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다가가는 속도
사실 필자는 애니메이션을 그다지 즐겨보지 않는다.
우선 전 세계의 애니메이션 시장을 휩쓸고 있는 디즈니 발 할리우드의 애니메이션 영화에 감동을 받기엔 난 이미 너무 늙어버렸고(물론 그것들에게도 성인에게 어필할 수 있는 감동의 요소는 분명히 있겠지만),
"미야자키 하야오"로 대변되는 일본의 애니메이션은 뭐랄까... 너무 판타지적 요소가 강하다고 할까?
그런 저런 이유로 조금은 더 현실적인 상황들을 실존 인물들이 풀어내는 영화를 즐겨보는 편이다.
누누이 말하지만 취향이라는 건 필자의 삶에서 꽤 커다란 부분이고, 그러므로 존중받아야 한다. 스스로에게도 타인에게도 말이다.
그런데 필자가 애니메이션 영화인 <초속 5센티미터>를 우연한 계기로 보게 되었고, 그만 이 영화에 푹 빠져 버리고 말았다. 미리 말하자면 <초속 5센티미터>는 할리우드 애니메이션이 가지고 있는 권선징악의 진부한 감동도 없고, "미야자키 하야오"작품의 판타지적 요소도 가지고 있지 않다. 굉장히 현실적인 문제를 그보다 더 굉장히 담담하게 풀어낸 영화이다. 쉽게 말해서 애니메이션이긴 하지만 철저하게 필자의 취향을 만족시킨 영화였다.
필자는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피천득"선생님의 수필집 <인연>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그리워하는 데도 한 번 만나고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 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영화 <초속 5센티미터>와 수필집 <인연>을 관통하고 있는 주제를 두절(斷絕)과 단절(斷絕)이라고 필자는 주관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어쩔 수 없음이 두절,
그래야만 했음이 단절.
멀어져 버린 공간과, 의지와 무관하게 계속해서 흘러가버린 시간. 그것들의 간격을 좁히기 위한 주인공의 속도.
어느 순간엔 어쩔 수 없이 멀어져야 했으며, 어느 순간엔 노력을 놓아 버리기도 했을 것이다.
그 사이, 두절과 단절의 의미를 영화 <초속 5센티미터> 속에서 한 번 찾아보기로 하자.
영화 <초속 센티미터>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우선 이 영화의 감독 "신카이 마코토"에 대해서 좀 알아볼 필요가 있다. 감독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과 그것을 어떤 식으로 작품에 투영했는지를 파악해보면 영화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신카이 마코토"라는 이름을 대중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준 작품은 2016년에 개봉한 <너의 이름은> 일 것이다.
그렇다. 이미 대부분은 알고 있었겠지만 <너의 이름은>과 <초속 5센티미터>는 모두 "신카이 마코토"감독의 작품이다.(다들... 알고 계셨지요...?)
순서로만 따지면야 2007년 작품인 <초속 5센티미터>가 2016년 작품인 <너의 이름은>보다 훨씬 먼저 제작된 작품이기도 하고, "신카이 마코토"감독을 일본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서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은 작품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보다 먼저 제작된 짧은 영화인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 <별의 목소리>,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등도 있으니 기회가 된다면 한 번 찾아 보길 권한다.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 <별의 목소리>는 상당히 짧은 작품이기 때문에 부담 없이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고양이 두 마리를 키우고 있어서 그런지 개인적으로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도 꽤 재밌게 봤었다.
"신카이 마코토"감독이 영화의 제목이나 부제를 작명하는 센스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탁월하다.
다른 영화는 차치하고서라도 <초속 5센티미터>의 작명은 과히 예술적이다,라고 말하고 싶다.
<벚꽃이 떨어지는 속도 초속 5센티미터_
어느 정도의 속도로 살아가야, 너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라는 제목만 봐도 그냥 뭉클하다.
아카리 : "있잖아. 초속 5센티미터래."
타카키 : "응? 뭐가?"
아카리 : "벚꽃이 떨어지는 속도 초속 5센티미터."
