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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전호 Aug 22. 2017

더 테이블(The table)

테이블 위에 놓인, 너와 나의 이야기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본 리뷰는 브런치 <무비 패스> 시사회 관람 후 작성되었습니다.)

영화의 리뷰를 시작하기 전,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 작가는 "무라카미 하루키"이다. 

개인적으로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를 일일이 나열해 보자면 끝이 없겠지만 하나만 꼽아 보라면 그의 짧고 간결한 문체이다. 그리고 그 짧은 문장 안에 담긴 많은 의미들까지도. 

하루키는 어찌 보면 불성실해 보이는 현상과 사물에 대한 간결한 묘사 속에 독자가 개입할 많은 여지를 남겨놓는 작가이다. 그리고 그 공백들을 스스로 메워야 하는 독자의 상상력으로 소설의 세계는 더욱 넓어지고 깊어지게 된다. 

그래서 혹자는 하루키의 작품은 장편소설보다는 짧은 단편소설이 더 뛰어나다고 말하기도 한다. 필자도 이 평가에는 많은 부분 동의하고 있다. 물론 장편소설을 이끌어가는 그의 상상력과 서사는 말할 것도 없이 대단하다.


영화 <더 테이블>에서 필자는 영화가 하루키의 단편소설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아마도 영화가 서로 다른 네 편의 짧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옴니버스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70분이라는 다소 짧은 러닝타임 속에 네 편의 이야기가 실려야 했으므로, 관객들은 인물들의 단편적인 이야기만 접하게 된다. 그 이야기들은 "기승전"을 생략한 체 "결"만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관객들은 그 나머지의 것들을 추측하고 채워나가야 한다. 그래서 어찌 보면 가볍기도 하고, 반대로 상당히 집중을 해야만 이면의 이야기들을 파악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매우 불친절해 보이지만 그만큼 관객의 공간은 늘어나게 된다. 그리고 인물들의 대화에 집중하면서 그 공백들을 채워가는 작업은 꽤나 큰 즐거움이었다. 마치 하루키의 단편소설들처럼 말이다.


영화 <더 테이블>은 서울의 어느 한적한 동네에 있는 카페, 그곳의 창가 자리 작은 테이블 위에서 시간의 순서에 따라 서로 다른 인물들이 풀어내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같은 공간에서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지만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는 하나이다.


"마음이 지나가는 곳"


영화는 인물들의 마음에 집중하고 있다. 

각자의 마음이 지나가는 속도와 그것의 방향. 그리고 그것들의 차이로 인한 균열과 그것을 감추고 애써 봉합해보려는 노력들. 때론 숨기고 싶었던 마음이 들춰지기도 하고, 들춰졌으므로 결국 결과물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것이 사랑이건 이별이건 말이다.


영화는 바로 그 마음의 방향과 속도를 염탐하듯 훔쳐본다. 그것은 "카페"라는 독특한 장소에서 이야기가 펼쳐지기 때문일 것이다. 카페라는 공간이 주는 어느 정도의 독립성과 어느 정도의 개방성. 그 사이의 접점에 이야기가 놓여 있고, 우리는 그것들을 아주 살짝 엿보는 것이다.

그 이야기들은 시작이기도 했고, 끝이기도 했다. 커지려는 마음이 식어버리기도 했고, 이어지려 했던 마음을 테이블 건너 상대방이 슬프게 내치기도 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영화 속 이야기들은 나와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였다. 우리가 그것에 개입하거나 크기를 가늠해 평가할 여지는 애초에 없었다.

엿보았기 때문에 가볍기도 했고, 개입할 수 없었으므로 안타깝기도 했던 네 편의 이야기를 소개해보고자 한다.



01. 오전 열한 시, 에스프레소와 맥주


"추억을 기억하는 서로 다른 방법"


추억을 기억하는 방법은 서로 다르다. 

같은 공간, 같은 시절을 겪어냈으므로 그것은 하나이여야 하겠지만 그것을 등지고 걸어왔던 각자의 방향이 달랐으므로 하나의 추억은 어느새 두 개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여기에 순수했던 사랑의 추억을 붙들고 있는 유진(정유미)과 추억과는 멀어지고 만 창석(정준원)이 있다.

둘은 서로가 순수했던 시절 연인이었다. 그리고 지금 유진은 대한민국 최고의 여배우가 되었고, 창석은 삶에 찌든 평번한 회사원이 되었다.

같은 추억을 공유했던, 하지만 이제는 서있는 곳이 너무나 많이 달라져 버린 두 사람이 같은 테이블에 앉아서 나눌 수 있는 대화는 무엇일까?

유진에게 창석은 자신의 순수했던 시절을 상징하는 소중한 존재였고, 창석에게 유진은 그저 세간에 떠도는 선전지에 등장하는 지나가버린 추억에 불과하다.

