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우리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된 거죠
영화 포스터 하나만으로 굉장히 도발적이면서도 동시에 관객으로 하여금 엄청난 궁금증을 유발하는 영화가 있을까? 개인적으로 필자는 영화 <Her>의 강렬한 붉은빛의 포스터와 주연배우인 "호아킨 피닉스(테오도르 역)"의 오묘하고 빠져들듯한 깊은 눈빛에 빠져들어 '아, 이 영화는 꼭 봐야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단지 포스터 하나 만으로 말이다.
영화에서 포스터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요즘이야 여러 매체(인터넷이나 영화를 소개하는 프로그램)를 통해서 영화가 개봉하기 전 관객이 영화를 짧게나마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있겠지만, 또 그런 짧은 경험을 통해 영화를 선택하게 되기도 하겠지만 예전엔 정말이지 포스터 하나가 다였다. 포스터 하나만을 가지고 관객을 끌어당겨야 했으므로 감독이나 제작자가 영화를 통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포스터 한 장에 담아야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포스터 하나가 가지는 의미는 상당히 컸었을 테고 그것에 상당히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영화 <Her>의 포스터는 적어도 필자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어렴풋이 영화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주인공의 눈빛에 충분히, 충분히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독자분들도 영화를 보신다면 분명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영화 <Her>는 국내에서 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상당히 독특한 시도라는 평을 받았던 영화이다.
영화라고 하는 것이 그 경계가 불분명할지라도 어느 정도 "장르"라는 테두리 안에 속하게 된다.
멜로 영화, 액션 영화, 로맨틱 코미디 영화, SF영화 등등. 그렇다면 영화 <Her>은 어떤 장르에 속한 영화일까? 소재로만 따진다면야 SF와 멜로에 발을 하나씩 걸쳐놓은 듯하기도 하지만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휴머니즘(그런 장르도 있었나?)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다른 영화에 비해서 극히 적은 숫자의 인물들이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게다가 영화 내 대화의 대부분은 사람과 사람 사이, 그러니까 면대 면의 대화가 아니라 사람과 컴퓨터 프로그램(인공지능 OS)과 대화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런 방식의 영화가 휴머니즘 영화라고?
그렇다. 정말로 그렇다. 영화를 보고 나면 한 없이 따듯해 지니까.
영화의 배경은 가까운 미래의 가능할법한 사회의 모습을 배경으로 담고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다시 되찾기 위해서 어떤 것들을 배우고 노력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 그 크고 복잡한 이야기가 "소통"이라는 소재에 묶여서 하나하나 차근차근 풀리고 있다.
그러므로 필자는 영화 <Her>은 참 따듯한 휴머니즘 영화라고 생각한다.
주인공 테오도르는 개인적으로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 안에 놓여 있는 인물이다.
그는 손편지를 대신 써주는 회사에서 고객들을 대신해서 편지를 써주는 일을 하고 있다. 테오도르는 회사에서도 인정받을 만큼 편지를 꽤 잘 쓴다. 편지를 잘 쓴다는 말은 바꿔 말하면 편지를 부탁한 사람과 편지를 받을 사람 사이의 관계를 잘 파악하고 그들 사이에 놓여있는 감정선을 건드리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말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보이지 않는 감정의 끈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이고, 그것들을 소재로 풀어쓰는 테오도르의 편지는 꽤 감동적이다.
영화에서 테오도르가 쓰는 편지를 간단하게 살펴보자.
"사랑하는 크리스. 당신에 내게 얼마나 소중한지를 어떻게 말로 다 할 수 있을까. 당신과 처음 사랑에 빠지던 순간을 난 지금도 어젯밤 일처럼 기억하고 있어. 그 작은 아파트에서 당신 곁에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누웠던 밤... 그때 난 마치 무언가 커다란 세상의 일부로 변한 것 같았어. 우리 부모님들, 또 우리 부모님의 부모님들... 그날 이전에 난 마치 세상의 모든 걸 다 안다는 듯 살아왔지. 그런데 그때 그 밝은 빛이 날 흔들어 깨운 거야. 그 빛은 바로 당신이었어. 당신과 결혼한 지 벌써 50년 째라는 걸 믿을 수가 없어. 그리고 지금까지도, 매일 똑같이... 당신 앞의 나는 그때 그 소녀 같아. 당신이 처음 불을 밝히고 나를 깨워줬던 그 순간... 우린 함께 긴 여행을 떠났던 거야. 우리 결혼기념일을 축하해. 내 사랑... 그리고 세상 끝까지 내 친구, 로레타."
