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사랑 이래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본 리뷰는 브런치 <무비 패스> 시사회 관람 후 작성되었습니다.)
영화 <시인의 사랑>은 포스터에 꽤나 강렬한 문장을 담고 있었다.
시인이라 함은 본디 무언가를 담아 글로 표현해내는 사람일 테고, 그런 시인이 주인공인 영화의 포스터에 더 이상 쓸 수 없다는 자극적인(?) 문장이라니.
시인이 더 이상 시를 쓸 수 없다면 더 이상 시인이 아닐 것이고, 그렇게 되면 시인의 사랑도 없는 것이 아닌가?라는 가벼운 의문을 가지고 필자는 극장에 들어섰다.
그리고 약간은 생소한 "김양희"감독과, 독특한 캐릭터로 연기뿐 아니라 감독으로서의 재능도 충분히 보여줬던 주연 배우인 "양익준"이 과연 이 영화를 어떻게 풀어냈을까, 하는 기대감도 함께.
영화 <시인의 사랑>은 "김양희"감독의 데뷔작이다.
평소 영화를 선택할 때 연출을 맡은 감독의 작품의 목록을 꽤나 유심히 살피는 필자로서는 솔직히 시사회가 아니었으면 이 영화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Y의 말에 따라면 염소자리(필자의 별자리는 염소자리이다)는 새로운 시도를 잘 하지 않고 익숙한 것을 답습하는 성향이 있다고 한다. 그런 성향(?) 덕분인지 책이나 영화를 선택할 때 익숙한 작가와 감독을 선택하곤 한다. 한마디로 위험부담이 큰 모험적인 선택을 잘 하지 않는다. Y와는 반대로 말이다.
그런데 어느 광고의 카피처럼 "경력직만 뽑으면 난 도대체 어디서 경력을 쌓느냐?"라는 말도 충분히 공감하기 때문에(그리고 그러면 안된다는 Y의 잦은 충고 때문에) 요즘은 그나마 새로운 시도를 많이 해보는 편이다.
서두가 좀 길었지만 필자가 영화 <시인의 사랑>을 선택하게 된 이유를 구차하게 좀 길게 설명해 봤다.
"시"라는 것은 사실 어렵지만 아름답다.
짧은 몇 줄의 문장과 단어로 독자의 마음에 일렁임을 주기도 한다. 짧지만 강렬한 자극은 읽는 이를 꽤나 오랫동안 그리고 깊이 감동시킨다.
영화 <시인의 사랑>에도 시인이 등장한다. 현택기(양익준)는 제주도에서 나고 자란 제주도 토박이 시인이다. 하지만 우리가 평소에 떠올리는 시인의 이미지를 그는 가지고 있지 않다. 그나마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곤 소소하고 소탈함 뿐. 좋게 말해서 그런 거지 한마디로 지질하다.
시인이지만 제대로 된 시를 써내지 못하고, 남편으로서의 역할도 제대로 수행해내지 못한다. 게다가 정자마저 부족하다. 한마디로 총체적 난국.
초등학교 방과 후 시 쓰기 수업으로 버는 월 30만 원의 수익이 전부인 현택기는 어느 날 자신의 뮤즈를 만나게 된다. 집 앞 새로 생긴 도넛 가게의 아르바이트생인 세윤(정가람). 택기는 세윤을 보며 시상을 떠올리고 그럴듯한 시를 써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시인과 소년의 만남으로 영화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잘 지내요,
그래서 슬픔이 말라가요.
내가 하는 말을
나 혼자 듣고 지냅니다.
아 좋다, 같은 말을 내가 하고
나 혼자 듣습니다.
내일이 문 바깥에 도착한 지 오래되었어요.
그늘에 앉아 긴 혀를 빼물고 하루를 보내는 개처럼
내일의 냄새를 모르는 척합니다.
잘 지내는 걸까 궁금한 사람 하나 없이
내일의 날씨를 염려한 적도 없이
오후 내내 쌓아둔 모래성이
파도에 서서히 붕괴되는 걸 바라보았고
허리가 굽은 노인이 아코디언을 켜는 걸 한참 들었어요.
죽음을 기다리며 풀밭에 앉아 있는 나비에게
빠삐용, 이라고 혼잣말을 하는 남자애를 보았어요.
꿈속에선 자꾸
어린 내가 죄를 짓는답니다.
잠에서 깨어난 아침마다
검은 연민이 몸을 뒤척여 죄를 통과합니다.
바람이 통과하는 빨래들처럼
슬픔이 말라갑니다.
잘 지내 나는 안부는 안 듣고 싶어요.
안부가 슬픔을 깨울 테니까요.
슬픔은 또다시 나를 살아 있게 할 테니까요.
검게 익은 자두를 베어 물 때
손목을 타도 다디단 진물이 흘러내릴 때
아 맛있다,라고 말하고
나 혼자 들어요.
이처럼 시는 아름답다. 그리고 이런 시를 써내는 시인들은 참 대단하다.
영화 <시인의 사랑>은 시를 읊는 내레이션으로 시작을 열고 끝을 닫는다. 그만큼 영화를 보고 나면 가슴속 깊은 곳에 아름다운 시 한 구절이 남게 되는 영화이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분명 있다.
영화는 분명 그동안 다른 감독들이 풀어내지 못한 신선한 소재를 가지고 있다. 시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 영화는 한국에서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런데 반대로 질문을 해보면 이 영화가 과연 시에 대한, 시인에 대한 영화 일까?