유진은 어느 정도의 설렘을 갖고 창석을 만나러 왔을 것이다. 자신이 그와의 추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만큼, 그도 역시 그럴 것이라는 기대. 그러므로 그 시절 우리는 참 좋았더라는 희망을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유진의 기대와 달리 창석은 지질했고, 그녀를 자신이 한 때 취했던 영광 정도로 치부해 버린다.

기대와 설렘이 실망으로 바뀌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지금의 유진과 창석은 되돌릴 수 없을 만큼 너무나 달라졌고 멀어져 버린 것이다. 에스프레소와 맥주처럼.

서로에게 있어서 무엇이 변해버렸는지, 그리고 그 변화가 얼마만큼인지에 대해선 직접적으로 설명되진 않지만 그들의 대화를 통해서, 대화를 덮고 있었던 표정의 변화를 통해서 우리는 그것이 무엇이었건 이제는 되돌릴 수 없는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나 많이 변했어."


유진의 말은 반대로 창석을 향한 것이었을 것이다. "너 많이 변했구나..."




02. 오후 두 시 삼십 분, 두 잔의 커피와 초콜릿 무스케이크


"진심은 전달된다"


사랑의 시작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기도 하고, 때론 예측하지 못할 정도로 급격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 그 시작이 조금은 미숙해서 오해를 쌓아버리고 말았던 경진(정은채)과 민호(전성우)가 있다. 

둘의 첫 만남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나와있지 않는다. 

둘의 대화를 통해 관객이 알 수 있는 사실은 세 번째 만남에서 민호는 경진의 집에 하룻밤 머물다 갔고, 그 뒤로 4개월간 배낭여행을 떠났다 돌아왔다. 그러니까 오늘 카페에서의 만남이 두 사람의 네 번째 만남인 것이다.

여기까지가 건조한 팩트.

그런데 테이블을 사이에 놓고 두 사람의 대화는 조금은 답답하다. 서로의 진심은 꺼내지 못한 채 대화는 상대방을 겉돌기만 한다. 게다가 경진은 민호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그에게 조금은 심통이 나있는 것 같기도 하다.

상대방을 향하는 자신의 마음은 숨기려 하고, 자신을 향한 상대방의 마음엔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둘은 분명 서로를 좋아하고 있다. 그런데 좋아하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그 마음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 말했다. 연애의 시작은 밀당이라고.

"좋은 거 보면 사진이라도 한 장 보내줄 줄 알았어요."

경진은 자신과의 만남 후 4개월의 여행 중 단 한 번도 연락이 없었던 민호가 서운하다. 그리고 그 서운함이 저 남자는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섣부른 포기를 가져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민호에게 벽을 쌓고, 조금은 차갑게 그를 대한다. 그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고개를 숙여 그의 눈을 피하기 바쁘다.

"경진 씨, 저 잘 모르시잖아요. 제가 뭐라고."

민호는 경진이 조금은 조심스럽다. 그녀가 자신을 어느 정도로 생각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여행 중에 연락은 해도 되는지, 사진은 보내도 되는지, 자신의 것을 공유해도 되는 것인지, 과연 자신이 그녀에게 그만큼의 사람인지.

그렇게 어색하고 불편한 대화가 막 끝나려고 할 무렵, 민호는 여행 중 경진에게 연락은 하지 못했지만 그녀를 생각하면서 샀던 물건들을 하나씩 꺼내며 선물한다. 체코에서 산 시계. 독일에서 산 카메라. 그 모든 것들이 민호가 여행 내내 경진을 생각해왔다는 증거였다. 그리고 그제야 경진도 마음을 연다. 민호가 자신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떠나는 민호를 경진은 잡지 못했고, 민호는 먼 곳에서 경진에게 연락을 하지 못했다. 서로가 서로를 보고 싶어 했고 마음이 커지고 있었지만 그래도 되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랬던 둘이 조용한 카페의 한편에서 드디어 수줍게 마음을 꺼내 보이고 사랑을 시작한다. 결과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는 모르겠지만 진심이었던 둘의 마음이 일단 시작된 것이다.

결국, 진심은 전달되는 것이다.




03. 오후 다섯 시, 두 잔의 따듯한 라테


"이번만은 진심으로"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시간. 테이블을 마주하고 조금은 낯선 만남이 있다.

은희(한예리)는 숙자(김혜옥)에게 거짓 상견례와 결혼식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한다. 그렇다. 둘은 사기 결혼식을 준비하기 위해 만난 가짜 관계인 것이다. 이런 일에는 감정을 개입시킬 여지가 없다. 서로의 역할을 제대로 확인하고 기계적으로 준비하면 그뿐.

그런데 어느 순간 둘의 대화에서 조금씩 진심이 꺼내지기 시작한다.