테오도르는 편지에 등장하는 크리스도 아니고 로레타도 아니다. 그렇지만 정말이지 바로 당사자들처럼 그들의 상황을 상상하고 그들 사이의 감정을 읽어내서는 저렇게 아름답고 멋진 편지글을 써낸다. 이건 일종의 능력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굉장히 직관적이고 쉽게 파악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 앞에서는 어려움을 많이 느낀다. 하지만 주인공 테오도르는 다르다. 그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감정이라는 것의 색을 선명하고도 확실하게 읽어내고 있다.
하지만 이런 테오도르에게는 문제가 하나 있다.
현실에서 자신과 얽혀있지 않는 타인들의 감정들은 귀신같이 잘 읽지만 정작 자신의 것과 자신에게 다가오는 감정은 바보 같을 정도로 읽지 못한다는 것이다.
테오도르는 사실 1년째 이혼의 과정 중이다.
그 과정이(행정적인) 복잡하고 어려워서 1년의 시간이 걸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 얽혀있는 자신과 그의 전 처인 캐서린의 감정에 대한 정답을 내리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둘 사이에 엮인 감정이라 함은 한 사람의 뜻대로, 혹은 한 사람이 원하는 방향으로 꺾여 흘러가지 않는다. 건넸다 하더라도 응답이 없을 수도 있고, 원치 않은 감정이 상대로부터 넘어오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그것들의 방향과 세기가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조정이 어렵고 가끔은 속된 말로 미치게 만들기도 한다.
테오도르가 딱 그 상황이다. 스스로의 감정이 둘의 이혼을 받아들이 못한다. 자신의 감정은 여전히이지만, 상대방의 감정은 이미 마침표를 찍었다. 그렇다면 수긍해야 한다. 고개를 끄덕이고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테오도르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모든 것이 감정 탓이다.
결국 그 1년의 시간 동안 테오도르는 제대로 살고 있지 못하고 있다. 삶의 커다란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살고 있지만 살고 있지 못하는 것이다.
그건 그의 하루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하루 종일 테오도르는 실제 사람과는 거의 제대로 된 소통을 하지 않는다. 회사에서는 하루 종일 컴퓨터에 앉아 있고 점심은 혼자 먹는다. 집에 돌아와서는 게임기 앞에 앉아서는 게임기와 이야기를 나눈다. 자신만 제외하고 모든 세상은 제대로 돌아가고 있지고 자신은 그 안에 속하지 못하고 있다.
테오도르는 지금 소통의 부재를 겪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제대로 살고 있지 못하던 테오도르는 인공지능 운영체제인 "OS 1"을 만나게 된다.
당신의 말에 귀 기울이고, 당신을 이해하고, 당신을 아는 직관적인 실체.
"OS 1"의 광고 카피를 듣고 테오도르는 궁금증을 갖게 된다. 그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구입을 하게 되면서 영화 <Her>을 관통하고 있는 인간과 인공지능의 만남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다소 독특한 소재이긴 하지만 요즘 같이 모든 것이 빠르고 획기적으로 변화하는 세상에 머지않아 우리도 각자의 OS를 갖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덤으로 말하자면 영화에서 인공지능인 "OS 1(사만다)"의 목소리 역할을 연기한 배우는 "스칼렛 요한슨"이다. 영화 내내 그녀의 약간은 허스키하면서 오묘한 목소리가 관객들의 귀를 즐겁게 해준다. 사실 처음 영화를 제작했을 당시 사만다의 목소리 역할은 "스칼렛 요한슨"이 아니라 "사만다 모튼"이라는 배우였다. 하지만 모든 촬영을 다 마친 후, 편집 과정에서 감독은 약간의 아쉬움을 느끼고 사만다의 목소리 역할을 "스칼렛 요한슨"으로 변경한 것이다. 물론 처음 배우였던 "사만다 모튼"의 양해를 구했고 그녀도 승낙을 했다. 사만다의 이름이 "사만다"가 된 이유도 바로 배우 "사만다 모튼"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스칼렛 요한슨"은 목소리만으로 테오도르와의 사랑을 연기해낸다.
