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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전호 Aug 17. 2017

디태치먼트(Detachment)

분리와 애착, 그 사이 어딘가

영화 <디태치먼트_Detachment>의 포스터에도 잘 나타나 있듯이 주인공인 "애드리언 브로디"의 눈은 슬픔과 고독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의 눈빛만큼이나 이 영화는 슬프고 고독하다. 그런 면에 있어서 "애드리언 브로디"의 캐스팅에 필자는 백점을 주고 싶다.

"애드리언 브로디"만큼 영화의 "헨리" 역에 더 적합한 인물이 또 있을까?

개인적으로 이와 비슷한 느낌의 배우로 "라이언 고슬링"을 떠올려보기도 하지만 역시나 "애드리언 보르디"에게 한 표를 던지고 싶다.

전에 영화 <Her>의 리뷰에서도 한 번 언급했었지만, 포스터에 등장하는 주인공 눈빛 하나 만으로도 영화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은 상당히 훌륭하고 매력적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 영화의 포스터에도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언젠가 Y가 필자가 매거진 <금요 시네마>에 발행하고 있는 영화의 리뷰들은 대부분 비슷한 주제를 담고 있다고 말했다. 

상실과 고독.

별 다른 고민 없이 영화를 선택하고 그것에 관한 리뷰들을 올렸었는데 이 말을 듣고 그간 발행했던 영화의 리뷰들을 다시금 살펴보니 정말 그러하더라. 대부분 밝은 이야기보다는 우리가 감추고 싶고, 들춰지길 꺼려하는 주제을 말하고 있는 영화였다. 주인공은 아파했고, 무언가를 극복하려 노력했지만 결국 극복되지 못했던 그들의 힘든 이야기들이 있었다.

그렇다면 왜 필자는 그런 영화들에 자꾸 눈이 가고 그것들로부터 무언가 깊은 것들을 받아오는 것일까?

딱 잘라 취향이라고 말한다면 쉬울 것이다. 하지만 조금 깊게 생각해보면 결국 그것의 크기가 어떠하든 우리가 문제들을 직시해야만 무언가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그것들 이면의 희망을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덮어두고 모두가 행복했습니다, 라는 영화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환각제에 가까울 것이다.

영화라는 것은 분명하고 확실하게 현실을 반영해야 하고, 그 기반 위에 현실을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의 감정을 펼쳐내는 것이라면, 적어도 현실은 언제나 해피앤딩은 아니니까. 그런 의미에서 적어도 그것을 드러내고 그것들 가운데 관객들로 하여금 해결책을 찾게 하는 영화가 영화로서의 의무를 다 하 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오늘 소개할 영화 <디태치먼트_Detachment>도 마찬가지이다.

표면적으로 영화는 미국의 공교육, 학교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상처를 껴안은 채 교사에게 마음을 닫아버린 아이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갈수록 지쳐가는 학교의 선생님들. 서로가 무기력해져 결국 아무런 노력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는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있다.

주인공 헨리는 여러 학교를 옮겨가며 임시로 일하는 기간제 교사이다. 그리고 영화의 시작과 함께 헨리는 각자의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는 학생들로 이루어진 학교에 한 달간 기간제 교사로 일을 하게 된다.

그 안에서 무너지고 있는 공교육과 교사와 학생 사이의 불신, 교사의 무력감, 부모의 방관을 영화는 다루고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또 다른 주제가 있다. 그것은 영화의 제목처럼 분리(detachment)이다.

교사나 학생, 부모라는 사회적 지위와 역할에 맡겨진 분리가 아니라 개인이 겪어야만 했던 분리.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분리(Detachment)는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우선 영화의 제목인 "Detachmaent(분리)"의 반대말은 "Atachment(애착)"이다.

그리고 누구나 예외 없이 세상에 태어나 첫 애착의 대상은 바로 부모이다.

여러 학자들마다 애착의 결정적 시기를 약간씩 다르게 설명하고는 있지만 대부분 출생 후 3년 정도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 시기에 부모와 건강한 애착관계를 형성한 아이는 나중에 성인이 되어도 타인과 건강한 관계를 만들고 유지해 나갈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이 시기에 부모와 애착을 형성하지 못하고 분리를 경험하게 된 아이는 성인이 되어서도 모든 관계에 어려움 겪게 된다. 건너오는 애정을 온전히 받아내지 못하고, 자신이 품고 있는 감정을 제대로 전달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모든 관계에서 어긋나 버리고, 세상에 날을 세우고, 결국 스스로를 세상과 분리 시켜 한 없이 고독해진다.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처럼 말이다.

물론 분리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시간 순서로 따지면야 당연히 첫 시발점은 부모일 것이다. 그리고 조금씩 그 범위를 확장시켜 보면 교사, 친구, 사랑하는 사람 까지.


