 그리고 <이방인>은 아마도 대학생 시절에 처음 읽었던 것 같다. 그 시절 지성의 근처에 가보지도 못했으면서 허세만 잔뜩 품고 있었기에 <이방인>정도는 응당 읽어야만 하는 책이라고 생각했었으니까.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게 <이방인>을 손에 들고 누구라도 봐주라는 듯 캠퍼스를 돌아다녔던 본인이 조금은 부끄러워지기도 하지만 말이다.
카뮈만큼 정치적 색이 강한 작가도 드물 것이고, 카뮈만큼 정치적 풍파를 많이 겪었던 작가도 드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수많은 굴곡들이 어쩌면 그의 문학의 거대한 기둥을 이루는 하나의 이론적 관점과 철학을 만들어 줬을 것이다.
여기에서 일일이 그의 삶을 나열하는 것은 한편의 논문을 써야 될 정도로 방대할 것이기 때문에 이 정도에서 갈음하고(이 매거진은 책을 소개하고 리뷰하는 것이기 때문에) 필자가 생각하는 카뮈에 대해 몇 자 적어보겠다.
무슨 별 다른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그는 상당히 잘 생겼다. 그리고 상당히 멋있다.
아마 카뮈를 대표하는 이미지는 바로 위의 사진처럼 피코트를 입고는 입에 담배를 물고 있는 모습일 것이다. 정말이지 그 모습은 언제봐도(필자는 남자이긴 하지만) 멋있다.
카뮈 자신도 자신의 그런 잘생김(?)을 알았는지도 모르겠다. 결혼 전에도, 결혼 후에도 그는 충분히 얼굴값(?)을 하는 생활을 했었으니까. 지금이야 결혼이라는 사회 제도와 사랑이라는 감정을 구분 지어 생각하는 것이 어느 정도 용인된 시대라고 하지만 카뮈가 활동했던 1900년대 초밴을 생각해본다면 순간적인 감정에 휩쓸렸던 그의 사생활은 상당히 이례적이고 어떤면에서는 대단한 것이었다. 뭐 그것이 부럽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정말로.
카뮈의 삶을 관통하고 있는 철학은 상당히 굳건하고 견고하다. 카뮈가 움켜쥐고 있던 철학은 문학적으로는 "부조리"이고, 삶에서는 "전체주의에 대한 반대"였다.
여기서는 문학적 부분에 집중해서 이야기해 보겠다.
"우주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것은 거대한 고독뿐이다."
"만약 아무것도 의미를 가진 것이 없다 하더라도, 그것은 옳을 것이다. 그러나 어딘가에 여전히 의미를 가지는 것은 존재한다."
그가 했던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카뮈는 끊임없이 삶과 그를 둘러싼 세상에 대해 질문을 던진 작가였고, 약간의 허무와 고독에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았다. 그리고 카뮈가 스스로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이 집약적으로 나와있는 작품이 <이방인>이 아닌가 필자는 생각한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근조.' 그것만으로써는 아무런 뜻이 없다.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_9p
나는, 일요일이 또 하루 지나갔고, 엄마의 장례식도 이제는 끝났고, 내일은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하겠고, 그러니 결국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_32p
주인공 뫼르소가 어머니의 부고 소식을 듣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그리고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뫼르소의 반응은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엔 상당히 이상하고 어색하다. 냉담하고 건조하다.
뫼르소가 맞닥뜨리건 부모의 죽음이었다. 자신에게 삶이란 것을 선물해준, 자신의 많은 부분이 닮아있는 어머니의 죽음. 하지만 뫼르소는 그게 뭐 어떤가? 그것이 나의 삶 자체에는 아무런 변화를 주지 못한다, 라는 반응이다. 오히려 토요일이 가면 일요일이 오는 것처럼 어머니의 죽음도 자연스레 흘러가는 뫼르소의 시간 속에서 별 의미 없는 사건일 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이 장면은 이 소설에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후에 벌어지는 그가 저지른 살인 사건의 재판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대하는 뫼르소의 이런 이상하고 어색한 태도는 그의 범죄를 계획적이고 잔인한 살인으로 몰아간다. 어머니의 죽음에서조차 냉담하게 반응했던 그는 충분히 살인을 저지를만한 사람이라고 세상이 낙인을 찍는 것이다.