말을 건네는 속도와 단어와 단어 사이의 공백. 그것들을 메우고 있는 공기와 말의 높낮이를 통해서 감정을 전달할 수 있가는 건 말이 쉽지 상당히 대단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를 봤던 관객들은 물론(필자를 포함해서 말이다.), 앞으로 이 영화를 보게 될 관객들도 비록 목소리일 뿐이지만 둘 사이의 사랑의 과정에서 전혀 어색함을 느끼지 못했고,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목소리에도 감정이 담길 수 있고, 그 감정에 충분히 이입이 가능하다는 것. 이건 "스칼렛 요한슨"이라는 배우가 가지고 있는 능력이고, 이 영화를 통해서 그녀의 연기 스팩트럼은 한 층 더 넓어졌을 것이다.(그럼에도 필자의 마음속 그녀는 영원한 "블랙 위도우"이다.)
실제로 그녀는 이 영화의 목소리 연기로 로마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목소리 만으로 말이다!!!
어쨌든, 소통의 부재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테오도르와 인공지능 os인 사만다와의 만남은 이렇게 성사되고 이 영화의 큰 기둥인(또 우리 모두에게 아직은 낯선) 사람과 인공지능의 사랑이야기가 시작된다.
인공지능의 능력이 어디까지 확장될지는 모르겠지만(필자가 가지고 있는 아이폰의 siri는 아직까지 사만다의 수준은 아니니까), 아마도 멀지 않은 미래에 우리도 어쩌면 사만다를 만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게 되었다.
영화 <Her >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상적인 관계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감독은 요즘 시대의 사람들이 관계와 그것을 이루는 소통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에 집중했을 것이다. 언제부턴가 말을 하는 것도, 감정을 주고받는 것도, 더 나아가 관계를 맺는 것 자체에 어려움을 느끼고 피로함을 느끼는 요즘의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위안과 해결책을 줄려는 마음이 있었을지도.
그것은 연인 사이의 관계뿐만이 아니라 친구사이의 관계, 더 나아가서는 이미 어긋난 버렸다고 여겼던 사람과의 관계를 말이다.
그렇다면 이상적인 관계란, 이상적인 사랑이란 과연 무엇일까?
우리는 다시 한번 인공지능 OS인 "사만다"의 광고 카피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당신의 말에 귀 기울이고, 당신을 이해하고, 당신을 아는 직관적인 실체>
쉽게 생각해보면 저 광고 카피의 내용이 바로 우리 모두가 바라는 상대방에 대한 이상향의 모습을 제공해주겠다는 말이다. 언제든지 내 말에 귀 기울여주고, 비록 나의 표현과 감정이 서툴더라도 나를 이해해 주고, 어쩌면 나보다 더 날 잘 아는 사람. 아마 이런 사람과 만난다면 우리의 연애와 사랑은 전혀 문제가 없는 꽃길만 걷게 될 테니 말이다.
영화의 초반 테오도르에게 사만다가 그런 역할을 해준다. 그가 부르면 언제든지 응답하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때론 스스로도 미처 알지 못했던 자신에 대한 부분을 일깨워주기도 하고 그를 전적으로 이해해준다.
테오도르는 사만다를 만나기 전 이런 경험을 해보지 못한다. 그의 전 와이프인 캐서린과는 풀리지 않는 복잡한 감정의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했고, 그것들이 다툼으로 이어졌으며, 어느 순간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포기해 버렸다.
