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라는 무거운 직업
보기 전부터 굉장히 기대되는 영화가 있고, 보고는 싶지만 보기가 망설여지는 영화가 있다.
말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정말 그렇다.
영화 <너는 착한 아이>는 필자에게 있어선 후자에 속한 영화였다. 동명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개봉될 때부터 기대가 되고 보고는 싶었지만, 정작 마주하기는 싫어 차일피일 미루던 영화였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영화가 다루고 있는 주제가 바로 "아동 학대"였기 때문이었다.
필자는 아직 미혼이고 아이도 없기 때문에 감히 부모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감히 말하지는 않겠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마음은 이해의 영역이 아닐 것이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건방지기 이해한다,라고 말할 수 없는 무거운 무언가가 분명 부모라는 이름에 있을 것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동 학대"라는 단어와 현상을 마주하게 될 때 필자는 어쩔 수 없이 어느 아이 편에 서게 된다. 그리고 그 반대편, 누군가의 부모를 원망할 수밖에 없다. 아니, 원망을 넘어서 욕하고 삿대질하고 만다.
세상의 모든 위험한 직업에 우리는 "자격증"이라는 제도를 통해서 위험을 예방하고 안전을 보장한다.
"처방은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라는 말처럼 자격을 갖춘 이에게 우리는 우리의 소중한 무언가를 믿고 맡길 수 있는 것이다. 그 반대의 경우라면 불안에 벌벌 떨겠지.
필자는 개인적으로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지만, 유일하게 자격증이 없는 직업이 "부모"라고 생각한다.
그 어떤 것보다 귀하고 소중한 자녀를 키우고 보살피는 직업이 부모임에도 그것에 자격증은 필요 없다. 그러므로 너무나 위험하고 너무나 무모한 것이다.
자녀를 키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 그런 자격을 갖추지 못한 부모는 때때로 자녀를 학대하고 평생 회복되기 힘든 깊은 상처를 자신의 자녀에게 남겨버리고 만다. 그리고 그 상처는 시간과 보상으로는 절대 치유될 수 없는 성격의 것이다.
영화 <너는 착한 아이>는 바로 "아동 학대"라는 그 불편한 영역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영화 내내 자격이 없는 부모와 자격이 없는 어른을 꾸짖는다.
아이는 평가의 대상이 아니라 사라의 대상이라고 우리에게 무겁게 전하고 있다.
원작 소설이 워낙 호평을 받아서 영화는 소설의 내용에 충실하다. 분명 글을 영상으로 표현해내야 하는 한계가 있긴 하지만 세 편의 옴니버스식 단편의 이야기를 묶어 하나의 완성된 주제로 표현해낸 "오미보"감독의 연출력에도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톡톡 튀지는 않지만 영화를 담담하게 표현해낸 감독의 연출력은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의 러닝타임 내내 지루함 없이 영화에 몰입할 수 있게 만들었다.
약간은 다큐멘터리 느낌의 다소 느린 진행은 진한 주제를 서서히 스미듯 전달하고 있다.
또 번외 이야기로 필자가 굉장히 좋아하고 애정 하는 영화인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굉장히 애정 하는 여배우 "이케와키 치즈루"가 등장한다. 주연이라고 말하기엔 다소 비중이 작긴 하지만 그녀의 얼굴을 스크린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반가웠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서 사랑의 변화를 담담히 연기해내던 약간은 풋풋했던 그녀가 어느새 아이의 엄마 역할을 맡을 정도의 세월과 내공이 쌓였다니.
영화 <너는 착한 아이>에서도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서 나오는 "이케와키 치즈루"의 매력적인 목소리의 독백이 나오니 그것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역시 배우와 팬은 함께 늙어가나 보다.
필자에겐 영원한 조제. 자주자주 스크린에 등장해 주세요!!
영화 <너는 착한 아이>가 다루고 있는 이야기의 중심엔 어린아이가 있다. 제목만 봐도 그렇듯 말이다. 하지만 어린아이가 등장하는 여느 다른 영화들, 그러니까 아동유괴나 살해 등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처럼 자극적이나 잔인한 소재로 접근하지 않는다.