사실 누가 떨어지는 벚꽃잎을 보며 속도를 생각할 수 있을까? 또 속도라는 지극히 정확하고 눈이 보이며, 물리적인 단위가 어떻게 하면 저렇게 많은 감정을 품을 수 있을까? 떨어지는 벚꼭이야 당연히 뭉클하지만, 그 뭉클함을 그대로 언어에 담에 표현하는 능력은 분명 대단한 것이다.
그건 대학에서 "영화"가 아니라 "국문학"을 전공한 "신카이 마코토"감독 만의 언어적 감성일 것이다.
"빛의 작가"라고 불릴 만큼 그의 영화는 빛의 양과 각도에 따라서 미세하게 변하는 세상의 색감을 잘 포착하고 그려내고 있다. 그가 표현해낸 영화의 장면 하나하나는 그대로 캡처해서 내 노트북의 배경화면을 해놓고 싶을 만큼 아름답다.
그건 그가 가지고 있는 뛰어난 관찰력 때문일 것이다. 빛에 의해 반사되는 일상의 사물 하나하나에, 배경 하나하나에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관찰을 하고, 그것들을 포착해 내는 능력.
그가 영화 속에서 빛으로 그려낸 아름다운 그림들은 우리가 일상에서 매일 마주치고 지나갔던 일상적인 장명들을 다시금 소중하게 바라보고는 그것들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다.
그래서 비록 영화 <초속 5센티미터>가 러닝타임이 한 시간 남짓이고, 대화의 공백도 많지만 정작 관객들은 굉장히 풍성하고 꽉 찬 느낌을 받는 것이다.
"신카이 마코토"감독의 영화를 이끌어가는 대부분은 주인공의 독백이다. 아름다운 배경 위로 잔잔하게 울리는 주인공들의 목소리.
특히 영화 <초속 5센티미터>에서는 타카키와 아카리의 물리적 거리, 그리고 타카키와 스미다의 정서적 거리 때문에 그들이 서로에게 전하지 못했던 많은 이야기들이 독백으로 풀어졌고, 전해지지 않은 독백들을 오히려 더욱더 애절하고 가깝게 관객들에게 와 닿는다.
어쩌면 대부분의 사랑들이 그렇게 속으로 삼켜내야만 했던 독백으로 채워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랑 앞에서 닿지 않고, 들춰지지 않은 많은 마음들을 상대가 없는 곳에서 뱉어내야만 했던 그런 경험들이 누구나에게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의 대부분의 작품이 그러하듯이 독백은 주인공 한 명의 몫이 아니라, 등장인물 모두에게 분배된다. 때론 교차편집을 이용해서 분명 두 주인공 각자의 독백이지만 마치 대화를 이어가고 있는 느낌마저 들기도 한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영화 <초속 5센티미터>의 러닝 타임은 한 시간 남짓으로 굉장히 짧다. 사실 대부분 "신카이 마코토"의 작품들은 러닝타임이 길지가 않다. 그런데 이리도 짧은 영화 속에 다시 세 편의 단편이 들어가 있다. 그럼에도 풍성한 느낌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도 참 대단한 능력일 것이다.
타카키와 아카리의 재회를 그린 1부 <벚꽃초>,
그 후 타카키를 카나에의 시점으로 그린 2부 <코스모 나우트>,
그리고 타카키와 아카리의 마음속에 담긴 비밀을 그려낸 표제작인 3부 <초속 5센티미터> 까지.
세 단편은 시간의 흐름으로 이어져 있다. 당연히 스토리도 연결되어 있다. 물론 세 편은 영화는 시간의 순서로 이어져 있지만 그 사이의 시간은 상당히 길다. 대략 15년 남짓. 그러니까 주인공들이 겪어낸 15여 년간의 시간을 관객들은 고작해야 1시간에 이해해야 하는 불친절한 영화일지도 모르겠으나, 그 시간의 공백 동안 주인공들이 겪어야만 했던 감정의 흐름을 추측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재미는 있을 것이다. 물론 마지막 3부에서는 짧은 뮤직비디오 형식으로 공백의 시간 동안 주인공들의 삶들을 보여준다.