대답은 아니다, 이다.
영화 <시인의 사랑>은 제목과는 반대로 "시"라는 것과 "시인"이 등장하지 않아도 충분히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는 영화이다. 가령 주인공의 직업이 중국집 요리사여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시인이라는 인물의 설정은 참신했다 하더라도, 시인이라는 직업이 영화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데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고, 영화의 내용은 다소 너무 뻔하다 싶을 정도로 반전이 없이 흘러간다.
시인은 무능력하고 무기력하다. 아내는 반대로 강하고 악착같다. 소년은 위태롭고 불안하다.
시인은 아내에게 감흥이 없고, 아내는 아이를 갖고 싶어 한다. 소년의 아버지는 아프고 소년의 어머니는 아버지와 소년에 대한 애정이 말라간다.
시인은 소년을 보고 사랑인지 뭔지 헷갈리는 감정을 품게 된다. 그 감정이 시인을 이기적으로 만든다. 아내는 불안하다. 떠나려는 시인을 붙잡는다. 하지만 시인은 떠난다. 소년은 시인을 쉽게 받아내지 못한다. 결국 아내를 떠났던 시인은 다시 아내에게 돌아온다. 시인을 슬프다. 눈물을 흘린다.
이 모든 과정을 관객은 사실 쉽사리 예상한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정적하게 흘러가고, 혹시나 하는 의문을 뭉개버린다. 제목이 <시인의 사랑>이지만 시인의 사랑이 아내에게 향하고 있지 않다는 건 영화의 시작부터 관객은 너무 쉽게 눈치채 버린다.
그렇다고 이 영화를 성소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큐어 영화라 하기에도 좀 부족하다.
필자만의 생각일지는 모르겠지만 시인이 소년을 이성적 사랑으로 여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건 시인을 향한 소년의 감정도 마찬가지다. 동성에게 끌리는 어떤 단서도 찾아볼 수 없다.
시인의 사랑은 동성을 향한 사랑이라기보다는 자신에게 시상을 떠올려주고 제대로 된 시를 쓸 수 있게 해주는 "대상"에 대한 사랑이다. 그러므로 소년이 소녀로 바뀐다고 하더라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영화의 진행은 친절하지 않다.
인물들의 선택과 결과를 관객들에게 전달해주지만 왜 그래야만 했는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없다. 영화의 장르가 추리 영화가 아니라면 적어도 감정선이 움직이는 단서라도 제공해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두 시간 남짓의 러닝타임 동안 자꾸만 왜?, 라는 물음을 던져야만 했다.
소재는 참신했지만 참신했던 그 소재를 기민하게 이끌어가는 선이 굵은 연출이 다소 아쉬웠다.
사실 시라는 것이 원래 불친절한 것이다.
많은 것을 설명치 않아도 많은 것을 전달해줄 수 있는 것이 시이다.
하지만 영화는 다르다. 시처럼 띄엄띄엄 설명을 하면 참신하다기보다는 불친절하다는 인상을 심어줄 뿐이다.
영화 <시인의 사랑>의 다소 아쉬웠던 부분이다.
<시인의 사랑>
생각이 나.
돈도 정자도 가진 게 없다. 그런데 사랑은 어디서 생겨나나.
<아내의 사랑>
생각이 나.
사랑이 절실히 다. 희망은 가느다랗고 사랑은 두꺼워서 지금 이대로도 좋다.
<소년의 사랑>
생각이 나.
잃을 것이 없다. 갈 수 없는 길에 발을 들였다. 꿈은 늘 그렇게 엉망진창이다.
시인과 아내와 소년의 사랑의 모습은 달랐다.
시인은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찾아왔던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에 집중하고 그것만을 생각한다. 그 감정이 자신에게 다시 시를 쓸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버린 아내에게는 더 이상 느낄 수 없었던 감정을 소년에게 품게 되고 그것에 모든 것을 잃어도 괜찮다는 듯 달려든다.
아내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 기다란 터널 안에 놓여 있다. 하지만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랑이라고 믿고 싶은 시인이 있기 때문에 살아간다. 그런데 어느 날 두껍다고 믿어왔던 사랑이 가느다란 실이 되어 버렸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던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기 시작한다.
소년은 가난하다. 소년은 아프다. 소년에겐 자신도 고아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가족은 있지만 진정한 가족이 없다. 그 모던데 가난했던 길 위에서 꿈을 만난 듯하여 다가가 보지만 결국 모든 게 망가져 버린다.
달랐던 사랑의 방향은 서로에게도 자신에게도 상처를 남길뿐이다.
어느덧 가을이다.
이젠 제법 공기가 차고, 조금은 길고 두꺼운 옷을 꺼내본다.
하늘도 가을을 머금었는지 제법 눅눅한 가을 냄새가 난다.
그런 가을날 보기 좋은 영화가 <시인의 사랑>이다. 참신한 소재를 아쉽게 풀어낸 조금은 무딘 연출력이 아쉬운 점도 있었지만 아름다운 시를 읊어내는 내레이션과 가을과 어울리는 제주도의 아름다운 풍경들이 그냥 좋다.
모든 것의 시작이 완벽할 수 없듯이 영화는 감독의 데뷔작이다. 치밀하지는 못했지만 풋풋함이 있다. 그 풋풋함이 그녀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한다.
가르치고, 여행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글을 씁니다.
저서로는 “첫날을 무사했어요” 와 “버텨요, 청춘”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