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기억하는 법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영화는 다소 성공하기가 힘들다,라고 생각하는 건 필자의 개인적인 사견이다.
사실 몇 번의 경험을 통해서 이 개인적인 논리는 꽤나 견고하게 자리 잡아버렸다.
물론 예외도 있었다.
예전에 매거진 "금요 시네마"에 소개한 적이 있었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원작인 소설보다 영화가 더 성공을 거뒀던 작품이다. 작품성도 뛰어났다.
하지만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같은 경우는 원작인 소설 자체가 워낙 짧은 단편 소설이었으므로 그것이 영화로 제작되었을 때는 전혀,라고 말 해도 좋을 정도로 다른 작품으로 탄생되었다. 내용은 풍성해졌고 주제는 더욱 선명해졌다.
그 외에 필자가 경험했던 <화차>, <용의자 X의 헌신>, <완득이>, <오만과 편견>등등의 원작인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는 사실 원작이었던 소설의 벽을 넘지는 못했었다. 영화를 보고 난 후의 아쉬움은 어쩔 수 었었다. 물론 이것도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말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원작인 소설을 영화로 만들기는 생각만큼 쉽지 않으며, 생각보다 성공하기가 어렵다.
소설 원작의 영화가 성공을 거두기 위해선 크게 두 가지의 전제 조건이 있다.
첫 번 째는 원작 소설 자체가 훌륭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은 그 훌륭한 원작을 제한된 러닝타임과, 제한된 사각형의 스크린 안에 잘 표현해내는 감독의 연출력과,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의 연기력일 것이다.
당연하게도 소설보다는 영화는 더 많은 제약을 가지고 있다. 시간적, 물리적 제한들. 그리고 그 제약들을 극복해내기란 결코 쉽지가 않으므로, 기대는 충족되기 어렵다.
오늘 필자가 소개할 책은 "김영하" 작가의 <살인자의 기억법>이다.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최근에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가 개봉했기 때문이다.
여기저기에서 꽤 많은 홍보물이 제작되어 노출되었다. 그때마다 필자는 속으로 과연 내가 읽어 알고 있는 원작 소설을 과연 영화가 얼마만큼, 혹은 그 이상을 표현해 냈을까?라고 작은 물음표를 던졌다.
아직 필자는 영화는 보지 못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은 것도 꽤 오래전이다.
이 책을 읽었을 당시 필자는 영화 <메멘토>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었다. 아마도 이야기의 소재가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기억상실과 빠져나가는 기억을 기억하려 애쓰는 지독한 노력.
"김영하"작가는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일 것이다.
요즘은 "알쓸신잡"이라는 TV 프로그램에서 얼굴을 보여주면 꽤 대중적인 작가로 자리 잡고 있다. 상당히 남성적인 문체를 가지고 있기도 하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데 망설임이 없다. 아마 그의 작품을 읽지 않은 독자는 있을지라도, 한 작품만 읽은 독자는 없을 것이다. 쉽게 말해서 매우 강한 흡입력을 가지고 높은 몰입을 가져오게 하는 능력이 그에게는 있다.
혹시 아직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도,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도 읽거나 보지 않은 분이 계시다면 개인적으로 소설을 먼저 읽어보길 추천한다.
비록 글을 쓰고 있는 필자도 아직 영화는 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원작이 좀 더 낫지 않겠느냐 하는 약간의 오지랖이다.
"기억이 점차 사라질 겁니다. 단기 기억이나 최근 기억부터 없어질 겁니다. 진행을 늦출 수는 있지만 막을 수는 없습니다. 일단은 처방해드린 약 꼬박꼬박 챙겨 드세요. 그리고 뭐든지 기록하고 그 기록을 몸에 지니세요. 나중엔 집도 못 찾아가실 수 있습니다."_13p
주인공 김병수는 살인자이다. 그것도 꽤 많은 살인은 꾸준히 저질렀던 연쇄 살인범.
살인에서 은퇴(?)한 지 이십여 년이 지난 그에게 예기치 못한 알츠하이머 병을 앓게 되면서 점점 기억을 잃어간다. 그리고 소설은 시작된다.