쉽게 말해서 관계라는 것은 그 이면에 필연적으로 "분리"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각자가 어딘가에서 일방적으로 경험당했던 분리는 때론 이후의 모든 관계까지 잠식해버리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회복되는 건 여간 쉽지가 않다.


그렇다면 우리의 분리는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주인공들이 가지고 있는 분리는 그들의 어느 시절에 기인한 것일까?



02. 나와, 혹은 누군가와의 분리


1. 헨리의 분리

주인공 헨리는 공허한 인물이다.

언뜻 보면 그의 분리와 고독은 그의 주체적인 선택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의 분리와 고독은 그의 선택이 아니었다. 헨리는 7살 때 엄마의 자살을 목격하게 된다. 당시 엄마의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자신의 무력감과 상처가 성인이 된 헨리를 뒤덮고 있다. 그래서 그는 여전히 고독하고 여전히 세상과 분리되어 있으며, 그러므로 모든 것이 슬픈 인물이다.

퇴근 후 종종 버스에서 눈물을 흘리던 헨리.

엄마의 죽음은 자신이 자초한 것도 아니고 원했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일방적으로 그에게 주어져버린 엄마의 죽음과 그 상처들이 성인이 된 현실의 헨리를 잠식하고 있다.

헨리는 그런 상처를 가진 채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는 자신처럼 상처를 껴안은 채 세상과 분리되어 있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로 일하고 있다. 어쩌면 아이러니이다. 스스로도 제대로 살고 있지 못한 인물이, 불안과 홀란에 휩싸인 헨리가 어떻게 누군가를 보살피고 가르친단 말인가.


영화는 헨리를 여러 학교를 옮겨 다니며 일을 하는 기간제 교사로 설정하고 있다. 그건 아마도 헨리의 분리를 상징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헨리는 관계 맺음을 원하지 않는다. 아니, 엄마의 자살로 인한 분리 때문에 타인과 관계를 맺지 못하는 인물인 것이다.

교사라는 직업은 단순히 학생들에게 지식만을 가르치는 전달자는 아니다. 아이들과 정서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어야 함은 물론이고, 그들이 겪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의 방향과 해결책을 제시해줘야 한다.

세상과 분리된, 스스로도 충분히 고독하고 슬픈 헨리가 과연 상처를 가지고 있는 아이들을 감당할 수 있을까?


2. 메리다의 분리

메리다는 그녀가 속한 어느 곳에도 적응하지 못했다.

누군가와도 애착의 관계를 형성하지 못한 채 가정과 교실에서도 혼자 분리되어 있는 학생이 바로 메리다였다.

그녀의 부모조차 그녀의 재능(사진을 찍고 그것을 예술적으로 표현해내는) 칭찬해주지 않고 무시한다. 또 그녀에게 살을 좀 빼라며 그녀의 콤플렉스를 건드리기도 한다. 학교의 친구들도 그녀에게 모욕적인 말을 하며 그녀를 따돌린다. 결국 그녀는 모든 희망을 놓은 채 세상과 분리되어 있는 채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메리다에게 헨리가 나타난 것이다.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을 진심으로 대하는 헨리에게 강한 애착을 느낀다. 그가 그녀에게 삶의 안식처가 되어 줄 것이라고 믿는다. 그녀에게 처음 관심을 가져준 사람이 바로 헨리였던 것이다. 물론 헨리가 처음 그녀에게 건넸던 관심은 교사가 학생에게 건넬 수 있는 딱 그만큼의 관심이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메리다가 헨리에게 느끼고 건넸던 감정이 사랑의 감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메리다의 감정은 그것보다 좀 더 본질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애착인 것이다.

애착은 그녀가 가져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부모에게도, 친구들에게도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애착의 대상을 처음 만나게 된 메리다. 하지만 이런 감정이 처음이었으므로 메리다는 그것을 표현하는데 서툴기만 하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메리다가 생에 처음으로 느꼈던 애착의 대상인 헨리는 타인의 애착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이었다. 스스로 꾸역꾸역 살아내기에도 버거웠던 헨리는 메리다의 애착을 온전히 받아내지 못한다.

결국 헨리에게서조차 분리된 메리다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자살.

건강하지 못한 선택과 비극적인 결말.

좀 더 본질적으로 생각해보면 메리다의 죽음은 헨리와의 분리에 기인한 것도 있겠지만 결국은 애착관계의 부재이다. 건강한 애착관계를 형성하지 못했던 메리다는 자신이 건넸던 관계가 부정당했을 때 그것을 회복해내는 힘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리고 메리다의 죽음을 눈 앞에서 지켜봐야 했던 헨리는 그녀의 죽음으로 인해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된다.


3. 에리카의 분리

에리카는 거리 위의 소녀이다. 몸을 팔아가며 하루하루를 연명해가는 창부.