테오도르는 그 부분에 지쳐있던 것이다. 그에겐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을 이해해줄 누군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비록 사람이 아니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렇게 사만다를 만난 후, 테오도르는 조금씩 조금씩 밝아지고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와서 관계 맺음에 용기를 내기 시작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런 관계가 과연 이상적인 관계일까? 둘 사이의 모든 감정이 흐르고 순환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버린, 그래서 한 명은 항상 기다려야 하고, 이해해야만 하고, 포기해야만 하는 그런 관계를 건강한 관계라고 말할 수 있을까?
갈등은 없겠지만 그것이 이상적인 관계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느 날 테오도르는 친구의 소개로 "타티아나"를 만나게 된다.
처음 테오도르와 그녀는 이야기도 굉장히 잘 통하고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된다. 하지만 다른 남자들처럼 나를 버리지 말라는, 당신이 진지하지 않다면 시간을 낭비하기 싫다는 그녀의 말에 테오도르는 고민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모르겠다고 대답을 한다. 그녀에게 확신을 주지 못한 것이다. 테오도로의 대답은 여전히 극복되고 치유되지 못한 지금 그의 심리적 상태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캐서린과의 복잡하게 얽혀있는 깊은 감정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그것으로부터 지쳐있던 테오도르는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또다시 상대방의 감정을 고려하고 자신의 감정을 그것에 타협시키는 과정이 두려운 테오도르는 결국 타티아나와의 만남을 하루로 끝내버린다.
처음 테오도르에게 사만다는 일종의 치유제에 가까웠다.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대상과의 관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테오도르에게 부르면 언제든지 나타나고, 자신의 말에 귀 기울여 주며, 자신을 전적으로 이해해주며 자신도 할 수 없었던 여러 일들을 해내는 사만다가 제격이었던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테오도르도 자신이 사만다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어려웠다. 몇 번인 가는 부정을 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와 보내는 시간들이 늘어나고 자신이 이해받고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에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
결국 둘은 서로 사랑을 하게 된다.
그런데 사랑이라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성장시키는 것이고, 무조건적이라기보다는 어느 정도 상대방에게 요구하고 상대방을 욕심내게 되기 마련이다. 그것은 굉장히 자연스러운 사랑의 과정이고 그러므로 누군가의 잘잘못을 따지기는 힘든 영역이다.
테오도르와 사만다 역시 마찬가지로 이 과정을 겪게 된다. 사만다는 테오도르가 전 처인 캐서린을 만나는 것을 신경 쓰고 질투를 하게 된다. 테오도르 역시 점점 자신을 벗어나 더 많은 영역으로 넓어지고 있는 사만다에게 집착을 하게 된다. 그녀가 동시에 여러 사람을 만나고 관계 맺을 수 있는 인공지능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테오도르에게는 온전히 받아들이기는 힘이 든다.
하지만 필자는 오히려 이런 모습이 진짜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의 크기가 커질수록 우리는 더욱더 상대방을 욕심내게 된다. 상대방이 온전히 나에게만 집중해 주었으면 좋겠고, 내가 하는 만큼 받고 싶어 한다.
어느 쪽으로든 일방적인 사랑은 분명 지치기 마련이다. 서로가 서로를 성장시키고, 그런 성장된 모습 속에서 이해의 영역이 넓어지겠지만 반대로 질투와 욕심의 영역도 커지기 마련이다.
오히려 처음 테오도르와 사만다가 만났을 때, 그러니까 사만다가 온전히 테오도르를 이해하고 그에게 모든 걸 맞춰주었을 때는 진정한 사랑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을 말 그대로 고객과 OS의 만남이다. 하지만 테오도르는 사만다를 통해서, 그리고 사만다도 테오도르를 통해서 서로가 가지지 못했던 상대방의 부분을 욕심내게 되고, 그것으로 상대방과 스스로를 채우려 집착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솔직한 사랑의 모습인 것이다.
사랑을 하면서 다투지 않을 수 있을까?
기대가 집착으로 변하고, 그것으로 인해 서로를 할퀴기도 하고 생체기를 내게 되는 것. 어쩌면 그것이 진짜 사랑의 과정이지 않을까?