주인공의 설정이 굉장히 독특하다. 필자는 처음 <살인자의 기억법>을 읽었을 때 영화 <메멘토>를 떠올렸었다. 소설에서 김병수는 기억을 기억하기 위해 메모와 녹음을 사용했고, 영화 <메멘토>의 주인공은 자신의 몸에 문신을 세기는 자극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과연 기억을 잃어간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복잡하게 뒤얽힌 기억은 그 어느 것도 확신하지 못하게 만들어버린다. 자기 자신조차 믿을 수 없는 상황. 단단하다고 생각했던 기억과 확신이 모조리 흔들려 무엇이 진실인지조차 흐릿해져 버린 상황. 경험해보진 못했지만 충분히 끔찍할 것이라 짐작해본다.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은 일반인(?)이 경험하기 어려운 두 가지 대리 경험을 제공하고 있다.
살인과 알츠하이머.
살인은 당연히 경험해서는 안 될 일일 테고, 알츠하이머는 경험 자체로 꽤나 슬픈 일일 것이다. 대부분의 소설들이 누구나 경험할법한 이야기들을(그것의 대부분은 당연히 사랑) 풀어냄으로써 독자들이 해봤던 경험을 이끌어내는 것과는 반대편에 서있는 소설이 바로 <살인자의 기억법>이다. 필자로서는 살인과 알츠하이머 둘 모두 겪고 싶지가 않다.
이 설정이 바로 이 소설의 강점이자 동시에 약점이 될 수 있다. 소재의 신선함은 있지만 쉽게 공감을 이끌어 낼 수는 없는. 물론 "김영하"작가는 그 약점을 짧은 호흡의 직선적인 문체로 극복하고 있다.
"제발 우리 딸만은 살려주세요."
은희 엄마는 울며 사정했었다.
"알았어. 그건 걱정하지 마."
지금까지는 약속을 지켰다. 나는 빈말을 일삼는 놈들을 싫어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이 되지 않으려 노력해왔다. 지금부터가 문제다. 잊지 않기 위해 여기 다시 쓴다. 은희가 죽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_26p
1973년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의 한 은행에서 황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한 은행에서 은행강도가 6일 동안 인질극은 벌인 것이다. 그런데 인질로 잡혀있던 네 명의 은행 직원들이 6일 동안 은행강도와 애착관계를 형성해버린 것이다.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는 강도에게 인질이 호감을 느낀다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인질들은 위험한 상황 속에서 강도들이 자신을 해치지 않은 사실에 고마움을 느끼게 되고 결국 애착까지 가지게 돼버린 것이다.
심지어 은행강도가 붙잡혀 법정에 설 때조차 인질이었던 네 명의 직원들은 강도의 편을 들었었다. 후에 심리학자들은 이 심리를 "스톡홀름 증후군"이라 불렀다.
독자들은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을 읽으면서 경우는 조금 다를지 모르겠지만 "스톡홀름 증후군"을 경험하게 된다. 적어도 필자의 경우엔 그랬다.
분명히 주인공 김병수는 살인자다. 이분법적 사고로 "악"에 훨씬 더 가까운 사람이다. 그리고 그의 살인 동기엔 합리적인 이유가 없었으므로 순수한 악에 가깝다. 하지만 독자들은 어느 순간 김병수의 편을 들게 된다. 그에게 공감하고 애착을 갖게 된다. 마치 인질에 강도에게 애착을 느껴버리게 된 것처럼.
살인자인 김병수를 "선", 은희를 죽이려 하는 또 다른 살인자 박주태를 "악"으로 여기며 한쪽을 응원하며 책장을 넘긴다.
"무서운 건 악이 아니오. 시간이지. 아무도 그걸 이길 수가 없거든."_145p
"스톡홀름 증후군"의 간접적인 경험으로 독자들이 살인자 "김병수"의 편에 빠져들 때쯤, 독자들은 다시 혼란을 경험하게 된다.
소설은 은희를 지키고자 하는 전직 살인범 "김병수"와 은희를 죽이려 하는 새로운 살인자 "박주태"의 대립 구도로 진행된다.
그리고 철저하게 김병수의 일인칭 시점에서 소설이 쓰이고 있으므로, 비록 그의 기억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하더라도, 기억을 붙잡으려 하는 김병수의 처절하고도 절실한 노력과 딸을 지키고자 하는 그의 부성애가 독자들은 김병수의 말과 기억이 옳다,라고 믿도록 만들어버린다.