남자 주인공 타카키와 여자 주인공 아카리는 서로 많이 닮아 있다.
1년의 시간을 두고 도쿄의 같은 학교로 전학을 오게 된 타카키와 아카리는 자연스럽게 친해지고 늘 붙어 다니게 된다. 비슷한 정서와 비슷한 취미를 가지고 있던 타카키와 아카리는 학교에서도, 방과 후에도 많은 시간을 공유하고 더욱 친밀하게 가까워진다.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감정을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부러 표현하지 않아도 충분히 다 아는 사이.
정말로 영화 내내 둘이 사랑하는 사이입니다, 라든가 서로에게 사랑한단 말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의심의 여지없이 둘의 사이엔 사랑이라는 감정이 있다.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느껴진다.
둘 사이의 관계는 타카키의 독백을 통해서도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다.
나와 아카리는... 정신적으로 어딘가 많이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쉽게 말하면 에로스적 사랑이 아니라 아가페의 사랑이 둘 사이엔 있었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몸의 흔적보다 마음에 새긴 흔적이 더 오래도록 남아 추억의 잔상을 자꾸만 일렁이게 한다는 것을.
하지만 애틋했던 타카기와 아카리에게도 시련은 찾아온다. 같은 중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 둘은 모두 열심히 노력했다. 하지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아카리는 가족 사정으로 어쩔 수 없이 전학을 가게 된다.
가까웠던 둘 사이에 "멀어진 거리"라는 장애물이 등장한 것이다.
이미 성인이 되어버린 필자에게 저 정도의 물리적 거리는 별 문제가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가지고 있는 세상의 크기가 살고 있는 동네를 벗어나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타카키와 아카리에겐 멀어져 버린 서로의 거리가 아득했을 것이다. 세상을 절반으로 갈라 둘 사이를 가로막아버린 커다란 장벽.
"아카리."
"타카키 군. 내년에도 같이 벚꽃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
벚꽃이 흩날리던 그날, 내년에도 같이 벚꽃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아카리의 고백이, 둘의 약속이 과연 이루어질 수 있을까? 둘 사이의 장애물을 서로는 극복할 수 있을까?
둘 사이의 물리적 거리가 극복된 계기는 아카리의 편지였다.
마지막 만남이었던 초등학교 졸업식 이후로 6개월 만에 아카리의 편지로 아카리와 타카키는 다시 이어진다.
요즘 시대처럼 스마트폰이 보편화되어있고 SNS가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시대라면야 별 문제가 아니었겠지만 당시의 는 1990년대를 그리고 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주고받았던 몇 번의 편지로 물리적 거리를 극복한 타카키과 아카리는 다시 한번 시련을 맞이하게 된다. 이번에는 타카키가 더 먼 곳으로 전학을 가게 된 것이다. 전철과 기차로도 이어지지 않는 먼 섬으로.
타카키는 이사를 가기 전 아카리를 만나러 가기로 약속하고, 아카리에게로 향한다.
멀어져 버린 물리적 거리를 극복해낸 타카키와 아카리에게 이번엔 시간의 시련이 다가온다. 갑자기 쏟아진 폭설로 타카키가 탄 전철과 기차는 계속해서... 계속해서 멈춰 선다. 약속 시간인 7시는 이미 훌쩍 넘어버렸고 타카키는 눈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타카키는 절대적인 무력감을 느낀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장애물들. 그리고 그것들에 쉽게 무너져 내리고 말았던 것이 풋풋했지만 연약했던 첫사랑. 우리네 시절에 한 번쯤 겪어봤을 이야기가 녹아있었다.
전철은 그때부터 결국 2시간이나 아무것도 없는 황야에 계속 서 있었다. 단 1분이 엄청 길게 느껴지고 시간은 확실이 악의를 품고 내 위를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세게 이를 악 물고 그저 어찌 되었든 울지 않도록... 참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11시 15분이 되어서야 타카키와 아카리는 만날 수 있었다. 약속 시간이 이미 4시간이나 지났지만 그때까지 역사에서 타카키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서로에게 향했던 진실된 마음으로 타카키와 아카리는 멀어져 버린 거리와 서로에게 악의적으로 흘렀던 시간을 극복한 것이다.