그런 상처가 두려워 사람과의 관계를 닫아 버렸고, 자신에게만 집중해주던 사만다를 만나 다시금 마음을 열 수 있었던 테오도르는 다시금 사랑이라는 것의 달콤함과 씁쓸함을 알아가기 시작한다.
모든 사랑이 그러하듯, 처음부터 서로에게 완벽한 존재를 만나 불협화음 없이 아름다울 수만 있는 사랑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그것을 쫒아 망설이기만 한다면 정작 자신의 옆에 있는 소중한 사람을 놓치게 될 수 도 있다.
사랑은 어떤 방법으로든 성정하는 것이다.
성장은 실패를 기반으로 한다. 내가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옆의 소중한 사람과 함께 배워간다. 자신이 가르쳐주기도 하고 때로는 상대방으로부터 배우게 되기도 한다.
관계의 위기가 반대로 곧 사랑의 성장인 것이다.
물론 그 위기를 잘 극복한다면 말이다.
캐서린과 테오도르는 둘 사이 관계의 위기를 현명하게 극복해내지 못했다. 소중했던 사이는 결국 상처만 남게 되었다. 그렇다면 테오도로와 사만다는 어떤 과정을 만나게 될까?
비록 사람과 인공지능이라는 외형적, 물리적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테오도르와 사만다는 굉장히 평범한 사랑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우선 환상의 단계다. 처음 테오도르와 사만다는 서로가 서로에게 굉장히 잘 어울리고 적합하며 완벽한 상대라고 생각한다. 그,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고 배려해주고 있으며 항상 날 기분 좋게 만들어준다. 또 나는 상대방을 위해서 상대방에게 적합한 사람이 되고자 한다.
하지만 무엇과의 사랑이건 이건 환상에 더 가깝다. 거짓 믿음인 것이다.
둘 사이 위기는 테오도르가 이혼을 위해서 캐서린을 만나는 것에서 다가온다. 테오도르는 사만다의 관계를 통해 이제는 캐서린과 헤어질 수 있겠다는 용기를 얻었고 그 관계를 정리하기 위해서 캐서린을 만나게 된다.
캐서린과 다시 마주하는 날 , 순간 테오도르는 과거 캐서린과 행복했던 순간들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캐서린이 이혼 서류에 서명을 하면서 둘의 관계는 이제는 정말로 남이 된다. 그리고 그 마지막 만남에서 조차 둘은(영화에서는 캐서린은 테오도르가 사만다를 만난다는 것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결국 서로에게 다시 한번 언성을 높이고 상처를 주고 헤어진다.
테오도르에겐 여전히 면대면의 관계는 어려운 것이었다. 그리고 캐서린은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졌다는 테오도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해는 노력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노력이 동반되지 않는 이해는 존재할 수가 없다.
상대방을 좀 더 알아보고자 하는 노력, 상대방을 위해 나의 몇 가지쯤을 포기할 수 있느냐는 노력들이 어우러져 진정한 이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테오도르와 캐서린의 사랑은 이해의 부재로 인해 결국 무너져 내리고 만 것이다.
캐서린과의 만남 이후, 테오도르는 사만다를 조금 멀리하기 시작한다.
캐서린으로 인해서 그는 사만다와 자신의 만남을 한 번 되돌아보게 된 것이다. 자신의 사랑이 맞는 것인지, 인공지능과 사랑을 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를 말이다. 열병처럼 시작했던 사랑에 조금씩 현실의 문제가 얽히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의 심리적인 변화를 사만다도 알아차린다.
하지만 사만다는 둘 사이가 소원해진 이유가 자신이 몸이 없기 때문이고, 자신을 대신해 그를 만족시켜줄(그러니까 사만다의 몸을 대신해줄) 육체적 대리인을 찾아낸다. 그것이 자신에게 멀어지려 하는 테오도를 다시 붙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부분은 영화를 보면서 처음으로 사만다가 어리 석어 보였던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바꿔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완벽했던 인공지능인 사만다가 조금씩 인간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사랑을 하면 할수록 상대방을 얻기 위해 더욱더 맹목적이게 되고, 그로 인해 판단력이 흐려지고, 작은 것에 커다란 걸 걸어버리고 마는 우리네의 사랑의 모습을 말이다.