은희는 숙자에게 자신의 진짜 어머니 이름을 붙여준다.

"좋아서 하는 거예요. 아직까진..."

사실 은희는 이번 결혼식이 진심이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돈이 아니라 정말로 좋아서 하는 결혼식인 것이다. 그래서 숙자에게 돌아가신 자신의 어머니 이름을 붙여주고, 상대 가족들에게 잘 대해주라고 당부한다. 다만 솔직해질 기회를 놏치고 말아서 이렇게 결혼식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숙자도 은희의 진심을 알아챈다. 

게다가 이미 죽어버린, 자신의 잘못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던 딸의 결혼식과 은희와 결혼식 날짜가 똑같다. 숙자의 진심도 드러난다. 진심으로 최선을 다해서 자신의 딸처럼 상견례와 결혼식에 참여하려 한다. 딸의 결혼식에 입지 못했던 좋은 옷까지 준비하면서.


가짜 딸과, 가짜 엄마로 만났지만 어쩌면 이번만큼은 진짜의 마음이 담길 수도 있을 것 같다.

부도 은희와 숙자에게도 이번만큼은 진심이길.




04. 저녁 아홉 시, 식어버린 커피와 남겨진 홍차


"내리는 비처럼 막을 내리는 사랑"


어느새 비가 내리고 밖은 어두워진다. 여기 어색한 테이블을 마주하고 카페의 마지막 손님이 있다.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현실적인 결혼을 앞두고 있는 혜경(임수정)과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지만 이제는 놓아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운철(연우진).

그들의 사랑 앞에는 현실이라는 벽이 있다. 서로를 향한 마음은 여전하지만 이제는 그것이 자신들에게는 욕심임을 알아버린 관계. 추적추적 내리는 비처럼 서글프다.

"왜 마음 가는 길이랑 사람 가는 길이 달라지는 건지 모르겠어..."

운철이 원하면 돌아가겠다고 말했었던 혜경은 사실 운철에게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말처럼 마음은 여전히 운철에게 향하고 있지만 그녀가 가고 있는, 가야 할 길은 이미 달라져 버린 것이다. 그들의 사랑은 이미 식어버린 것이다.

혜경을 잡지 못했던 운철은 마음은 어땠을까?

그는 자신이 그녀를 잡을 수 없다는 것, 잡으려 한다 해도 그녀는 잡히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제 둘은 지나간 연인인 것이고 둘의 사랑은 이미 식어버렸다. 그것이 마음이 향하는 길이라 할지라도 그 길로 들어서기엔 이미 늦었다.

마지막 서로의 반대편으로 돌아 걸어가는 두 사람. 아마도 이제 두 사람이 다시 만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둘의 만남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이미 지난 사랑과 지난 연인이라는 것.

비 오는 날 저녁, 한적한 카페 앞에서 지난 사랑이 정말로 지난 사랑이 되고 말았다.

추억이 서로에게 같은 모습으로 기억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일일 것이다. 적어도 혜경과 운철의 추억은 동일했고 그것은 사랑으로 채워져 있다. 비록 이제는 말 그대로 추억에 불과할 테지만.




05. 필자의 감상_카페 옆자리, 우리의 이야기


요즘 영화관 상영작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히어로물이나 불륜, 처절한 사랑의 이야기, 한 명의 영웅이 등장해서 세상의 정의를 바로 세우는, 내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세상의 상상할 수 없는 인물들의 등장하는 영화들이 인기가 있는 이유는 쉽게 말해서 자극적이기 때문이다.

속하지 못한 세상의 이야기는 항상 그런 법이다. 판단을 뒤로하게 되고 내 삶과 연관시킬 필요가 없기 때문에 고민을 남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가볍고 개운하고 러닝타임이 어떻게 흘러간지도 모르게 몰입을 만들어낸다.


영화 <더 테이블>은 그런 시대의 주류를 살짝 비켜간 영화다. 

하지만 다양성 영화의 측면에서 그 소재가 독특(?) 하지도 않다. 우리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물론 세 번째 에피소드인 은희와 숙자의 이야기는 일상적인 이야기라고 치부하긴 조금 어렵지만.

카페에서 펼쳐진 이야기를 엿듣는 기분으로 관객들로 하여금 "일상"을 접하게 한다. 주인공들이 풀어내는 이야기이지만 그건 우리가 겪어봤고, 겪을법한 이야기다.

영화가 "일상"을 만날 때 그 향은 짙고 여운은 오래간다.


여기, 네 편의 우리의 마음을 지나가는 이야기가 있다. 

나른한 오후 향이 좋은 커피 한 잔을 마시며 그 이야기들을 한 번 엿들어 보자.





가르치고, 여행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글을 씁니다. 
저서로는 “첫날을 무사했어요” 와 “버텨요, 청춘”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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