필자는 1부 벚꽃초에서의 타카키와 아카리의 사랑이 가장 완벽하고 순수했다고 생각한다.
아카리를 위해서 타카키는 먼 거리를 극복했고, 타카키를 위해서 아카리는 불안했던 시간을 극복해 냈다.
서로를 위해서 노력을 하고, 그 노력이 결코 아깝지 않은 것. 그것이 사랑이지 않을까?
벚꽃을 다시 함께 보자 했던 약속은 벚꽃처럼 떨어지는 하얀 눈 아래서 이루어진다.
필자는 영화가 이대로 끝났어도 충분히 충분했을 것이란 생각을 했었다. 벚꽃 아래서 했던 약속이 계절은 바뀌었지만 벚꽃처럼 내리던 하얀 눈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것도 낭만적일 테니까.
그 순간 영원이라던가 마음이라던가 영혼 같은 것이 어디에 있는 건지 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13년간 살아온 모든 것을 함께 나눈 것 같은 그런 생각을 하고 그리고 다음 순간... 견딜 수 없이 슬퍼졌다. 아카리의 그 따스함을... 그 영혼을... 어떻게 다루면 좋을지 어디에 가져가면 좋을지 그것을 나는 몰랐기 때문이다. 우리는 앞으로 계속 함께 있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우리 앞에는 아직도 너무나도 큰 인생이... 막연한 시간이... 어찌할 도리도 없이 가로놓여 있었다. 하지만 날 사로잡았던 그 불안함은 머지않아 서서히 녹아져 갔고 그 후에는... 아카리의 부드러운 입술만이 남아 있었다.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만의 힘이 필요하다고 강하게 바랐다. 그것만을 생각하면서 나는 언제까지도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다음 날 다시 헤어진다.
아카리를 지키기 위해서 더욱 강해지겠다는 타카키의 고백. 하지만 서로에게 전해주지 못했던 마지막 편지는 어쩌면 둘의 사랑이 결국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란 걸 알려주는 건지도 모르겠다.
기차역 플랫폼에서 아카리에게 전해줄 편지를 잃어버린 타카키는 결국 아카리를 잃어버리게 되고, 끝끝내 타카키에게 전해줄 편지를 가방에서 꺼내지 못했던 아카리는 하나의 추억으로 타카키를 간직하게 되었으니까.
시간은 어느새 훌쩍 흘러 타카키는 입시를 압둔 수험생이 된다.
조금은 더 성숙해 보이고 조금은 더 슬퍼 보이는 타카키.
그렇다. 먼 섬으로 전학을 온 타카키와 아카리는 연락이 끊긴 상태다. 아카리를 잃어버린 것이다.
두절일까, 단절일까? 영화에서 아카리의 상황이 설명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타카에 집중해서 생각을 해봐야 한다. 어쩔 수 없는 두절일까, 노력이 부족한 단절일까.
물론 타카키와 아카리가 연락이 되지 않았다고 해서 타카키가 아카리를 잊은 건 아니었다.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타카키는 철저하게 아카리에 속해있는 사람이다. 마음의 대부분을 아카리에게 할당했으며 그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건네고 다른 사람을 받아들일 마음의 공간이 없다.
2부에서도 타카키는 아카리를 여전히 그리워하고 여전히 바라고 있다. 그는 보내지 못할 문자를 썼다 지웠다 반복한다. 자주 먼 곳을 바라봤고, 자주 혼자였으며 그래서 자주 외로웠다. 그 모든 것의 이유는 하나이다. 아카리의 부재.
결국 타카키는 고등학생이지만 여전히 중학교 시절의 감정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2부에서 나오지는 않았지만 아카리는 어땠을까? 그녀도 잃어버린 타카키 때문에 마음을 가누지 못했을까? 보내지 못할 문자를 몇 번이고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자신의 선택으로 타카키에게 편지를 건네지 않았던 아카리는 좋은 추억 하나를 가슴에 품고는 그런대로 잘 살아갔을지도 모르겠다.