영화에서 나오는 주된 세 명의 아이들은 어쩌면 우리 주변에서 굉장히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한 아이들이다. 그런데 어쩌면 그래서 우리에게 더 힘든 소재일지도 모른다.
아동 유괴나 살인의 이야기는 분명 흔한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에 쉽게 공감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영화 <너는 착한 아이>처럼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아이들이 학대를 당하고 있는 소재는 우리 주변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고 종종 관찰되기 때문에 더 잔인하고 더 무섭고 더 불편하다. 판타지가 아니라 진실이기 때문이다. 가슴 아픈 일이 진실이 될 때 그것은 한없이 잔인해진다.
어쩌면 책의 작가도, 영화의 감독도 바로 이 부분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내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에 쉽게 등을 돌릴 수 있는 자극적은 소재가 아니라, 내 주변에서 내가 눈 감고 외면한 사이에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소재로 사람들의 관심을 더욱 불러일으키는.
말썽 많은 반에 첫 담임으로 부임한 오카노는 말썽꾸러기 반 아이들을 다루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 스스로도 모든 게 서툰 사람이다. 어떤 방법과 자세로 아이들에게 다가가야 하는지 어렵기만 하고 자신의 마음을 외면하고 몰라주는 반 아이들이 원망스럽기도 하다.
반에서 오줌을 싸는 아이, 왕따 시키는 아이, 선생님 말을 듣지 않고 수업 시간에도 쉬지 않고 떠드는 아이, 거기다 담임을 힘들게 하는 학부모까지. 모든 게 처음인 오카노는 지치고 힘이 빠진다.
자신은 진심으로 아이들을 대해보려 하지만 아이들에게 자신의 진심은 전해지지 않는다. 동료 선생님들에게 조언도 받아보고, 부장 선생님에겐 자신의 서툰 부분에 대해 훈계를 듣기도 한다. 게다가 자신의 연애도 잘 풀리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 고민이 많든 오카노는 반에서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간다 라는 학생이 눈에 들어오고 그에게 자꾸만 마음이 간다.
방과 후, 아이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간 학교 운동장에서 매일 혼자 남아있던 아이 "간다".
간다는 다섯 시 이전엔 집에 들어오지 말라는 의붓아버지 때문에 매일 학교 운동장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제대로 먹는 밥이라고는 학교에서나 나오는 급식뿐이었던 아이를 오카노는 마음을 쓰고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과연 오카노는 의붓아버지에게 학대를 받고 있는 간다를 도와줄 수 있을까?
사실 필자가 영화 <너는 착한 아이>를 보면서 가장 이해가 되지 않고 미웠던 캐릭터가 바로 미즈키였다. 혹 아이가 없는 관객이다 하더라도 미즈키가 자신의 딸인 아야네에게 직접적으로 가하는 폭력의 장면을 볼 때는 많은 불편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세 이야기 가운데 유일하게 자신의 아이에게 직접적인 폭력을 가하는 캐릭터가 바로 미즈키이다.
밖에서는 굉장히 상냥하고 친절하며 우아하지만 집에서는 자신의 딸 아야네에게 엄격하다. 아야네의 작은 실수와 잘못에도 폭력을 휘두르는 엄마 미즈키. 하지만 어떤 이유에 선지 그녀는 아야네를 때릴 때마다 화장실이건, 방이건 혼자 들어가 눈물을 흘린다. 스스로도 원치 않았던 폭력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행동에 죄책감을 느끼고 그때마다 미즈키는 그 안에 묶여 자꾸만 자꾸만 무너져 내린다.
그런 미즈키가 자신과는 반대편 성향인 오오미야를 만나게 된다. 두 명의 자녀를 키우고 있지만 자신과는 정 반대의 방향으로 아이들을 대하는 이웃 오오미야를 보면서 미즈키는 부러움과 동시에 알 수 없는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미즈키는 오오미야를 만나면서 조금씩 변하게 된다. 그 변화의 계기는 전혀 다른 것 같았던 두 사람이 가지고 있었던 공통점이다. 과연 아이를 학대하는 미즈키와 아이들을 사랑으로 보살피고 있는 오오미야의 공통점은 무엇이었을까?
