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 소설이 시작된 깊은 우물
무라카미 하루키는 필자가 별 다른 설명을 첨언하지 않더라도 국내에서 소개된 일본 작가 중 가장 유명한 작가일 것이다. 폭넓은 독자층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깊고 탄탄한 마니아 층을 형성하고 있다.
이미 국내에 번역된 그의 단편소설, 장편소설, 에세이만 해도 수 십 권이 넘으며 그의 책 출판 소식만으로도 큰 뉴스거리가 되는 작가이다. 또 그의 책은 출판과 동시에 수십 개국에 번역되어 소개되기도 할 만큼 이미 세계적인 작가이다.
어느 작가에게나 그렇듯 그 시작이 있다.
어떤 계기로 글을 쓰게 되었으며, 그 작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가 모든 작가의 첫 작품에 녹아 있다.
오늘 소개할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데뷔작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이다.
이 책은 전통적인(그러니까 문학을 전공한) 작가들과는 태생이 다른 하루키를 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한 작품이므로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필자는 감히 이 책을 이렇게 말하고 싶다.
하루키 소설이 시작된 깊은 우물
이 소설을 쓰기 시작한 계기는 실로 간단하다.
갑자기 무언가가 쓰고 싶어 졌다. 그뿐이다.
정말 불현듯 쓰고 싶어 졌다.
하루키는 책의 첫머리에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쓰게 된 계기를 분명하고 확실하게 말해주고 있다.
필자는 소설가란 모름지기 세상을 향해 이야기를 건네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겪었고 고민하고 생각했고, 그러므로 해야 할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는 직업이 소설가이다.
하루키는 분명 전통적인 기존의 작가들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와세다 대학 문학부에 진학했지만 그의 전공은 연극이었다. 그리고 대학 졸업 후에도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재즈바를 경영하는 사업가였다. 그랬던 그가 어느 날 관중석에서 야구 경기를 보다가 불현듯 무언가를 쓰고 싶어 진 것이다.
하루키는 '불현듯' 이란 말을 썼지만 필자는 결국 세상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하루키의 내면에 쌓이고 쌓여 밖으로 터져 나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글을 쓰지 않고 살아왔지만 결국 글을 써야 할 운명.
이런 운명의 이끌림으로 하루키는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집필하기 시작한다.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 '나'가 이끌어 간다. 주인공이 본 것, 들은 것, 이야기한 것, 겪었던 것들의 잘게 쪼개어 소설의 주를 이루고 있다. 작가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처음 소설을 쓰는 하루키로서는 어쩌면 1인칭 시점이 글을 쓰기 수월했을지도 모른다. 1인칭 소설의 장점은 주인공 이외의 다른 인물의 감정이나 특징에 대한 폭넓은 표현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이야기는 주인공인 '나'가 바라보는 시선으로 진행되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 소설은 하루키의 자전적인 소설이다. 부러 드러내진 않지만 주인공인 '나'의 모습에서 독자들은 작가 하루키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이 택하고 있는 1인칭 시점은 독자로 하여금 좀 더 높은 몰입도를 가져다준다.
소설의 주인공인 '나'와 핵심 인물인 쥐, 그녀, 그리고 바의 주인인 제이까지. 물론 쥐와 제이를 이름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은 그건 이름이라기보다는 상징에 가깝다. 더군다나 쥐와 제이는 후에 발표한 하루키의 소설에서도 등장을 하므로 상당히 중요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왜 인물들의 이름이 나오지 않았을까?
게다가 쥐와 제이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필자는 책을 읽으면서는 사실 이것에 대해 큰 신경을 쓰진 않았지만 읽고 난 후 리뷰를 작성하려고 책을 다시 들춰보면서 조금의 궁금증을 갖게 되었다.
아쉬는 부분은 하루키 본인이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다는 것이다. 어느 작가에게나 데뷔작은 큰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데뷔작이 작가 본인의 그릇을 넘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하루키가 인물들의 이름을 특정하지 않았던 것은, 온전히 필자의 추측이지만, 그 시절(그러니까 1960년대 일본)의 대표적인 인물상을 소설의 인물에 투영하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그러니까 이 소설의 인물들은 독특하고 특정한 어느 한 사람이 아니라 그 시절을 겪어냈던 그 시절의 일반적인 일본 사람들일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작품은 하루키의 첫 작품이다.
이 말은 이 소설을 쓸 당시만 해도 하루키는 소설가가 아니었단 말이다.
당시 그의 생업은 재즈바를 경영하는 것이었다. 하루키의 에세이에도 여러 번 언급되었지만 하루키 본인은 재즈바를 경영하는데 나름의 즐거움을 갖고 있었다. 또 이때의 경험들이 하루키에게 깊은 음악적 소양(특히 재즈)을 갖게 해 주었고, 후로 하루키의 작품에서 그는 이 음악적으로 풍부한 상식들을 드러내고 있다.
하루키는 재즈바의 영업을 마치고 늦은 새벽 집에 돌아와 부엌의 여린 조명 아래서 이 소설을 써내려 갔다. 어느 날은 짧은 한 문단만을 썼을 것이고 또 피곤한 날은 한 문장만을 적어 내려갔을 것이다.