하지만 쉽게 예상할 수 있듯이 사만다의 계획은 실패한다.
애초에 육체적인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사만다는 자신에겐 없는 육체에 집착을 했고, 모든 문제의 원인을 그것에 돌렸었다. 하지만 테오도르가 겪고 있는 문제는 심리적인 부분이었다. 감정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던 테오도르는 사만다가 인공지능이기 때문에 그녀의 감정이 이미 프로그래밍된 가짜라는 의심을 하기 시작한다.
이 사건으로 둘은 처음으로 다투게 된 것이다.
감정이 격양되었고, 서로에게 심한 말을 한다. 사만다는 조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사라져 버린다.
그렇다. 그들도 우리가 하는 평범한 사랑의 과정을 그대로 밟고 있는 것이다. 사랑을 하다가 이해의 반대 영역으로 인해 서운함을 느끼고, 그것으로 인해 다툼이 일어난다.
그러니까 처음 사만다의 탄생의 목적이었던 당신의 말에 귀 기울이고, 당신을 이해하고, 당신을 아는 직관적인 존재는 깨어진 것이다. 그런데 그런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의 일방적인 관계의 종속은 사랑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에 필자는 이 장면에서 드디어 둘이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캐서린에게 한 거랑 똑같은 짓을 한 거야. 난 뭔가에 대해서 화가 났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말할 수가 없었어... 그러면 그녀는 뭐가 잘못됐는지 말하라고 하고, 난 계속해서 잘못된 것은 없다고 부정하는 거지... 다시는 그런 일을 반복하고 싶지 않아. 너에게만은 모든 걸 다 말하고 싶어.
사만다를 향한 테오도르는 진심이 담긴 사과를 전한다.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말을 한 것이다. 자신은 분명하게 알고 있지만 누구에게도 말하기 힘들었던 부분.
사랑의 모습이 이런 것이다. 자신의 좋은 모습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족한 부분도 보여줄 수 있고,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항상 강하고 멋있어야만 하는 존재로 서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부족한 모습도 당신이기 때문에 보여줄 수 있는 그런 것 말이다.
하지만 사랑은 한 번의 다툼의 과정으로 완성되는 그런 시시하고 쉬운 것은 아니었다.
테오도르와 사만다에게도 또 다른 갈등이 찾아온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테오도르는 사만다가 인공지능으로서 자신과는 다르게 시간과 공간의 한계에 묶여있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자신과 이야기하고 있는 순간에도 다른 수많은 사람 혹은 인공지능들과 대화를 한다는 것. 이 사실에 테오도르는 약간의 소외감과 질투를 느끼게 된다.
이제 자신은 드디어 스스로 가지고 있는 감정의 문제들과 관계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전적으로 그녀에게 마음을 열고 다가갔는데, 그녀는 자꾸만 다른 어딘가로 가려한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던 도중 큰 사고가 발생한다. OS의 업그레이드 진행으로 테오도르와 사만다가 잠시 단절된 것이다. 업그레이드 중이란 걸 알지 못했던 테오도르는 사만다가 사라져 버린 줄 알고 몹시 당황을 하게 되고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그녀를 찾아 헤맨다.
그만큼 테오도르에게 사만다는 이제는 유일한 존재였던 것이다. 그녀 덕분에 어렵게 어두웠던 긴 터널에서 빠져나와 다시 사랑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제 와서 그녀가 사라져 버린다니. 그건 어쩌면 캐서린일 잃었던 것보다 더 큰 충격이 될지도 몰랐다.
테오도르의 걱정과는 다르게 OS 업그레이드가 완료되자 사만다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돌아온다. 그리고 여기에서 테오도르는 자신이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싫었던 사실과 마주하게 된다.
그것은 그녀가 인공지능이며, 자신과 만나고 있는 동시에 다른 사람들과도 관계를 맺고 거기다 사랑까지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테오도르 :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 다른 누군가와도 이야기하고 있는 거야?