필자는 타카키의 노력이 부족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노력했음에도 극복할 수 없었던 것이다. 둘 사이의 거리를. 혼자인 채 지냈으므로 아카리와 조금씩 멀어지게 되었고, 하지만 잊히지 않았기에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할 수도 없었던 상태.
두절이라고 하겠다. 서로의 의지가 반영되지 않았던 이별이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아직 고등학생인 타카키와 아카리에겐 성인이 된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어떤 것들이 엄청난 장애물일 수도 있을 테니까.
사실 2부에서 집중된 내용은 타카키와 아카리의 이야기가 아니라 새롭게 등장하는 소녀 스미다의 이야기이다.
타카키가 전학을 왔을 때부터 타카키를 짝사랑했던 소녀. 스미다는 타카키와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밤을 새워가며 공부를 하기도 한다. 같은 고등학교엔 진학을 했지만 여전히 자신의 마음을 전하지 못한 스미다.
매번 타카키를 몰래 기다리며 마음을 전하려 해보지만 스미다에겐 타카기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스미다와 타카키의 좁혀지지 않은 거리는 서로가 서로를 부르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다.
스미다는 타카키를 토오노 군이라고 부르고, 타카키는 스미다를 카나에게 아닌 스미다라고 부른다.
우리나라로 생각해보면 김군, 최양의 느낌? 그러니까 성을 부른다는 말이다. 타카키와 아카리는 서로의 이름을 부르지만 말이다. 서로를 부르는 호칭만으로도 이미 둘 사의 거리감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사실 스미다에게는 타카키를 짝사랑하는 마음 말고도 하나의 고민이 더 있었다. 그건 졸업 후 진로에 관한 문제이다. 대학에 진학을 할지, 취업을 할지 말이다. 그렇게 커다란 고민을 안고 있던 스미다에게 전혀 망설임 없이 앞으로 나아가던 타카키는 자신과는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뭐든 결정을 잘 하지 못하고 망설이기만 했던 자신과는 달랐던 타카키의 모습 때문에 그를 좋아하게 된 것일 수도.
하지만 어느 날 스미다는 타카키와 이야기 중 타카키도 자신과 별 다를 것 없이 항상 망설이고 제대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말을 듣고 용기를 얻는다. 타카키도 자신과 같은 고민들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평소 멀게 느껴졌던 토오노를 한 층 더 가깝게 느낀다.
하지만 스미다에게 망설임이 타카키였다면, 타카키에게 망설임은 닿지 않는 곳에 있는 아카리였다.
도무지 성공지 못했던 파도타기가 성공한 그 날, 모든 일이 이제는 잘 풀리기 시작했다고 느낀 스미다는 타카키에게 고백하기로 마음먹는다.
"왜 그래?"
"미안... 아무것도 아니야. 미안해."
"스미다..."
하지만 아무리 함께 걷고 걸어도, 가까이 다가가려 노력해봐도 스미다에게 타카키는 잡히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그녀는 그저 학교 친구 그 이상, 이하도 아니라는 걸 그녀는 알게 된다. 스미다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커다란 눈에서 눈물을 떨구는 것뿐.
멀리 하늘 위로 날아가는 인공위성을 보면서, 스미다는 타카키가 저 인공위성처럼 어디론가를 향해 가고 있는, 가야만 하는 사람임을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 목적지는 결코 자신이 될 수 없다는 절망감도.
부탁이니까 이제 나한테... 상냥하게 대해주지 말아줘...