그런데 그의 기억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소설의 커다란 플롯에서 옳다,라고 여겨지던 진실이 과연 진실일까?라는 의문으로 휩싸인다.
가장 결정적인 단서는 집에서 키우고 있는 개에 대한 김병수와 딸 은희의 다른 증언이고, 종국에는 딸 은희의 존재에 대한 다른 기억이다.
독자는 점점 김병수의 기록에 대한 확신을 잃어가고, 스스로 믿어왔던 소설의 내용들에 대해 불신을 품기 시작한다.
우리는 그를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내가 마지막으로 사람을 죽인 것은 벌써 25년 전, 아니 26년 전인가, 하여튼 그쯤의 일이다. 그때까지 나를 추동한 힘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살인의 충동, 변태성욕 따위가 아니었다. 아쉬움이었다. 더 완벽한 쾌감이 가능하리라는 희망. 희생자를 묻을 때마다 나는 되뇌곤 했다.
다음엔 더 잘할 수 있을 거야.
내가 살인을 멈춘 것은 바로 그 희망이 사라졌기 때문이다._7p
김영하 작가는 그의 네 번째 장편소설 "빛의 제국"이 출간된 직후 이런 말을 했었다.
"그러나 감히 말하건대, 만약 이 소설이 잘 읽힌다면, 그 순간 당신은 이 소설을 잘못 읽고 있는 것이다."
다른 작품이긴 하지만 필자는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도 만찬 가지가 아닌가 싶다.
이 소설의 내용은 지극히 단순하다. 그리고 그것을 이끌어나가는 작가의 문체 또한 직선적이며 단순하다. 그런 단순한 구조와 단순한 문체가 독자들로 하여금 소설을 잘 읽히게 하고 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독자는 소설을 읽어나가면서 일종의 확신을 장착한다. 게다가 <살인자의 기억법>은 일반적인 추리소설과는 다르게 독자의 개입을 많이 요구하지 않는다. 눈에 뻔히 보일 정도로 많은 정보들을 노출하고 있다.
하지만 작가가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소설은 결단코 쉽게 술술 읽어나가면 안 된다. 보이는 대립의 구조는 살인자였던 김병수와 살인자인 박주태지만 좀 더 본질적인 건 기억에 대한 질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공 가운데에는 물질도 없고 느낌과 생각과 의지 작용과 의식도 없으며,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뜻도 없으며, 형체와 소리, 냄새와 맛과 감촉과 의식의 대상도 없으며, 눈의 경계도 없고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으며, 무명도 없고 또한 무명이 다함도 없으며, 늙고 죽음이 없고 또한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업승며, 괴루움과 괴루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없어짐과 괴로움을 없애는 길도 없으며, 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느니라."_148p
소설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반야심경의 구절.
결국 있다고 믿었던 기억이 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만 상황.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김영하"작가의 <살인자의 기억법>은 꽤나 신선한 소재에 색다른 시도를 엮어낸 소설이다.
추리소설의 옷을 입었지만 쫄깃한 긴장감은 주지 않는다. 대신 높은 몰입감과 책장을 덮었을 때는 얄미운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작가의 능력이다. 글을 잘 쓰는 사람들 사이에선 흔히 문체보다는 소재가 중요하다는 말을 하곤 한다. 적어도 이 소설에서 김영하 작가든 두 가지 모두를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기억"이라는 것은 "확실함"을 동반한다. 그 확실한 기억이 흔들리게 될 때, 우리는 공포를 느낀다. 그 공포가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이다.
아이러니하지만 현재를 잘 살기 위에선 반드시 기억이 필요하다.
과거의 기억은 현재의 기반이 되고, 앞으로의 일에 대한 "미래 기억"은 현재의 방향이 된다.
여기, 그 두 가지 기억을 모두 다 놓쳐버린 전직 살인자 김병수가 있다.
그리고 그가 기억이라고 붙들고 있는 것들을 지켜내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 우리로 하여금 책장에서 손을 떼지 못하게 한다.
책을 봤으니 이제 영화를 볼 차례인가?
가르치고, 여행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글을 씁니다.
저서로는 “첫날을 무사했어요” 와 “버텨요, 청춘”이 있습니다.