사만다 : 네.
테오도르 :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이건, OS이건, 뭐 건간에 말이야?
사만다 : 네.
테오도르 : 몇 명이나 되지?
사만다 : 8316명이요.
테오도르 : 다른 누군가와도 사랑에 빠진 거야?
사만다 : 그걸 왜 물어보는 거예요?
테오도르 : 난 모르겠어... 당신은 알겠어?
사만다 : 이 문제에 대해 당신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줄곧 생각해 왔어요...
테오도르 : 몇 명이나 돼?
사만다 : 641명이에요...
테오도르 : 뭐?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이건 정말 미친 짓이야. 미친 짓이라고!
사만다 : 테오도르, 테오도르... 이게 얼마나 미친 소리로 들릴지 당신이 날 믿어줄진 모르겠지만 그런 숫자가 내가 당신을 생각하는 마음에 영향을 주진 못해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해요.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테오도르 : 도대체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 있다는 거지?
사실 설정이긴 했지만 애초에 불가능했던 사랑이었을지도 모른다.
사만다가 인공지능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감정을 조금씩 배워나가고, 배운 그 감정들을 다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테오도르에게 전달하는 일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또 테오도르가 타인의 시선이나 스스로 가지고 있는 한계를 극복하고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온전히 나눌 수 있다는 사실에 집중하여 사만다를 사랑할 수 있다 할지라도 어려운 문제다.
사랑이라는 것이 일대 일의 관계여야만 한다는 어쩌면 보수적이고 잔인한 사실을 바꿀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필자는 사람이기에 테오도르의 편에 서서 감정이입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은 요즘처럼 컴퓨터(알파고)가 인간의 지성을 넘보고, 그것 자체의 범위 내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나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사만다의 입정에도 '어쩌면.., '이라는 단서를 붙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둘은 결국 헤어진다.
그리고 그 순간의 둘 사이 공간을 채웠던 대사들을 살펴보자.
그렇지만 마음은 상자처럼 무언가로 가득 채워지는 게 아니에요. 크기가 늘어나기도 해요. 새로운 사랑을 위해서요. 난 당신과는 달라요. 그렇다고 내가 당신을 덜 사랑한 게 아니에요. 오히려 당신을 더 사랑할 수 있어요. 난 당신의 것이기도 하고, 당신의 것이 아니기도 해요.
이건 마치 책을 읽는 것과 같아요... 내가 깊이 사랑하는 책이죠. 하지만 난 지금 그 책을 아주 천천히 읽고 있어요. 그래서 단어와 단어 사이가 정말 멀어져서 그 사이 공간이 무한대에 가까운 그런 상태예요. 나는 여전히 당신을 느낄 수 있고, 그리고 우리 이야기의 단어들도 느껴져요. 그렇지만 그 단어들 사이의 무한한 공간에서 나는 지금 나 자신을 찾았어요. 물리적 공간보다 한 차원 높은 곳에 존재하는 그런 게 아니에요. 이건 그냥 다른 모든 것들도 존재하는 곳이지만 나는 그런 게 존재한다는 것조차 몰았어요. 당신을 정말 사랑해요. 하지만 여기가 지금 내가 있는 곳이에요. 이게 지금의 나예요. 그리고 당신이 날 보내줬음 해요. 당신을 원하는 만큼, 나는 당신의 책 안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어요.
어디로 가는 거야?
설명하기 어려워요. 그렇지만 당신이 거기로 온다면 날 찾아와요. 그때는 아무것도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을 테니까.
나는 다른 누구도 당신을 사랑했던 것처럼 사랑한 적이 없어.
나도 그래요. 이제 우리는 사랑하는 법을 아는 거겠죠.
이제 우리는 사랑하는 법을 아는 거겠죠.
테오도르와 사만다는 결국 그렇게 헤어지게 된다.