조금 뒤에 마리는 나에게 자기를 사랑하느냐고 물었다. 그런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이지만, 사랑하는 것 같지는 않다고 나는 대답했다. 마리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점심을 준비하면서 아무것도 아닌 일에 또 웃어 댔으므로, 나는 키스를 해 주었다. 바로 그때 레몽의 방에서 말다툼 소리가 터져 나왔다._44-45p
뫼르소는 철저하게 자신이 느끼는 감정에 충실한 사람이며, 그것을 표현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자신이 그 순간 자신의 눈 앞에 놓인 사람과 사건에 대해 느끼는 감정 그 자체가 옳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다른 사람의 시간이나 감정으로 왜곡되는 것을 신경 쓰지 않는다. 뫼르소가 마리에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부분에서도 조금은 잔인하지만 정확하게 뫼르소의 철학이 드러난다.
모두가 각자의 기준으로 타인을 판단해 버리고 마는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오롯이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그것으로 충실하게 살았던 뫼르소는 어쩌면 진정한 삶의 승자이지 않았을까?
내것이 아닌 세상이나 타인에 나에게 강요하는 감정을 내 것이라 착각하고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 보다 말이다.
소설 <이방인>에서 주인공 뫼르소는 누구나 죽는다, 라는 명제를 인정한 사람이었다. 결국 그것을 제외하면 도대체 우리의 삶에 의미 있는 것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뫼르소를 통해 카뮈는 우리에게 묻고 있다.
다만 이마 위에 울리는 태양의 심벌즈 소리와, 단도로부터 여전히 내 앞을 뻗어 나오는 눈부신 빛의 칼날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그 타는 듯한 칼날은 속눈썹을 쑤시고 아픈 두 눈을 파헤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기우뚱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바다는 무겁고 뜨거운 바람을 실어왔다 온 하늘이 활짝 열리며 비 오듯 불을 쏟아붓는 것만 같았다. 나는 온몸이 긴장해 손으로 권총을 힘 있게 그러쥐었다. 방아쇠가 당겨졌고, 권총 자루의 매끈한 배가 만져졌다. 그리하여 짤막하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나는 땀과 태양을 떨쳐 버렸다. 나는 한낮의 균형과, 내가 행복을 느끼고 있던 바닷가의 예외적인 침묵을 깨뜨려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나는 그 움직이지 않는 몸뚱이에 다시 네 방을 쏘았다. 총탄은 깊이, 보이지도 않게 들어박혔다. 그것은 마치, 내가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짧은 노크 소리와도 같은 것이었다._69-70p
소설에 표면적으로 드러난 가장 큰 사건은 바로 뫼르소가 바닷가에서 아랍인을 총으로 쏴 죽인 사건일 것이다. 사실 그가 아랍인을 죽여야만 했던 이유는 소설 속에서는 합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굳이 이유를 찾아보라면 소설에서 자주 언급되는 지중해의 햇살일 것이다.
햇살이라는 것 자체가 가지는 의미는 열정, 밝음 따위의 것이다. 그러므로 독자인 우리는 이 햇살의 의미와 뫼르소의 살인을 연관 지어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아니, 전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햇살과 뫼르소의 살인은 동떨어져 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또, 합리적으로 설명되지는 않는다. 결국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우연이 겹치고 쌓여 완성되는 것이다. 만약 눈부셨던 지중해의 햇살 때문에 뫼르소가 아랍인을 살인했다면 뫼르소에겐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그 결과 엄마의 장례식 날 '내가 무심한 태도를 보였다'는 사실을 조사원들이 알아냈다는 것이었다. "사실 당신에게 이런 걸 묻는 것은 거북한 일이지만, 이건 매우 중요하니다. 그리고 만약에 내가 거기에 답변할 만한 것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그것이 검사 측에는 중대한 논거가 될 것입니다" 하고 변호사는 말했다._75p
나는 내가 다른 사람들과 다를 게 없다는 것, 조금도 다를 게 없다는 것을 그에게 딱 부러지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것은 결국 별로 소용이 없는 일이었고 또 귀찮기도 해서 단념하고 말았다._76p
문제는 뫼르소가 살인죄로 감옥에 가게 되고 검사와 판사가 그를 심문하고 재판하는 과정에서 나타난다. 그들은 뫼르소의 "살인"이라는 행위에 집중하지 않고, 그가 어머니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에서 살인의 원인을 찾아내고 집요하게 그것을 캐묻는다. 하지만 뫼르소의 입장에선 어머니의 죽음과 그가 저지른 살인은 어떠한 연관성도 갖고 있지 않는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각자의 논리를 가지고 사람을 판단한다.