고작 열다섯의 소녀가 감당하기에 그녀의 현실은 너무나 비극적이다. 그리고 그녀의 현실보다 더 비극적인 것은 바로 그녀가 그녀 스스로를 포기해버렸다는 것이다.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얼마 많은 가능성과 희망을 가직 있는 존재라는 것을 그녀 스스로가 외면하고 있다.

영화에서 에리카의 성장배경에 대해서는 자세히 설명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의 현 상황만 보더라도 그녀는 충분히 부모로부터,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인물이다.

성인이 되기 전, 모든 아이들은 보호를 받아야 한다. 가정으로부터, 그리고 학교로부터. 하지만 에리카는 그 모든 곳에서 비켜나 있다.  외면당한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외면해 버린 것인지.

결국 에리카도 누군가와의 애착이 결여되어 있기에 사람과의 진실된 관계를 맺어가지 못한다.

하지만 에리카는 헨리를 만나면서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다. 헨리는 에리카가 그동안 만나왔던 어른들과는 달랐다. 모든 어른이 그녀를 이용하고 착취했다면 헨리는 그녀를 한 명의 사람으로 존중하고 애정을 준다. 그녀가 제대로 성장하길 바랐던 첫 사람이었던 것이다.

에리카는 헨리에게 정착하고 싶어 했다. 헨리에게 애착의 감정을 건넸다. 그를 위해서 아침을 준비하고 헨리의 데이트를 질투도 하면서 애정을 품게 된다.

에리카에 있어서 헨리는 그녀가 처음으로 가져볼 수 있고 마음을 건넬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헨리는 자신의 분리되고 고독한 삶에 타인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이었다.

행복했던 시간을 뒤로한 채 헨리는 에리카를 청소년 보호센터에 보내게 되고 그녀는 절규하면서 헨리와 헤어지게 된다. 헨리에게 애착되려 했던 에리카가 결국 다시 그로부터 분리되고 만다.





03. 분리에서 애착으로


영화 <디태치먼트_Detachment>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물들이 겪어내는 분리와 애착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보여주며 진행된다. 건강한 애착 관계를 맺지 못하고 세상에서 분리되어 있던 세 사람이 서로에게 애착을 건네고 그것들이 거절당하고, 다시 다가가기를 반복한다.

사실 다소 어려운 주제임이 확실하다.

어렵고 어둡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짐작조차 어렵고, 그것이 나의 이야기이자 내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이기에 더 두렵고 더 슬프다.

영화는 이런 문제들에 급진적이고 환상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다. 어찌 보면 잔인할 정도로 무덤덤하게 문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할 수 있는 만큼, 따 그만큼만의 해결책을 제시한다.

그 과정 중에서 영화가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몇 가지의 것들을 살펴보자.


1. 상처 입은 사람이 상처를 치유해준다

이 영화는 지금까지의 학교와 청소년들의 문제를 다뤘던 다른 영화들과는 상당히 다른 방향의 해결책을 제시한다. 여타 다른 영화들이 굉장히 밝은 교사가 쨘 하고 등장해서는 아이들의 상처를 보듬고 아이들에게 관심을 보이고, 그들의 재능이나 특기를 발휘할 기회를 제공해 모두가 다 행복했습니다, 의 뻔한 결과를 보여주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다.

영화 "디태치먼트"가 헨리를 통해서 건네는 하나의 큰 상징은 상처를 입은 사람이 상처를 치유해준다, 라는 것이다.

사실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중에 상처가 없고, 밝으며 활기찬 인물은 단 한 명도 없다.

자신에 모든 것을 다 해결해버리겠다, 라는 영웅적 인물도 등장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각자의 상처를 껴안고 살아가고 있으며(교장이건, 교사건, 학생이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버거운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자신 외에 다른 타인의 삶을 돌볼 여력도 없고, 그 정도의 능력도 가지고 있지 않다.

헨리도 마찬가지다.

서두에 말했듯이 헨리는 어린 시절 엄마의 자살로 인한 상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끝까지 제대로 설명되진 않았지만 분명 할아버지에 대한 상처도 있을 것이다. 헨리가 계속해서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가 혹시 노트에 무언가를 기록하진 않았는지(그것들은 일종의 어떤 고백이었을 것이다) 들춰보는 장면으로 미루어 보아 두 사이에도 무언가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헨리가 서툴기는 하지만 상처받은 인물들을 치유한다. 책임감이란 이름 아래 할아버지를 끝까지 보살핀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고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했던 에리카에게도 애정을 건네면서 그녀를 치유한다.