치매가 걸려 기억과 시간을 조금씩 잃어가고 있는 할머니 아키코. 그리고 매일 하교 후 아키코의 집 앞을 지나가며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는 자폐아 히로야는 유일한 친구이자 말 상대이다.
사실 처음 아키코와 동네의 슈퍼마켓에서 점원으로 일을 하고 있는 히로야의 엄마와의 만남은 순탄치 않았다. 앓고 있는 치매 때문에 마트의 물건을 계산하지 않고 가지고 나와 도둑으로 몰렸던 아키코와 그런 그녀를 붙잡아야만 했던 히로야의 엄마.
하지만 아키코와 히로야의 엄마는 히로야를 매개로 가까워지고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준다.
우리는 모두 친구가 될 수 있고, 친구는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보듬고 이해해주는 존재인 것이다.
영화는 분명히 "아동학대"를 다루고 있지만 눈에 보이는 빠른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세 이야기에서 아이들이 겪고 있는 힘든 상황들을 영화는 모든 현상 그대를 덤덤하게 관찰하고 상황을 넌지시 관객에게 전달해 줄 뿐이다. 무언가를 전달하고 있지만 강요하지는 않는다. 스스로 느끼꼬 깨달아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그 해결책을 찾아보길 권하고 있다.
가볍게는 새내기 교사 오카노의 연애 문제도 해결되지 않고, 반에서 친구를 왕따 시킨 아이들이 피해자에게 사과를 하지도 않고, 아이들의 부모의 태도도 달라지지 않는다. 집에서 보호받지 못하고 끼니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던 간다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고, 딸인 아야네를 학대하던 엄마 미즈키의 직접적인 행동 변화도 영화는 다루지 않는다. 그리고 어쩌면 자폐아 히로야의 문제는 영영 해결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쉽게 말해서 학교에서 학교폭력 위원회가 열려 가해자와 그 부모의 사과를 받아낸다던지, 아니면 아이를 학대하는 가정에 경찰의 공권력이 개입하여 법적으로 격리조치를 시킨다던가의 우리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해결책을 지양하고 있다.
대신 느리긴 하지만 천천히 확실하게 문제의 해결책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비가 오는 날, 집에 돌아가지 않고 학교에 남아 있던 간다를 발견하고는 오카노는 다가가 말을 건다.
"넌 착한 애라니까."
"하지만... 우리 집에는 산타가 안 와요. 내가 나쁜 애라서 산타가 안 오는 거래요."
"아빠가 그러셔?"
"네."
"아빠가 네 선물을 가로채는 게 아닐까?"
"어떡해야 착한 애가 될 수 있어요?"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 장면이 가장 가슴 아팠다. 간다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모든 학대와 폭력이 결국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엄마의 무관심도, 의붓아빠의 폭력까지도 바로 자신이 착한 아이가 아니기 때문에 일어난 일아라고 여기는 것이다. 어떡해야 착한 애가 될 수 있어요?라는 간다의 질문. 간다는 자신이 착한 아이가 될 수만 있다면 산타도 자신의 집에 올 것이고 엄마도 의붓아빠도 자신을 사랑해줄 것이라고 믿은 것이다.
그런데 착한 아이라는 것은 누구의 기준이고 그것이 노력해서 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일까?
어른들은 간혹 자신의 만들어 놓은 기준안에 들어오면 착한 아이, 그 밖의 아이는 나쁜 아이라는 흑백 논리를 아이들에게 들이대며 구분 짓고 강요한다. 하지만 애초에 아이라는 존재 앞에 착하다 나쁘다를 들이대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착하다, 나빠다로 구분 짓기 전에 아이라는 존재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사랑받아야 마땅하다.
착한 아이는 사랑받고, 나쁜 아이는 사랑받지 못한다는 메시지 또한 분명 아이들에겐 상처이고 학대일 것이다.