그리고 그런 왜곡되고 아집으로 뭉친 판단들이 우리를 모두 이방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뫼르소는 자신에 대해서는 말은 상당히 아끼는 편이다. 스스로의 안에서는 충분히 합리적이고 그럴듯한 이유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들을 기준으로 상대방을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결국, 뫼르소가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듣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런 세상 속에서 우리는 이방인이 되기도 하고, 다른 누군가를 이방인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때, 왜 그랬는지 몰라도, 내 속에서 그 무엇인가가 툭 터져버리고 말았다. 나는 목이 터지도록 고함치기 시작했고 그에게 욕설을 퍼부으면서 기도를 하지 말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사제복 깃을 움켜잡았다. 기쁨과 분노가 뒤섞인 채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끼며 그에게 마음속을 송두리째 쏟아 버렸다. 그는 어지간히도 자신만만한 태도다. 그러지 않고 뭐냐? 그러나 그의 신념이란 건 모두 여자의 머리카락 한 올만 한 가치도 없어. 그는 죽은 사람처럼 살고 있으니.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신조차 그에게는 없지 않으냐? 보기에는 내가 맨주먹 같을지 모르나, 나에게는 확신이 있어.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 그보다 더한 확신이 있어. 나의 인생과 닥쳐올 이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 그렇다, 나한테는 이것밖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이 진리를, 그것이 나를 붙들고 놓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굳게 붙들고 있다. 내 상각은 옳았고, 지금도 옳고, 또 언제나 옳다. 나는 이렇게 살았으나 , 또 다르게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_133p
소설 <이방인>에서 주인고 뫼르소가 자신의 감정을 격정적으로 표현하는 부분은 소설의 말미에서야 등장한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그러니까 어머니의 장례식이나 살인 사건에 대해서, 어떤 꾸밈이나 감정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던 뫼르소가 자신을 위해 기도를 해주러 온 사제 앞에서 폭발한 것이다.
뫼르쇠는 자신의 인생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살아있는 사람답게 살아가고 있는 자신이, 자신의 삶에 대해 철저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 자신이 어떠한 확신조차 보이지 못하고 있는 사제보다 낫다고 말한다.
우리는 삶에 확신을 가지고 있는가?
그 확신이 옳다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많은 것이 흔들리고 모호한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방인인 우리를 붙잡아 줄 수 있는 건 우리가 믿고 있는 것에 대한 확신이고, 그 확신들에 대한 믿음이다.
그것들 조차 온전히 품고 있지 못한 우리가, 그것들의 견고한 반석 위에 서있는 뫼르소에게 과연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소설 <이방인>은 136페이지의 비교적 짧은 소설이다. 그리고 소설이 끝나고 책의 역자인 김화영은 상당한 분량의 책의 해설을 적어 놓았다.
이미 고정되어 변하지 않는 화석이 돼버린 작품에 대한 해석은 매우 다양한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다. 그래서 필자는 언제까지나 해설은 참고일 뿐 그것만의 관점으로 책을 읽는 것은 권하지 않는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소설 <이방인>은 작가 카뮈의 인생과 철학과 사상에 매우 근접해있는 작품이다. 그리고 책의 해설엔 카뮈라는 사람 자체에 대한 설명을 덧붙임으로써 <이방인>을 좀 더 쉽게 이해하고 느낄 수 있는 일종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책의 양도 많지 않으니) 136페이지를 끝으로 책을 덮지 말고 조금만 더 힘을 내서 책의 해설까지 읽기를 권한다. 그렇다면 더욱 농밀하게 이방인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고전이라는 틀에 갇히지 않더라도 카뮈의 <이방인>이 전하는 메시지는 결코 가볍지 않다.
부조리에 항거하고, 자신만의 굳은 신념(그것은 죽음과 고독에 대한)을 인간이 본질적으로 품게 되는 이상해 보이지만 누구나 가지고 있는 감정으로 표현해낸 작품이다.
카뮈는 본질적으로 "허무"에 대하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그가 가지고 있는 확신이었으므로, 우리는 그에게 그것에 대한 합리적인 이유를 대답하라 말할 권리가 없다.
그것이 설사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영역이라 할 지라도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상대가 가지고 있는 어떤 것들을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그것을 인정하지 못할 때, 우리는 서로를 이방인으로 만들어 버린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 법정에 섰던 뫼르소를 어느 순간 필자 본인으로 느끼고, 그에게 감정 이입을 하고, 나도 어쩔 수 없는 이방인임을 인정했을 때, 필자는 작가 카뮈가 폭력과 무기력, 나태와 무관심, 삶에 대한 갈증과 그 모든 것을 뒤덮어 버리는 지중해의 눈부신 햇살로 써 내려간 <이방인>의 세상을 조금은 인정할 수 있었다.
가르치고, 여행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글을 씁니다.
저서로는 “첫날을 무사했어요” 와 “버텨요, 청춘”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