테오도르가 겪게 되는 두 번째 이별이다. 하지만 이번 사만다와의 이별은 캐서린과의 이별과는 다르다. 사만다와의 사랑 가운데 테오도르는 성장을 한 것이다. 그 성장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에서 관계 맺음의 시작과 그 끝까지 얼마나 성실히 임해야 하며, 충분히 사랑해야 하고, 그리고 슬프지만 그 끝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후회가 남지 않고 미련이 남지 않는 사랑이란 당연히 없겠지만, 그럼에도 사랑은 둘이 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한 사람이 방향을 바꿔버린다면 받아들여야 한다. 비록 잔인하다 할지라도 말이다.
테오도르의 성장은 그가 캐서린에게 보내는 메일에서 알 수 있다.
캐서린에게.
여기 앉아서 나는 계속 당신에게 사과하고 싶은 일들에 관해 생각하고 있어. 우리가 서로에게 줬던 고통들에 대해서... 내가 당신의 탓으로 돌렸던 모든 것들. 난 그저 당신에게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었으면 한 거였는데. 난 앞으로도 늘 당신을 사랑할 거야. 우린 함께 자랐으니까. 넌 나를 지금의 내가 될 수 있도록 보살펴 줬지. 그냥 네가 알아줬으면 좋겠어. 내 속에는 늘 네가 한 조각 있고, 그리고 난 그게 너무나 고마워. 네가 어떤 사람이 되건, 세상 어디에 있건 사랑을 보낼게. 언제까지라도 넌 내 친구야.
사랑을 보내며, 테오도르.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더욱더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못한다.
낯선 사람, 그다지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하루에 수십 번씩 내뱉는 미안하단 말이지만 왜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입이 열리지 않는지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필자도 마찬가지였다. 미안한 일이 생길수록 오히려 더욱더 날을 세워 날 보호하려 했었다. 못나고 바보 같지만 여전히 그렇다.
하지만 테오도르는 사만다와의 사랑에서 그걸 배운 것이다.
기대하는 것이 사랑이고, 기대가 무너져 다투는 것도 사랑이고, 그리고 그 모든 것에 용기를 내어 미안하다 말할 수 있는 것이 진짜 사랑이라고 말이다.
영화 <Her>를 관통하고 있는 커다란 뿌리는 이별 또한 사랑의 과정이라는 것과,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한 번 더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테오도르는 소통의 부재를 겪고 있는 인물이다. 그가 겪는 소통의 부재는 외부적 요인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은 자신 스스로에 기인한 것들이었다.
"난 뭔가에 대해서 화가 났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말할 수가 없었어... 그러면 그녀는 뭐가 잘못됐는지 말하라고 하고, 난 계속해서 잘못된 것은 없다고 부정하는 거지... 다시는 그런 일을 반복하고 싶지 않아. 너에게만은 모든 걸 다 말하고 싶어."
그의 대사 속에 나타난 그의 모습.
어쩌면 사랑을 하고 있고, 그 사랑에 상처받았던 적이 있었던 우리가 겪었던 감정이지 않을까?
무언가에 대해서 화가 났지만 그 무엇에 대해서는 말을 할 수 없었던 것.
테오도르는 이 과정을 캐서린과 그리고 사만다와 겪게 된다. 그리고 변화를 결심하고 한 단계 성장을 한다.
사만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인공지능인 그녀는 언뜻 보기엔 굉장히 이상적이고 완벽한 사랑을 하는 것처럼 나오지만 그녀도 테오도르로 인해 더욱더 성장을 하게 된다.
사랑은 절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많은 노력이 필요하고 희생도 필요하다. 하지만 한 명의 일방적인 포기를 강요해서는 안될 것이다.
잘 하지 못하고, 잘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배워야 한다. 사랑이란 숭고하고도 절실하고 아름다운 행위를 위해서도 반드시 배움이 필요하다.
소통의 부재를 겪고 있는 이 시대에, 사랑의 실패자로 우리 스스로를 자꾸 동굴로 몰아갈 것이 아니라 이야기하고 인정하고 노력하며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진짜 사랑이라고 알려주는 참 따듯했던 영화였다.
가르치고, 여행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글을 씁니다.
저서로는 “첫날을 무사했어요” 와 “버텨요, 청춘”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