필사적으로 단지 저돌적으로 하늘을 향해 손을 뻗어서 저렇게 큰 덩어리를 쏴 올리고 어지러워질 정도로 저 멀리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바라보고 토오노 군이 다른 사람과 다르게 보이는 이유가 조금 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토오노 군은 나 같은 건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확실히 느꼈다. 그래서 그날 나는 토오노 군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토오노 군은 상냥하지만... 아주 상냥하지만... 그렇지만, 토오노 군은 언제나 나의 저 너머... 좀 더 먼 무언가를 보고 있어 내가 토오노 군에게 바라는 것은 분명 이루어지지 않아... 그래도, 그래도 나는... 토오노 군을 분명 내일도 모레도 그 훗날도 역시 어쩔 수 없이 좋아할 거라고 생각해. 토오노 군만을 생각하면서... 울면서... 나는 잠들었다.
스미다는 타카키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는 데는 분명히 실패한다. 하지만 그녀는 타카키에 대한 감정을 키워나가고 또 그것이 좌절되는 걸 경험하면서 그녀 스스로 조금씩 성장해 나간다. 토오노를 향했다 접혀버렸던 스미다의 감정이 이제는 세상으로, 더 넓은 세상으로 펼쳐져 나가게 된 것이다.
2부 <코스모 나우트>에서는 타카키와 아카리의 두절된 사랑과 스미다의 짝사랑과 성정 이야기가 담겨 있다.
다시 시간은 훌쩍 흘러 타카키는 어느새 직장인이 되어있다.
멍하니 책상에 앉아 컴퓨터로 일을 하는 타카키. 하지만 이제 타카키에게 예전의 진지하고 올곧았던 마음은 사라진 지 오래이다. 일상에 찌들어 있고 그의 삶에는 즐거움이 없다. 3년을 사귀었던 애인과도 결국 헤어진다. 그녀도 스미다처럼 결국 타카키에게 다가가지 못했던 것이다. 아니, 여전히 아카리로 채워져 있는 타카키에겐 애초에 그녀의 공간이 없었을 것이다.
당신을 지금도 좋아합니다,라고 3년간 만났던 그녀는 그렇게 문자를 보냈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분명 1000번이나 문자를 주고받았지만 아마 마음은 1센티미터 정도밖에 가까이 가지 못했습니다,라고...
타카키는 목적지를 상실하고 바다 위를 표류하는 배처럼 의미 없는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에게도 다가가지 않고, 아무도 다가오지 못하게 하는.
이 수년간...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고 싶어서, 닿지 않는 것에 손을 뻗고 싶어서,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도... 대부분 강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 생각들이... 어디서부터 찾아오는지도 알지 못하고 나는 단지 일을 계속하며 문득 생각해보니 날마다 탄력을 잃어가고 있는 마음이 단지 괴로울 뿐이었다. 그리고 어느 아침 예전에 그렇게까지나 진지하고 올곧았던 마음이 깨끗하게 사라진 것을 나는 깨닫고 이제 한계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회사를 그만뒀다.
타카키가 제대로 살고 있지 못하는 이유는 역시 아카리 때문이다.
결국 닿지 않았던 거리와, 좁혀지지 않았던 서로의 시간을 극복하지 못했다. 그렇게 타카키의 첫사랑은 실패로 끝이난 것이다. 하지만 타카키는 여전히, 여전히 아카리에게 묶인 사람이었다. 여전히 그녀에게 머물러 있는 사람이었고, 그러므로 그녀가 없는 그는 잘 살지 못하는 것이다.
3부 <초속 5센티미터는> 이 영화의 주제곡이기도 한 "one more time one more chance"를 배경으로 그동안 관객들이 상상 속으로 채워야만 했었던 타카키와 아카리의 공백의 시간들을 뮤직비디오처럼 보여준다. 십 년이 넘는 공백을 5분 남짓의 영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처음 만났던 시절의 풋풋함. 서로의 공간은 멀어졌지만 편지로 이어지던 애틋했던 시간들. 함께 나누었던 추억들과 서로의 부재로 각자 존재했던 아련한 학창 시절의 모습. 성인이 된 후의 모습까지 말이다.
3부에서도 여전히 타카키는 보이지 않지만 자신 안에 너무나도 강하게 존재하고 있는 아카리를 찾아 헤맨다. 도쿄의 골목골목에서. 지하철의 플랫폼의 사람들 사이에서. 그렇게 자신의 기억 속의 아카리의 흔적을 지우지 못한다.