눈 앞에서 메리다의 죽음을 목격한 헨리는 갈림길에 서게 된다. 어렸을 적 엄마의 죽음을 목격했을 때처럼 다시 세상에서 분리되어 버리고 스스로 고립되어버리는 방법을 선택할지, 아니면 그 반대의 길을 선택해 힘들겠지만 그것에 직면하고 그리고 할 수 있는 최선으 노력을 할지를.

헨리의 선택은 후자였다. 그리고 그런 헨리의 선택이 이 영화가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인 것 같기도 하다.

우린 모두 상처를 지니고 살아가지만, 그런 우리도 타인을 도울 수 있다.

헨리는 에리카를 찾아간다.

비록 자신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지만 이제는 자신에게 애착을 건네는 상대를 내치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분리가 아니라 애착을 선택한다. 에리카의 죽음이 헨리를 성장시킨 것이다.


2. 치유의 두 가지 갈림길

개인적으로 필자가 영화를 보면서 안타까웠던 점이 하나 있다.

바로 메리다의 죽음이었다.

영화에서 메리다와 에리카는 모두 헨리에게 애착을 건넨다. 하지만 메리다는 극단적인 선택으로 헨리를 변화시키고 변화된 헨리는 에리카를 구해낸다. 한 명의 죽음이 한 명을 살려낸다.

의미 없는 가정이겠지만 만약 헨리가 좀 더 따듯하게 메리다를 받아줬다면, 이라는 안타까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다.


3. 덤으로 교사의 이야기

덤으로 영화의 주된 이야기는 아니지만 교사의 이야기를 해 보겠다.(필자의 직업도 교사이니 말이다.)

영화의 배경은 미국의 공립학교이다. 그것도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아이들이 모여 있는 학교. 그리그 이 학교 때문에 주변의 집값마저 떨어져 교육당국에선 큰 골칫거리인 학교.


이 학교에서 교사는 무기력한 존재로 묘사된다.

한마디로 막 나가는 아이들 앞에서 어떤 해결책도 제시해주지 못할뿐더러 오히려 교사 스스로 살아남기조차 상당히 고통스러운 존재이다.

예전엔 스승의 그림자조차 밟지 않는다는 말이 있었지만 사실 요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가정교육에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았던 부모는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학교에 떠넘겨 버리고 책임을 교사에게 전가한다. 아이의 잘못이 자신에게 기인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교사의 관점에서 이야기해보면 가정의 영역과 학교의 영역은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분리되어 있다.

각자가 맡은 역할을 대신해줄 수 없는 것이다. 두 곳 모두에서 제대로 된 교육이 이루어져야만 아이는 건강하게 자랄 수 있다.

그러므로 교사도 부모도 둘 모두 노력했으면 좋겠다. 가정과 학교, 둘 중 한 군데라도 어긋나 버리면 아이는 제대로 성장할 수 없으니까.




04. 필자의 감상_당신의 분리는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우리는 좀 더 자세하고 세밀하고 따듯하게 주변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것에 필자가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걸 바라보면서 했던 생각이다.

영화 <디태치먼트_Detachment>는 학교현장에서의 이야기이지만 <죽은 시인의 사회>나 <스쿨 오브 락>과는 그 결을 달리하고 있다.

쉽게 말해서 따듯하고 서정적이지도 않고, 비현실적으로 환상적이지도 않다.

철저하고 날카롭게 지금, 이 순간의 우리 문제를 겨냥하고 있다.


현대사회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여러 문제들에는 분명 원인이 있다.

가정에서 부모와의 갈등일 수도 있고, 학교에서의 교사와의 혹은 급우들과의 갈등일지도 모르겠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 원인들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그리고 그 상처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쉽게 말하면 우리 모두는 문제를 껴안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 문제들은 삶의 종종 불쑥 튀어나와 우리를 제대로 살지 못하게 만든다. 타인에게 날을 세우게 만들고 자신이 만들어놓은 작은 공간 속에 스스로를 고립시키게도 한다.


영화는 바로 이 점에 주목하고 있다. 주인공인 헨리, 에리카, 메리다는 전부 상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상처가 "Detachment(분리)"를 만들어냈다.

분리된 사람은 연결될 수 없다. 연결될 수 없다면 우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을 주지도 받지도 못한다.

영화는 그 극복의 과정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 과정이 과장되거나 비현실적이지 않다. 슬픔과 아픔을 포함하고 있다. 그럼에도 극복된다. 그리고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간다.


영화의 큰 흐름은 영화 Detachment(분리)에서 Atachment(애착)으로 흐른다. 그리고 그 흐름의 주체는 바로 상처를 품고 살아가는 우리 자신이다.

내가 어디로부터 Detachment(분리) 되었는지 바라보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누구에게 Atachment(애착)을 건넬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영화는 말해주고 있다.






가르치고, 여행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글을 씁니다.
저서로는 “첫날을 무사했어요” 와 “버텨요, 청춘”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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