간다를 도와주기 위해 집까지 데려다주는 오카노. 하지만 그는 간다의 의붓아버지 앞에서 좌절한다. 참견하지 말라는 강압적이고 난폭한 그의 말 앞에서 결국 오카노는 간다에게 도움을 주지 못하게 돌아서고 만다. 무력감을 껴안고 집으로 돌아온 오카노. 교사로서 그리고 한 명의 어른으로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아이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한 오카노는 다시 고민에 빠지게 된다.
실의에 빠져있는 오카노에게 개구쟁이인 줄만 알았던 조카가 와서 그를 안아준다. 그리고 힘내라고, 힘내라고 말하며 조카가 오카노를 위로해준다.
순간 오카노는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느낀다. 조카의 따듯한 온기 한 줌으로 자신의 무언가가 회복되고 위로받았음을 알게 된다.
"재 내가 하는 거 보고 따라 하는 거야. 토닥토닥하는 거."
"그렇구나."
"내가 애한테 잘해주니까 애도 착하게 크더라. 그러니까 애를 예뻐하면 세상이 평화로워지지."
어쩌면 오카노와 누나의 대화가 이 영화의 주제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애한테 잘해주니까 애도 착하게 크더라.
그러니까 애를 예뻐하면 세상이 평화로워지지.
누나와의 대화에서 무언가를 깨달은 오카노는 학교에 돌아가 매일 문제를 일으키는 장난꾸러기 아이들에게 어려운 숙제를 하나 내준다.
그것은 가족에게 안기기. 또는 가족 안아주기.
아마도 오카노는 자신이 조카의 포옹을 통해서 느꼈던 따듯한 온기와 사랑을 반 아이들도 느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온기를 통해 전해지는 사랑이 어쩌면 반에서 일어나는 여러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다음 날 숙제를 해결하고 온 아이들은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한다.
가족에게 안겼을 때 기분이 어땠느냐는 질문에 아이들은 대답을 한다.
"안심됐어요."
"아기가 된 것 같았어요."
"따듯한 느낌."
"마음이 편했어요."
"좋았어요."
"계속 웃었어요."
"추억이 떠올랐어요."
"차분한 느낌."
"기뻤어요."
"그만하래서 슬펐어요."
오카노는 아이들에게 가족에게 안겼을 때 느꼈던 그 느낌들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눠줄 주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숙제의 목적이라고 알려준다.
분명 아이들은 이 숙제를 통해서 자신이 사랑받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을 것이고, 다른 아이들 또한 그렇게 사랑받아야만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배웠을 것이다.
물론 아이들이 이 숙제 하나로 갑자기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왕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가해자를 혼내고 부모를 불러 사과시키고, 더 나아가서는 학교폭력 위원회를 열어 행정적인 조치를 가하는 것보다는 아이들이 무언가를 느끼고 스스로 자신의 행동과 마음을 수정해나가는 방법이 느리지만 더 확실한 해결책이라고 영화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따듯한 포옹으로 전해진 한 줌의 온기는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간다는 오카노가 숙제를 내준 다음날 등교를 하지 않는다. 숙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이다.
간다의 엄마도, 의붓아버지도 간다를 안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오카노는 지난번 간다를 집에 데려다줬을 때 좌절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그는 간다를 향한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간다의 집을 향해 뛰어간다. 그리고 간다의 의붓아버지가 있는 그 집의 문을 강하게 두드리면서 이야기는 끝이 난다.
어쩌면 오카노와 간다의 이야기는 열린 결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의지이고 마음의 변화이다. 아동학대의 문제는 외부적인 환경의 변화보다는 그것을 겪고 있고, 또 관찰하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의 변화에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고 영화는 전하고 있는 것이다.
강하게 문들 두드리던 주먹, 그리고 의지가 담긴 눈빛으로 영화는 끝을 맺지만 우리는 분명 변화된 오카노에 의해서 간다도 자신이 소중한 아이라는 것을, 사랑받아야 하는 아이라는 것을 알게 됐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밖에서는 상냥한 엄마인 미즈키는 집에서는 딸인 아야네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무서운 엄마로 등장한다. 영화에서는 마지막이 되기 전까지 그 이유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미즈키라는 캐릭터는 굉장히 원망스럽고 밉기만 하다. 그리고 그녀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음에 분노하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딸인 아야네는 자신을 학대하는 엄마 미즈키를 좋아하고 끔찍이 여긴다. 자신을 때리고 난 뒤 혼자 방 문을 잠그고 우는 엄마를 오히려 아야네가 걱정한다. 그리고 엄마의 사랑을 갈구하며 엄마와 같은 신발을 신고 싶어 하기도 한다. 비록 자신을 때리는 부모라도 어린 자식은 끝까지 등을 돌리지 않고 그들의 사랑을 갈구하는 것이다.