3부에서 드디어 아카리가 재등장한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다른 남자와 결혼 준비를 하면서 잘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타카키와 다르게 아카리에게 타카키는 한 번쯤 떠올리면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타카키는 여전히 아카리 때문에 잘 살고 있지 못하지만 말이다. 약간은 매정한 캐릭터 같기도 하다.
누군가의 말처럼 남자는 첫사랑을 잊지 못하고, 여자는 항상 지금의 사랑이 첫사랑이라고 했던가.
하지만 분명했던 건 타카키도 아카리도 결국 노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서로가 다시 만난다 하더라도 예전의 순수한 마음을 이제는 갖고 있지 않다는 것. 그것이 두려웠는지도. 그래서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지만, 그래서 예쁜지도 모르겠다.
그러던 어느 날 타카키는 도쿄의 한 골목에서 우연히 아카리(로 보이는)와 마주친다.
필자가 가장 좋아하고, 가장 아련하고, 가장 마음 아팠던 마지막 엔딩 장면이다.
무언가를 느낀 타카키는 뒤를 돌아보지만 그 순간 열차가 지나가 시선을 가로막는다. 두 대의 열차가 교차하여 지나갈 때까지 타카키는 발을 떼지 못하고 건너편을 바라본다. 하지만 이미 그녀는 없었다.
여기서 포인트는 타카키가 옅은 미소를 보이며 다시 뒤돌아서 제 길을 갔다는 것이다. 분명 뛰어간다면 아카리(로 보이는)를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타카키는 돌아선다. 그리고 옅은 웃음을 보인다.
타카키는 드디어 다시 한번 성장한 것이다. 이제는 아카리 때문에 잘 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와의 추억을 아름답게 기억하며 더 이상 넘어지지 않고 닫혔던 마음도 열며 잘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타카키는 분명 대단한 사람이다. 20년에 가까운 시간을 한 여자를 마음에 두고, 그 마음을 방향 삼아 어떻게든 꾸역꾸역 그쪽으로 살아가려 했던 모습. 그에 비해 너무 쉽게 타카키를 지워버린 아카리가 조금은 얄미운 건 필자가 남자이기에 어쩔 수 없나 보다.
"신카이 마코토"감독의 작품들을 아우르고 있는 하나의 주제는 바로 "공간"이다.
특히 노력을 해도 닿을 수 없는 공간.
<그와 그녀의 고양이>에서는 주인을 좋아하는 고양이와 주인의 서로 다른 공간.
<별의 목소리>에서는 지구와 우주 사이의 벌어져버린 시공간.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에서는 바다 너머 탑 속의 현실과 비현실의 공간.
최근 작품인 <너의 이름은>에서의 다른 시간에 존재했던 두 공간.
영화 <초속 5센티미터>에서도 역시나 서로가 노력해도 결국 닿을 수 없었던 공간이 주제이다. 하지만 그의 다른 작품들과는 약간의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다른 작품들이 환타지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 공간의 거리라고 한다면 <초속 5센티미터>는 남 여 사이의 공간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 어느 누구의 마음대로 되지도 않을뿐더러, 가끔은 노력조차 무색하게 만들어버리는 멀고도 먼 아득한 공간.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상당히 현실적인 면을 갖고 있다. 첫사랑의 아련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남자라면(이 영화는 철저하게 남자 주인공인 타카키 중심의 영화니까) 결국 어느샌가 멀어져 버린 그녀와의 거리를 겪어봤을 테니까 말이다. 아무리 되돌리려 노력해봐도 어쩔 수 없었으며 종국엔 그 모든 것이 그래도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있는 그 거리 말이다.
좀 더 철학적으로 들어가 보자.
우선 공간이라는 것은 외부적인 요소이다. 의지와 상관없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일 뿐이지 극복하기란 쉽지가 않다.