하루키 본인도 밝혔지만 매일 조금씩 단락을 지어, '오늘은 여기까지'란 식으로 써나 간 것이다. 그런 이유로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호흡이 짧고 문장 구조도 단편적이며 각 장의 분량도 매우 적다.
이런 이유로 이 소설에 대한 평은 엇갈린다.
누구는 위대한 작가의 탄생이라고 하기도 하고, 누구는 이게 소설이면 나도 쓰겠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만약 이 소설을 다른 하루키의 유명한 소설 <상실의 시대>, <1Q84>등 보다 먼저 읽었다면 '뭐지? 이 소설은? 이것도 소설인가?'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이 작품으로 하루키에게 "군조신인문학상"을 준 관계자도 "자네 소설은 문제가 많아."라고 말했을 정도니까 말이다.
하지만 필자는 이런 하루키의 짧은 호흡의 문장을 굉장히 좋아한다.
글을 쓰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어려운 것은 글을 짧게 쓰는 것이다. 장황하게 늘어진 글들은 가독성이 떨어진다. 반면에 하고 싶은 많은 이야기를 짧은 호흡의 문장에 담아 풀어내는 것은 정말이지 어려운 일이다. 하루키는 본능적으로 그 어려운 일을 자연스럽게 해내는 작가이다. 그리고 그 점이 하루키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닌가 싶다.
모든 것이 전부 동일하다고 말할 순 없겠지만 일본은 사회적, 문화적 변화를 우리나라보다 20년 정도 먼저 겪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가 겪었던 것이 민주화에 대한 격렬한 갈망이었다면 일본은 미국의 제국주의와 고도성장장에 따른 물질 만능주의에 대한 투쟁이었다.
다행인 건지 안타까운 건지 하루키는 이 학생운동에서 살짝 비켜난 존재였다.
그는 격렬했던 학생운동에 직접 참가하지 않은 채 옆에서 지켜보며 시대적 흐름이나 역사적 소명보다는 개인의 연애와 자신의 감정에 몰두했다.
결국 하루키가 집중했던 것은 경제적 부흥 속에서도 개인이 필연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었던 정서적 공허함이었다.
필자는 그것에 옳고 그름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필연적으로 60년대 일본 학생운동(흔히 말해 전공투) 시기의 하루키가 가졌던 입장은 후에 그의 작품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그 점이 그 시절 당시 일본 청춘들이 겪었던 역사적 시련을 꼼꼼하게 다뤘던 작가 무라카미 류와 하루키가 구분되는 점일 것이다.
하루키는 그의 소설에서 학생운동 당시 사회상에 대해선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시절 개인이, 그리고 한 청춘이 가졌던 정서적 공허함에 대해선 누구보다 날카롭게 풀어내고 있다.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도 이 관점에서 바라보면 지금 우리나라, 우리 시대, 우리 청년들이 겪고 있는 정서적 공허함을 대변하기도 할 것이다.
소설은 1970년 8월 8일에 시작해서 17일간 펼쳐지는 "나"와 "쥐" 그리고 "그녀"의 이야기이다.
소설은 밝지 않다. 희망적이지 못하다.
이 시절 일본은 쉽게 말해서 살만한 나라였다. 그러므로 주인공들 또한 물질적으로 어려움을 겪진 않는다. 물론 "쥐"의 집은 상당히 부자이고, "나"의 집은 그에 비해 가난하지만 그것이 주인공으로 하여금 어떤 결핍을 가져다 주진 않는다.
결국 중요한 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내면 속의 상실과 공허함, 이라고 하루키는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공허함과 상실은 후의 하루키의 작품 세계를 지탱해주는 큰 기둥이 된다.
풍요함 가운데 메마른 정서를 하루키는 가볍고 간결한 문장으로 풀어놓는다.
회복될 수 없는 깊은 상실감을 대수롭지 않은 투로 설명한다.
지금 우리나라를 살 만한 나라라고 말 하기는 힘들지도 모른다.
이 시대 청년들이 겪어내고 있는 건 어쩌면 정서적인 부분보다는 물질적 상실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건 물질이 아니라 정서적 공허함일 것이다.
물질의 거대함에 압도되어 정서적 상실감에 대한 깊은 성찰과 회복이 없다면, 우리는 과연 온전한 스스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필자는 하루키를 굉장히 좋아한다. 하루키 덕후이다.
누군가 하루키의 책을 필자에게 추천해달라고 하면 필자는 망설이지 않고 <상실의 시대>를 추천한다.
하지만 정말 본격적으로 하루키의 작품을 읽고 싶다면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추천할 것이다.
이 책은 하루키의 문학 세계가 시작되는 깊은 우물과도 같다.
간결한 언어로 풀어낸 슬프고도 애틋한 메마른 청춘의 이야기 속에서 하루키는 그가 겪어냈던 청춘의 시절을 담아낸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무언가를 건네고 있다.
삶을 살아냄에도 공허하다면,
가진 것도 갖고 싶은 것도 없는 청춘이라면,
그럼에도 온전한 스스로로 살아가고 싶은 청춘이라면 이 책을 읽어보길 추천한다.
가르치고, 여행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글을 씁니다.
저서로는 “첫날을 무사했어요” 와 “버텨요, 청춘”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