그런 미즈카와 아야네에게 이웃집 두 아이의 엄마인 오오미야가 등장한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미즈키와 오오미야는 서로 반대되는 캐릭터다. 아야네에게 굉장히 엄격한 미즈키와는 반대로 오오미야는 자신의 아이들에게 너그럽고 허용적이다. 그리고 결정적인 차이는 스킨십이다. 오오미야는 자연스럽게 아이들을 안아주고, 만지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지만 미즈키는 아야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조차 낯설기만 하다.
그런 오오미야를 바라보면서 미즈키는 부럽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하다.
그러던 어느 날 미즈키와 아야네는 오오미야의 집에 초대를 받아 함께 시간을 보낸다. 그런데 그만 아야네가 실수로 컵을 깨게 되고 미즈키는 아야네를 호되고 꾸짖는다. 이것을 지켜보던 오오미야는 미즈키를 끌어안고는 뜻밖의 이야기를 꺼내게 된다.
"부모한테 학대당했지? 알아. 나도 그랬으니까. 손목에 흉터 담배 자국이지? 내 흉터는 여기 있어. 초등학교 때 얼굴에 멍이 들면 학교에 보내주지도 않았어. 사람들이 볼까 봐. 그래도 근처에 살던 할머니가 내가 집 밖에서 맞고 있을 때 나를 안고 막아주셨어. 우리 아빠가 노인네는 신경 끄라고 악을 썼는데도 말이야. 그 할머니 댁에 숨어 지내고는 했어. 안 그랬다면 난 견딜 수 없었을 거야. 미즈키도 힘들었지? 너 자신이 싫을 거야. 그 할머니가 나한테 항상 해주던 말이 있어. 나를 만날 때마다 '넌 소중하다.'라고 했어. 나도 말해주고 싶어. 너는 소중한 사람이라고. 그냥 내 생각일 뿐이지만 그래도 말하고 싶어. 미즈키 너는 참 소중한 사람이야."
오오미야는 미즈키를 따듯하게 안아주고 오오미야의 품 안에서 미즈키는 눈물을 흘린다.
그렇다. 영화의 마지막이 되어서야 우리는 미즈키가 아야네를 학대한 그 근본적인 원인을 알 수 있다. 미즈키 본인도 어렸을 때 부모에게 학대를 받고 자라온 것이다. 학대를 받은 아이가 어른이 되어서 다시 자신의 아이를 학대하는 악순환. 그 악순환의 고리에 미즈키가 놓여있었던 것이다.
통계적으로도 학대를 받고 자란 아이가 후에 자신의 아이를 학대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의지의 문제라기보다는 그냥 어느 순간 그렇게 되어버리고 마는 경우가 많다.
아이는 부모의 행동상 성품을 닮는 거울이라고도 한다. 우리는 종종 '나는 엄마처럼(혹은 아빠처럼) 살지 않을 거야.'라고 말하지만 결국 자신의 부모의 모습을 빼닮아버린 자신을 발견하게 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영화 <너는 착한 아이>에서는 조심스럽게 그 해결책을 제시해주고 있다.
오오미야도 미즈키와 똑같이 부모에게 학대를 받고 자랐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아이들을 학대하지 않는다.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은 오오미야의 이웃집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오오미야에게 넌 참 소중한 사람이라고 말을 해 준다. 그리고 그 한마디가 오오미야를 붙잡아 줬다. 오오미야는 미즈키에게도 똑같이 말해준다. 넌 참 소중한 사람이라고. 내 옆에서 내 편이 되어주고 날 소중하게 여겨주는 한 사람. 그 한 사람만 있으면 우리는 얼마든지 힘든 상황을 버텨낼 수 있고 그것의 상처를 극복해낼 수 있다.