사람은 주어진 공간을 받아들이고 내면화한다. 그 내면화의 형태가 외로움과 고독과 포기이다. 영화에서 타카키가 보여준 모습이 바로 이것이다. 아카리와 멀어져 버린 공간을 극복하가 위해서 스스로 강해지겠다 결심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멀어져 버린 아카리. 그 먼 곳을 바라보며 타카키는 고독해진다. 그리고 어느 순간 타카키는 아카리와의 재회를 포기하게 된다. 닿을 수 없는 공간의 간극은 자신의 노력으로 극복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감독은 결국 공간은 극복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일까?
필자의 건방진 해석일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아니다.
다시 한번 이 영화의 카피를 떠올려 보자.
"어느 정도 속도로 살아가야 너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신카이 마코토"감독은 공간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향해 그래도 다가가고 있다는 것에 집중한다. 분명 서로가 서 있는 곳은 다르다. 하지만 비록 다른 공간에 있다 하더라도 서로에게 다가갈 수 만 있다면, 그것은 극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충분한 것이다. 그리고 그 방법의 하나로 제시한 것이 바로 "속도"이다.
그러니까 공간의 간극이 얼마건 그것에 다가가는 우리의 "속도"가 중요한 것이라고.
벚꽃이 떨어지는 속도가 초속 5센티미터라고 말했던 아카리.
하늘로 날아오르기 위해 천천히 이동하는 인공위성의 부품이 실려 이동하는 속도가 시속 5킬로 미터라고 말했던 스미다.
그리고 수많은 문자를 주고받았지만 겨우 1센티미터 가까워졌다고 말했던 타카키의 애인 까지.
그렇게 우리가 선택한 시간에 따라서 공간은 점점 좁혀질 수 도 있고 영영 제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도 있다.
또한 속도는 공간과 시간을 동시에 포함하는 개념이다. 그리고 그 시간은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대가를 요구한다. 힘들게 시간을 극복하고 공간을 줄였던 중학생의 타카키와 아카리에겐 재회와 약속이라는 선물을 줬지만, 더딘 속도로 많은 시간을 요구했던 둘의 학창 시절, 그리고 성인이 된 이후엔 추억조차 희미해지고 빛이 바래지는 대가를 요구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분명 공간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공간은 거리를 만들어 내고 그 거리를 좁히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하다. 감독은 공간이 극복되야만 해피엔딩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취한 속도와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결과물들을 통해서 결국 모두가 다 성장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말하는 건 아닐까?
영화 <초속 5센티미터>를 보면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오랜만에 속도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봤다.
물론 영화에서 말하고 있는 건 물리적 거리를 극복하기 위한 속도가 아니라 정서적 거리를 극복하기 위한 속도이다. 그것은 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어렵고,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영화의 제목처럼 벚꽃이 떨어지는 초속 5센티미터로 굉장히 빠를 수도 있고, 아니면 더 빠르고 먼 도약을 위해 천천히 이동했던 인공위성의 부품의 시속 5킬로미터처럼 한 없이 느릴 수도 있다.
또, 아무리 노력을 해도 1센티미터조차 가까워지기 힘들었던 타카키의 그의 애인의 속도처럼 무의미할 수도 있다.
다른 공간에 있더라도 목적지가 같아 서로에게 다가오고 있다면 상대적인 속도는 더울 빨라질 것이겠지만, 애초에 그 방향에 달랐다면 빨리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빠르게 멀어지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가 했던 사랑이 다 그랬을 것이다.
다가가지 못해 바라만 봐야 해서 안타까웠고, 건넸던 마음이 상대에게 닿지 않아 아팠다.
눈에 보이지 않고, 가늠조차 어려워 비워낼 수도 없었던 것. 그것이 사랑이었다.
하지만 발을 떼었으므로 그 모든 공간과, 공간에 엮였던 시간이 아름다웠다.
초속 5센티이건, 시속 5킬로미터 이건.
왜냐하면 그것들에 추억이 새겨져 있고, 그것은 우리를 멀리서도 다시 살게 할 테니까.
첫사랑은 어쨌든 그래서 다 아름답지 않을까?
가르치고, 여행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글을 씁니다.
저서로는 “첫날을 무사했어요” 와 “버텨요, 청춘”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