우리는 바로 누군가의 그 한 사람이 되어줄 수 있는 것이다.
매일같이 하교 후에 자신의 집 앞을 지나가던 히로야를 발견한 할머니 아키코는 히로야에게 다가간다. 하지만 히로는 열쇠를 잃어버려 굉장히 당황해 있다. 아키코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길 위에서 열쇠를 찾기 위해서 책가방을 뒤지던 히로야를 자신의 집에 데려간다. 그리고 차를 대접하며 히로야를 보살펴 준다.
연락을 받고 아키코의 집에 도착한 히로야의 엄마는 연신 죄송하다면 고개를 숙인다. 하지만 아키코는 히로야가 참 착한 아이라고, 오히려 엄마가 더 늦게 데리러 오길 바랄 정도로 즐거운 시간이었다고 말한다.
히로야의 엄마는 자신의 아들이지만 장애를 가진 아들이 예뻐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에 대한 칭찬을 들으며 감격하고 아키코에게 위로를 받는다.
어쩌면 이 이야기는 아동학대와는 조금은 거리가 있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부모로부터 직접적인 학대를 당했던 간다나 아야네와는 달리 히로야는 육체적으로 직접적인 학대를 받지 않는다.
히로야는 어쩌면 정서적인 학대에 조금은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부모가 자녀가 가지고 있는 결점 때문에 온전히 사랑을 주지 못하는 것, 자신의 아이를 예뻐하지 않는 것 또한 학대일지도 모르니 말이다.
히로야가 속해있는 특수반의 참관수업을 아키코와 히로야의 엄마는 함께 다녀온다. 그리고 히로야의 엄마는 히로야가 얼마나 예쁜지, 얼마나 자랑스러운 아들인지를 느끼게 된다.
부모는 항상 자녀의 결점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그런 결점에 집중해서 자신의 아이가 가지고 있는, 결점보다 더 밝게 빛나고 있는 장점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종종 이런 말들을 듣고, 또 하기도 한다.
"어린애가 뭘 안다고 그렇니?"
"네가 아직 어려서 잘 모르지만 말이야."
"엄마 말 들어서 손해 본 거 있니?"
우리가 흔히, 그리고 종종 사용하는 이런 말들은 무의식적으로 아이는 자신 앞의 무언가를 선택을 할 수 없는 존재, 아직은 미성숙한 존재로 여기는 마음이 깔려있는 것이다.
물론 당연하게도 아직 어린아이들은 어른들에 비해 합리적이거나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필자는 분명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필자가 영화를 보면서 생각했던 것은 아이들을 판단의 대상에 올려놓지 말아보자는 것이다.
한 번쯤은 아무런 기대나 조건 없이, 그저 순수하게 사랑받아야 마땅한 존재로 아이들을 여겨 보는 것. 그것이 아동학대에 대한 이 영화가 제시한 해결책이지 않을까?
오히려 성숙하지 못한 어른들의 그릇된 편견과 기대 속에서 아이들은 상처를 받는다. 영화에서 간다가 어떻게 하면 착한 아이가 될 수 있느냐는 질문이 가슴 아프고 슬픈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아이들은 존재 자체로 사랑받고 보호받아야 되는 것이다. 아이가 지니고 있는 조건 때문이 아니라.
사실 영화는 크게 슬픈 요소는 없다. 나름의 해피앤딩을 가지고 있으며, 그 과정들을 굉장히 따듯하게 전해주고 있다. 하지만 그것들 이면에 우리 주변에, 혹은 우리의 가정 안에서 충분히 있을법한 이야기를 다룸으로써 우리에게 무거운 메시지를 전하기도 한다.
우리의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가 정답을 찾아야 한다고.
우리는 모두 우리의 아이들 속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마주한 스스로에게 따듯하게 말해줘야 한다. "너는 참 소중한 사람"이라고.
가르치고, 여행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글을 씁니다.
저서로는 “첫날을 무사했어요” 와 “버텨요, 청춘”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